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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재 미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이며,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본인의 '학력/능력'보다 '사회 진출의 시기'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달라져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으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짓밟는 정치인들의 자녀 관련 비리와 LH 사태 같은 문제가 터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문득 불평등을 '능력(학력)에 따른 불평등'과 '세대 간의 불평등'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나라는 두 가지의 불평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다만 나라마다 각각의 비중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결정하는 주요 인자 중 하나가 고용 정책이다. 미국은 해고가 자유롭고 해고 비용이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노동 유연성이 높아서 경제 상황에 따라 대량 해고와 채용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 경우 채용 시기에 사회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용될 확률이 높으며 보상 또한 크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저숙련 육체/사무 노동의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에서 저학력자의 노동 가치는 낮아지고, 창의적 지식 노동을 담당할 고학력자의 가치가 높아지는, 학력에 의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노동 유연성이 높은 나라에서는 가치의 양극화에 따라 고학력자/저학력자의 고용률 및 보상의 양극화가 진행된다.
반면 과거의 유럽 국가나 한국과 같은 나라는 정규직의 해고가 어렵고 비용이 높아 노동 유연성이 낮은 편이다. 이 경우 경제 성장기에 채용한 노동자들을 침체기에 해고하기 어려우며, 이로 인해 두 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는 채용에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을 띄게 되는데, 이는 어느 정도 검증된 고학력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간에 이탈할 가능성이 적은 인원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사 내부에서 인사 적체가 발생하며, 회사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신규 채용을 점점 줄이는 방향으로 대응한다. 결국 앞선 세대의 쉬운 취업과 고용 안정성이 뒷 세대의 사회 진출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어 세대 간 불평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대학 졸업자들이 정규직을 구하지 못해 한 달에 천 유로 정도로 적고 불규칙한 소득을 받으며 생활하는 이야기를 다룬 '천 유로 세대'라는 소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널리 읽히면서 한동안 세대 간의 갈등이 화두가 되기도 했다. 2010년대 초반 유럽의 경제 위기 이후로 유럽과 우리나라는 고용 정책에 있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경제 위기라는 현실에 직면했던 유럽은 각 나라마다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노동 유연성을 높이고, 대신 사회 안전망 확대와 청년 고용에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펼쳤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유럽 국가들의 실업률 감소와 각종 경제지표 개선이 드러난 배경에는, 국제적 거시 경제 환경 자체가 개선된 영향도 있겠지만, 내부적인 경제 개혁 프로그램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 위기를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넘어간 우리나라의 경우 고용 정책의 큰 틀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기존 정규직의 노동조건 및 고용 안정성 강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청년 취업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코로나의 영향을 빼고 보더라도, 그 이전부터 취업률의 감소는 두드러진 수준이었다. 20~30대 초반 세대와 그 윗세대의 정치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부동산 가격 급등에 의한 자산 차이에 더해서, 고용 안정성을 누리고 있는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가 갖는 현 정부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현재, 특히 현 정부가 들어선 최근 3~4년 동안 우리나라 사회에서 발생한 양극화와 불평등은 학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세대 간의 차이로 인해 나타난 게 크다고 봐야할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 사회는 높은 노동 유연성으로 인해 능력주의와 학력에 의한 불평등이 만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책을 통해 능력주의의 폐해와 이론적 맹점을 다룸으로써 현재의 미국 사회에 대한 유효한 통찰을 던져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통찰이 현재의 우리나라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낮은 노동 유연성에 의한 세대 간 격차가 불평등의 주된 요인이 되어가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능력주의'와 '학력'의 문제를 짚는 이 책의 메시지는 결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처방이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재 미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이며,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본인의 '학력/능력'보다 '사회 진출의 시기'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달라져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으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짓밟는 정치인들의 자녀 관련 비리와 LH 사태 같은 문제가 터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책에서 진정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능력주의 그 자체보다는, "이 책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데에 일조한 추천사를 쓴 교수와 정치인들이다. 그들의 추천사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본인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는 내용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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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라는 명제는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테마이자, 능력주의의 이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로 대변되는 능력주의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공정하다고 생각해왔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는다는 명제 앞에 선뜻 반론을 제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설사 그런 반론이 제기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패자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하고 무시할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잘못되었다며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공정함이 과연 정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능력주의에 얽힌 공정함과 정의에 대해 살펴보며, 그것이 정말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지를 짚어보고 있다.
