|
좋아하는 작가 글을 모두 사모으고 있어서 이번 것도 사보았는데요 제 작가가 자기 개인작보다는 이런 합작을 내는 수가 더 많아서 그 덕에 새로운 작가님들을 많이 알아가고 있어요. 제 작가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좋지만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도 보고 그 작가님들의 작품이나 직업에 흥미가 생겼어요. 나중에 그분들이나 그분들 작업물 같은 것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해요. 잘 읽었습니다!! |
|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이야기. 글항아리 ☆☆☆☆☆ 어쩌다 명함이 다섯개?쯤 된 적이 있었다. 한 곳에 적을 두고 일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따라 일정기간 동안 일을 하다보니 그랬다. 지금은 2년정도 한 곳에서 프로젝트를 하니 다른 일을 병행하기 쉽지않다. 투자를 해놓은 곳도 있고, 오래전부터 같이 일을 하자는 회사도 있다. 가끔 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있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다. 매우 혼자인 사람들.. 작가, 시인, 광고 크리에이터, 번역가, 사회학자, 피아니스트, 연극배우, 교정가... 가족이 없어 혼자라거나, 모든일을 A부터 Z까지 다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프리랜서라 불리고, 특정분야에서 자기만의 영역이 뚜렷하다는 의미 일게다. 사람일이 관계없이 이루어 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읽다보니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건강과 일상의 Routine이다. 스스로 일상을 꾸려나가는 능력. 예전에도 마찬가지지만 코로나 이후 더 소중한 일이 된 것 같다. "성실의 사이클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쏟는 시간과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알아서 기는 게 아니라 알아서 굴려야 된다. 관성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힘을 가해 가속과 제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 자신의 일을 향한 애정, 자신만의 리츄얼, 일과 사람을 대하는 철학이 뚜렷하고 삶을 지태할 정도로 두텁다. -------- . 잊을 만하면 번아웃의 위기에 빠지고 슬럼프를 겪는 것 역시 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자기 규율까지 만들어가며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삶이 나에게 적합한 형태의 삶임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직접 조직하고 이끌어나가는 감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혼자 일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독과 고립 속에서도 온전한 충만감의 조각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정기연재의 성공은 얼마나 건강한 상태로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술에 취한 예술가나 고독에 잠긴 현대인은 정기연재를 할 게 아니라 문학을 해야 할 것이고, 실은 문학에서조차술과 마약의 환상은 이미 깨졌습니다. 휘청이는 감성이 아니라 마감을 할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합니다. 성실의 사이클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번역가 김택규와 출판 교정가 황치영과 같은 프리랜서들이 피부에 새겨넣은 말이다. 여기저기 사회적 시선이 촘촘한 우리 사회에서 주변 사람의 눈길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들은 자기만의 외피를 쓰고 삶의 방법을 잘 개발해온 것이 벌써 수년, 수십 년째다. 예전부터 잘 살아왔지만, 비대면 시대가 된 지금 더 고양된 삶의 한때를 통과하고있다. 매우 혼자인 사람은 결국 혼자 잘 노는 사람이다. 나는 자유롭고 외롭다. 내면에 집중하고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소재로 시를 쓴다. 생활은 단조롭고 생각은 단순하다.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심리적 항상성을 유지해야 시를 쓸 수 있다. 가끔 멀고 추운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는 것처럼 외로움이 복받치는 날도 있다. 그래서 정신력과 건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것을 혼자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강해야 하고 동시에 유연해야 한다. 외진 곳에서 혼자 시를 쓰며 사는 일은 수행과도 같다. 대신 나는 꾸준한 산책으로 햇빛을 쬐고, 자전거를 오래 타며 바람을 쉰다. 우울감에 빠지거나 위축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쓴다. 우울에 대한 시조차 우울한 상태에서는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고요하고 즐겁게 지낸다. 의지와 상관없이 터지는 돌발 상황 앞에서는 신속히 이성적 인간이 되어 상황을 객관화해서 본다. 내가 나에게 쏟는 시간과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 시간이 많지만, 시간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혼자 있지만 진짜로 혼자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 인터넷, 휴대전화를 멀리해야 한다. 책도 조심해야 한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온통 책만 읽는 것도 시간을 잃는 좋은 예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나치게 빠져들면 도박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을 강탈당한다. 시간을 잃지 않고 상상을 자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루틴이 있어야한다. 당연히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걸 잘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배정한다. 그렇게 논 다음 날은 '노동일'이다. 시에 최대한 다가가보는 날이다. 뭐라도 떠올리고 상상하고 갖고 놀아본다. 시집도 읽어보고 해놓은 메모도 뒤적인다. 그러나 끝내 시를 얻지 못하면 그로 괜찮다. 노동일의 목표는 결과물을 얻는 게 아니고, 결과물을 얻기 위해 끙끙거리는 것 자체다. 그래서 노동일은 거의 성공적으로 실패한다. 노동의 결과는 며칠 후나 몇 달 후가 될 때가 많고, 안식의 결과로도 얻는다. 혹사한다고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 이상 운이 좋은 날은 어쩌다 온다. 창작을 하는 누구나 봉착하는 문제는 변화다. 지금까지 써왔던 것들과 앞으로 써나갈 것들을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인가. 창작자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변화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다. 변화하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창작자라면 공포에 떨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겨움을 느낀다. 다행이다. 지겨움을 느끼는 순간 창작자는 변하기 시작한다.창작자는 늘 자극을 기다리고, 수용할 것을 찾는다. 이때 자신을 믿어야 한다. 성급하게 작품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스스로가 다른 인간으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생각이 변하면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다른 작품을 낳는다. 어제의 나로 돌아가려는 창작자는 없다. 