최근 들어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진 것은 왜일까? 아마 극심한 불평등에 따른 포퓰리즘적 저항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적 저항은 바로 주류정당과 집권 엘리트들이 자아낸 분노가 불을 댕긴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런 분노는 지난 40년간 추구해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공공선을 경제적 가치로 규정하고, 불평등으로 인한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 개념으로 정의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살펴보며, 능력주의의 기원을 서구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게 뿌리내린 성서신학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성공이란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이기에,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공은 미덕의 증표가 되었고,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며 따라서 실패도 그들 몫이라는 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능력주의 윤리는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는 한편,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소득불평등이 클지라도 계층이동이 가능하리라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이런 담론은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정당화 시켰다고 한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의 약속은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가능성의 약속이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런 교육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면서 교육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했고,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것으로 설령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를 묻고, 다른 하나는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해도 그게 과연 좋은 사회인지를 묻는다. 그는 먼저 성공에 대한 모든 불공정한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상상한다. 그럴 경우에도 가장 포괄적인 교육체제 안에서 가난한 집 아이가 풍부한 관심과 자원과 인맥을 갖춘 집안의 아이와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란 어렵고, 설사 이마저 제거했다고 하여도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의 여부라고 말한다. 저자는 능력주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이러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또한 능력주의 이상은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하고 노력의 중요성만을 과장한다. 그로인해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뿐 아니라 공동선 개념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주의 성공개념의 핵심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육과 일을 꼽는다. 먼저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기회만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에 재학하는 절대 다수의 학생이 이미 상층부 집안 출신이며, 이는 미국의 대학들이 대부분 기회를 늘리기 보다는 특권을 공고히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정치가들이 불평등 증가의 해법이 사회적 이동성증가이며, 사회적 이동성을 늘리는 방법이 교육이라는 주장과 배치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경쟁률이 높은 인기대학들은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는 대학들로 이러한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그런가 하면 능력주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정체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마저 깎아내리고 있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임에도 시장은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하고, 노동자에게 던져주는 쥐꼬리만한 보상도 당연시하기에 능력주의가 일으킨 불평등이 강력한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타개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행운’이라는 ‘우연’이 주는 능력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교육영역에서 내놓은 대안은 수학능력평가시험인 SAT의존도를 줄이고, 동문자녀/체육특기생/기부금입학자에 대한 혜택을 없애 명문대에 더 많은 사람이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불어 지원자 중 수학능력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걸러내고, 지원자 중에서 추첨하여 선발하자고 한다. 일정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는 대안제시 뿐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론을 예상하고 나름의 답변까지도 준비해놓고 있다.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급여세를 없애고 금융거래세를 신설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기여 측면에서 일을 생각하자고 한다. 물론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근본적으로 능력주의가 가져온 폐해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우리사회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란과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영역에서 행운이 좌우할 수 있음을 인정할 때 능력주의가 가져다주는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수긍이 가기도 한다.
최근 들어 능력주의에 관한 책들이 많이 눈에 뛴다. 그만큼 현대 세계가 능력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있고, 그만큼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마이클 샌델은 미국사회의 능력주의 폐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승자에겐 오만을 그리고 패자에겐 굴욕을 안겨주는 능력주의의 민낯은 어쩌면 우리사회가 더욱 심할지도 모르겠다. 사다리의 길이는 길어지고, 그 간격은 더없이 넓어진 지금 우리는 비로소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에게 필요한 공정과 정의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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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명높은 분량의 총균쇠도 9일 걸렸다. 제3의 침팬지 5일, 코스모스 10일.. 최근 책 읽는 속도를 보면 요 가벼운 분량으로 엮어 놓은(내용은 무겁지만) 책 쯤은 사나흘쯤 걸릴것 같았다. 왠걸.. 일주일동안 100페이지 겨우 나갔다. 어려워서가 아니고 생각할게 많아서가 아니고 문제는 번역이다. 사회철학적 용어들이 생소할 수도 있지만 일관성이 별로없다. 어디어디서는 oo주의 라고 썼다가 뒤에서는 oo이즘이라고 써 놓았다. 정의되지 않은 단어에 대해 뒤죽박죽으로 불러제낀다. 앞에서 수십장에 걸쳐 "복지국가 자유주의"라고 불러제껴놓고 한 10페이지 넘어가면 난데없이 그걸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라고 이름을 바꿔놓는다. 불필요하게 "이게 뭐지?"하면서 앞장을다시 뒤적여야된다. 필체도 주관성없이 이리저리 뒤섞여 자꾸 앞장을 다시 뒤적이게 만든다. 다른 서평보니 뒤로가면 번역이 더 엉망이라는데..ㅡㅡ 몇 번을 더 읽어봐야 될 것 같다. 차라리 원서를 사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함규진 역은 패쓰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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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능력 여기서 오늘날 정치의 혼란스러운 측면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보았듯 능력주의적 가정은 오늘날 가장 유력한 공공 철학자들에게 부정되었다. 그런데 왜 정치 언어와 대중의 태도는 '경제적 보상은 능력과 자격에 비례하고 있거나, 비례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하는 것일까? 주40 : N. Gregory Mankiw, "Sprending the Wealth Around : Reflections Inspir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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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公正) : 공평하고 올바름.
‘공정’의 사전적 의미를 접하고 나니, 과연 ‘현실세계’에서 ‘공정’에 대한 화두를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든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시선을 지닌 걸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접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공정’에 대한 논의를 공허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사회에서 ‘공평하고 올바름’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고 논하는 ‘공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출발선이 다른 상황에서 기회의 공정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그 노력은 의미를 지닐 것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사회이동성’을 전제로 한 ‘기회에 대한 공정', 즉,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나 자라더라도 공정하게 주어지는 기회에 의해 그리고 내 노력에 의해 사회적 위치의 이동이 가능하게 해주는 ‘기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주는 듯 보이는 ‘능력주의’와 이를 위해 강조되는 교육(학력주의)을 다각도로 바라본다. 과연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공정’한 기회의 수단이 되어주는가
예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과연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여러 측면에서 ‘정의’를 바라보고 고민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 역시 유사하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끊임없이 내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여겼던 ‘공정’에 대해 헤집으며 나를 고민에 빠뜨린다.
CHAPTER 1. 승자와 패자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CHAPTER 5. 성공의 윤리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CHAPTER 7. 일의 존엄성
# 능력주의 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참아왔다. 어디서 출발하든 부자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승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다. p.49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금은 미국 사회 역시 그 안에 많은 사회적 갈등을 지니고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단어의 속삭임은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책에서 만난 현실은 녹록치 않아보인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p.48
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노력으로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능력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응원으로 들리기도 한다.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중략)..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p.66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p.145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에 깔려있는 잔인함에 대해 지적하는데, 이제껏 ‘열심히 노력해라’, ‘하면 된다’는 응원만을 강조하며, 실패에 대한 원인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로 치부해왔던, 우리 사회가 간과하고 있던 일면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하면 된다” 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p.53
저자는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개인의 노력, 하면 된다는 신념에 깔린 이중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항상 ‘성공’한 사람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나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몰아가지만, 그렇다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기회의 공정함에 대해 논하게 된 것은 이미 출발할 때부터 타고난 행운을 거머쥐고 시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것인데, 어느새인가 그 고민은 잊고,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p.53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05-106
# 학력주의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는 교육 시스템의 책임이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평등이 꾸준히 늘어남에 따라 교육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교육이 이 사회의 다른 죄악들을 사면해주기를 바라며‘ - 크리스토퍼 헤이즈(작가, MSNBC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 pp.148-149
능력주의 화두를 통해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측면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학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마치 ‘일단 능력주의의 문제점은 잠시 접어두고, 사회에 나가기 전 나의 능력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되는 ’교육‘은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 싶다.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다. 고소득 직업과 명예로운 지위로의 여정에 있어 관문 역할을 하는 ’학위‘를 발급하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에서 이런 역할은 양날의 검이다. p.248