번데기가 되지 못한 송충이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비바람을 맞고 뙤약볕을 피해가며 필사적으로 나뭇잎을 갉아먹지 않은 송충이는 절대 살아남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공간을 찾아 자신을 외부와 완벽히 차단하지 못한 송충이는 번데기가 되지 못합니다. 번데기가 되었다고 해서 송충이가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번데기 안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고 외부와 차단된 것에 만족하면 결국 송충이는 스스로 만든 번데기에 갇혀 죽어갈 뿐입니다. 번데기 안에서 나비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킨 송충이만 살아남습니다. 고통스럽게 피부를 찢고 날개와 더듬이를 만들어야 하며 몸의 구조를 삼등분으로 나누고 합쳐야 합니다. 또한 몸에 쌓였던 노폐물을 모두 배설해야만 비로소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코알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한 가지 유칼립투스만 먹는 전문 취식종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존에 매우 불리할 수밖에없다. 만에 하나 유칼립투스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하니까. 한 가지 분야에 오래 헌신한 사람이 창의적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전제는 절반만 진실이다. 여기저기 넘나들며 창의적인 혁신을 이뤄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도 먹으려 하고, 내가 덜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려 하고, 내가 꺼리는 책도 읽으려 한다. 게다가 내가 멀리하려는 사람도 만나려고 하는데, 이것만은 이상하게 잘 안 된다. 알아서 기는 게 아니라 알아서 굴려야 된다. 관성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힘을 가해 가속과 제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남의 평가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제가 내린 평점이 낮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만족보다 불만이 높아진다면 힘이 생기지 않아 굴러가질 않으므로, 스스로 평가를 잘 내려야 한다. 평가의 기준은 실력, 수입, 평판, 자긍심, 만족감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영어도 like 와 love가 다르듯 덴마크어도 kunne lide와 '에스케eluke'가 다르다. 그러니까 좋아하면 싫은 것도 견디지만 사랑하면 싫은 걸 못 견딘다고 풀이할 만도 하다. 감정 상태를 따져 보면 좋아하다는 비교적 잔잔한 반면 사랑하다'는 몹시 격하다. 두루두루 좋아할 수는 있어도 두루두루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이 깊으니까 모든 걸 견디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예술 종사자는 아무리 공연이 많아도 정해진 그 시각에 최고의 효과를 내도록 자신의 시계를 맞춘다. 그렇게 준비된 시계는 매우 예민한 과정으로 흘러가며, 따라서 공연 일정이 변경되면 자신의 시계를 마치 시차가 있는 외국에 간 것처럼 다시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은 우천으로 단 하루가 연기돼도 선발 투수를 바꾸는 프로야구 경기를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야간 작업과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점철된 생활이 몇 년간 쌓이면서, 젊음으로 지탱하던 건강이 차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급기야 한번 단단히 아프고 난 뒤 식사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신경 써서 스스로를 밥해 먹이는 일이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그 몸에 깃든 마음을 정성스레 돌보는 일이기도 함을 알게 된 것이다. 집밥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뜬금없게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떠오를 때가 있다.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어서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종일 발코니에서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뫼르소가 “저녁을 만들어서 그냥 선 채로 먹었다”라고 서술하는 부분이다. 그 문장이 어쩐지 뫼르소라는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김없이 주어지는 일상을 그저 영위하기 위한 행위, 무언가 하기는 해야 하니까 신문을 읽고 섹스를 하듯이, 먹기는 해야 하니까 먹는 행위, 나는 나의 집밥이 그 근본적인 허무를 이겨내려는 작은 노력의 반복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찬장에서 가장 예쁜 그릇을 골라 꺼낸다. 내향적인 사람이란 타인과 만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돌아온 뒤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다. 나도 그렇다. 귀가 후에는 외출 시간의 몇 배에 달하는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에만 있어 버릇했더니 회복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다. 때로는 만난 사람의 수에 비례하고 때로는 대화의 피로도에 비례하는 이 회복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나는 꽤 공을 들인다. 자신에게 가혹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세간의 믿음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현대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충분히 스스로를 혹독하게 대하고 있다. 특히나 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취로 잘 계량화되어 드러나지 않는 창작활동에 대한 자괴감 탓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라면, 좀더 스스로를 오냐오냐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별다른 게 아니라 마음이 요구하는 바를 귀담아듣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다음에 온다. 스스로를 아낀 힘으로 타인도 아끼고, 자기 내면을 살핀 눈으로 세상도 살피고 헤아리는 일, 그래서 세상에 꼭 필요한 목소리와 시선을 만들어내는 일, 쉽지 않은 그 단계를 가능케 하는 마음의 근육이 사실은 자기 돌봄의 지난한 노력 속에서 키워지는 거라고, 집순이는 오늘도 굳게 믿고 있다. 시차 적응은 '잠'의 시간 주기를 맞추는 것과 함께 장의 운동 주기가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후 지금은 매일 걷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과식, 특히 밤사이 장의 휴식을 방해하는 야식은 하지 않는다. 결국 혼자 일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2020년 들어 어쩔 수 없이 생긴 큰 변화 중 하나는 홈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만난 자세요정' '듀잇' 채널은 비대면 시대에 나의 체력 관리를 돕는 스승이다. 결국 내가 번역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번역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미로 같은 원문을 탐색해 맥락을 감지하고 외시 의미와 함축 의미를 빠짐없이 파악해 맛깔나는 모국어 문장으로 옮겨내는 그 마술 같은 행위가 못 견디게 재미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