일단 기회 배분을 한다니 다행인가 싶은데 이 역시 양날의 검이라 표현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미국 대학은 놀랄 만큼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그들이 그 대학에 다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경제적 전망을 높여줌에도 그렇다.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 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p.266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고등교육을 기본적인 기회의 엔진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슬픈 소식일 것이다. p.266
이미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도 다시 그들끼리 만나 ‘그들만의’ 사회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더 이상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믿지 않는 우리 사회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SAT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간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대학을 노리는 학생들의 점수를 보면 이 격차가 특히 크다. p.259
저자는 여기에 더해 학력주의가 주는 폐해를 하나 더 지적한다. 바로 ‘대학’을 필수사항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시선이다.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p.150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제껏 별다른 의심 없이 당연하다 받아들였던,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 능력에 따른 보상,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응원의 적나라한 이면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여기에서 앞서 언급했던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한번 들여다볼까 한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것 중 하나가 고착된 이미지를 형성한 이 단어의 조합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 이다. 바로 ‘미국의 서사시’라는 글을 쓴 제임스 애덤스라고 한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p.350 - 애덤스 ’미국의 서사시‘ ’아메리칸 드림
그런데 무언가 내가 알고 있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나의 능력이나 학벌에 관계없이 오롯이 나로써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이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p.350
또한 저자가 말하는 ‘공동선’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운동장의 위쪽에 서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가장 잘 달리는 주자에게 납이 들어간 신발을 신길 필요는 없다. 마음껏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라. 다만 그의 승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해야 한다.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이 시장에서 부풀려지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와 나눠가져야 한다. pp.209-210
솔직히 마지막 챕터인 ‘결론 : 능력, 그리고 공동선’에 실린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300페이지가 넘게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를 통해 공정에 대한 화두를 던진 후에 만나는 결론이었기에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답인건가, 생각하니, 과연 현실에서 공정이라는 담론은 이론에 그쳐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시 글을 읽고, 곱씹을수록 결국 사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민주주의와 겸손’이라 적힌 소제목을 바라보며 상황을 악화시키고 왜곡시키는 것만큼 그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고민해야하는 것도 다름아닌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마음도 들지 않겠는가. p.229
*덧붙이는 글 글에는 적지 못했지만, 이 책에서는 공정에 대한 미국 사회의 시선을 정치인들의 행보에 빗대어 설명하는 대목이 많아 미국 정치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당시의 상황과 그 기저에 눌려있던 대중의 요구를 살펴볼 수 있어서 며칠전 새롭게 시작한 바이든 정부의 행보에 관심이 간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핸된 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무노하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 괴로운 진실은 트럼프가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주류 정당들은 그런 불평불만들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p.42
사회 위계질서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자로 밀려나는 일’,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나 소수민족보다 자신들이야말로 차별의 희생자라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공적 담론의 요구가 그들을 압박한다고 느낀다. p.43
* 나에게 적용하기 하나. 나의 삶이 많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잊지 말고, 겸손하고 친절하기(적용기한 : 지속) 두울. 사회이슈에 지속적으로 관심갖고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적용기한 : 지속)
* 기억에 남는 문장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51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다. 그 중 두 개는 능력 우선 채용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효율성과 공정성을 원칙화한 것이다..(중략)..오직 각자의 능력대로만 보상하는 시스템은 공정성을 갖는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p.66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p.67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p.78
그러나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이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이든 나라든 정의로움은 정의로움이고, 부와 권력은 부와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강대국이 꼭 정의롭지는 않으며,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나라들이 꼭 강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88
야스차 뭉크의 지적처럼,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자,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p.116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p.199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 하이에크 p.207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중략)..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p.282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p.285
생산성은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경영자와 주주이 몫은 점점 더 많아졌따. 19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어났다. p.307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p.309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p.326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p.343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라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p.349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p.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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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덜의『공정하다는 착각』을 덮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분노도 감탄도 아닌, 불편한 정직함이었습니다.
이 책은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해 온 말들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그 말들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 왔는지를 하나씩 보여줍니다. 질문은 사회를 향해 던져지는 듯 보이다가도, 결국 독자인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도덕적 면죄부처럼 사용해 왔는지를, 그리고 그 언어가 불편한 책임과 질문을 얼마나 오랫동안 미뤄왔는지를 말입니다.
노력과 성취를 강조하는 말들이 사실은 불평등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위로의 언어였다는 사실 앞에서 이 책은 독자가 쉽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공정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고, 질문을 멈춘 자리에서 마음이 아주 평온하고 아늑한 상태로 누려왔다는 사실을 샌델은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불편함은 외부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결과는 공정하다.”
이 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희망의 언어처럼 보입니다. 샌델은 이 문장들 속에 숨어 있는 도덕적 잔인함을 가만히 끄집어냅니다.
만약 성공이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라면,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의 증거가 되고 맙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라, 성과와 결과로 평가되는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그렇게 능력주의는 어느새 성공한 자에게는 오만을 허락하고, 실패한 자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굴욕을 안기는 윤리가 됩니다.
문제는 이 윤리가 사회의 구조나 제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인 시선과 언어, 판단의 습관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말, 스스로를 설명하는 기준,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잣대가 어느새 공정함과 자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나는 공정함을 말하며, 누군가의 삶을 너무 쉽게 재단해 온 것은 아니었는가.
열심히 했느냐, 능력이 있느냐,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전제가 따라붙습니다. 지금의 너는 네 몫이다라는 냉정한 판단입니다. 샌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가 단순한 사회 제도가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도덕적 태도임을 분명히 합니다.
태어난 가정, 부모의 학력, 성장 환경, 시대적 조건까지 이 모든 요소를 제거한 채 너의 성취는 너의 공로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게 됩니다. 그렇게 사회는 연대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 계산서를 들고 서 있는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변해 갑니다.
샌델의 문제 제기는 제도 개혁을 넘어 겸손의 윤리를 요청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인정, 그리고 그렇기에 뒤처진 이들을 향한 연대와 책임이 필요하다는 자각. 이것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가깝습니다. 공정함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서로가 빚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일 말입니다.
마이클 샌델의『공정하다는 착각』은 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판단을 늦추는 용기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저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책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의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불편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에게 꼭 필요한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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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계급 장벽이 극복되고 누구나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진정 공평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환영할 일이지만 과연 순전히 기뻐할 만한 상황일까.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수밖에 없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처음엔 모두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도전자들은 자신이 가진 조건에 따라 달리기에 도움이 되는 장비들을 장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태어나보니 부자인 경우 21단 기어의 자전거를 사용할 수 있다. 재능을 타고 났으면 자전거는 다시 오토바이로 업그레이드 된다. 행운이라는 바람이 불면 가속도가 붙어 남들보다 더 빠르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다. 이런식으로 출발조건은 달라진다. 재능도 운도 갖지 못한데다 가난하기까지 하다면 낡은 운동화 한 켤레 신고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맨발로 달리는 사람간의 경주다.
자수성가한 사람도 자신이 가진 좋은 조건들을 종종 까먹는다.
패자는 실패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자신을 학대하고 책망한다.
능력주의의 불공정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하면 이런 슬픈일이 벌어진다.
한 의과대학에는 이런 유머가 있다고 한다.
능력주의는 개발도상국처럼 먹고 살기 빠듯하고 기본적인 사회를 구축하려는 국가에 적합한 것 같다. 국가가 안정되고,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능력주의는 한계에 이르고 변화가 필요한 제도로 보인다.
능력주의란 모두 같은 조건에서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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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가 진행 된 것이 대략 40년 가량이라고 하고 그 기간 동안 어떤 변화를 가져 왔을까? 쉽게 얘기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를 지나 부유한 집에서 만 SAT도 더 잘나오고 아이비리그 진학률도 더 높고 성공적이고 보수도 높은 직장을 향유하게 되었다. 허울 좋은 능력주의라는 프레임에 갖혀서 노력하면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팽배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능력이라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력주의가 더욱 심화되어서 명문대에 진학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받은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오만해지고 고졸 혹은 듣보잡 대학인 경우에는 스스로도 나는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이클 샌델은 그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부터 시작한다. 능력이란 것이 정말 개인의 노력만으로 된 것인가? 사회적 시스템, 혹은 자신의 부유한 부모의 능력은 아닐까? 개인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은 자신의 능력인가? 재능은 신이 부여해주신 복불복 행운 같은 것인데 말이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가 공정한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신선하다. 그래서 조금은 어렵게 다가오는 표퓰리즘과 테크노크라시, 미국의 정치적인 문제들과 발언들을 인내하며 읽고 있었는데 중반부에서는 정말 인내심의 한계가 좀 왔다. 아 이제 대략 뭔 말씀인지 알겠는데 정말 똑같은 얘기를 좀 길게 늘여서 설명하는 경향이 심하시다. 이제 좀 지루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그래서 지금의 이 문제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이 있을까?
아~~~도덕적인 겸손함을 함양해야 함이 결론이었단 말인가? 물론 굉장히 뜬 구름 잡는 지향책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런데 이걸 우리(상위 10%? 5%?를 제외한)만 생각하면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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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과연 ‘능력주의’는 공정한 것인가? (번역된 책 제목은 “공정하다는 착각”이지만, 이것은 마이클 샌델의 의도를 잘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결론이다. 마이클 샌델은 결론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능력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그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독자들보고 답을 해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능력주의라는 폭정”이라는 원제가 그 질문에 합당한 책 제목이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능력에 따른 보상을 당연하다고, 공정하다고 여긴다. 대학입학에서 부정한 방법을 쓴 이들을 지탄하는데, 그 이유를 그게 공정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의 질문은 그게 공정하냐, 공정하지 않냐가 아니다. 그는 대학입학 과정에서 부정하지 않은 방법을 쓰면 옳은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온전히 학교 수업만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경우와 온갖 스펙을 쌓으며, 학원의 막대한 도움을 받으며, 입시 컨설팅을 통해 대입을 준비하는 경우를 비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과 아무런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고 좋은 직업을 얻은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다. 누구도 법을 어기지는 않고, 또 그 사람의 능력대로 대학을 가고 직업을 갖게 되었으니 이를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온갖 합법적인 수단을 쓸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집안의 학생이 하버드대(우리라면 서울대? 의대?)에 갔다면 그는 그가 이룬 성과에 대해서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므로 공정하며 합당하다고 여길 것이고,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이들을 비웃고(겉으로는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은 좌절하는 사회가 과연 공정한 사회인가? 아예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이 그렇게 태어나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운에 의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회가 오히려 좌절을 덜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샌델은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다.
마이클 샌델의 질문은 사실 더 나아간다. 동일한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학업에서의 지능이라든가, 스포츠에서 운동능력이라든가 하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 지금과 같이 차이가 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와 공동체에서 옳은 것인가?
어렵고도 불편한 질문이다. 만연하고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대전제에 대한 질문이어서이기도 하고, 아직 그런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단계에까지도 가지 못한 사회인데 그 너머까지 봐야 한다는 부담감, 좌절감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공정’을 얘기했을 때도 불안했다. 좋은 말이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또 믿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지, 너무 이상적인 것은 아닌지, 그것이 또 다른 족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궁금했다. 그냥 선언만이면 괜찮을 텐데,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잇는 것인지...
마이클 샌델이 질문을 던진다고 했지만, 능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짜로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는 대학 입학에 관한 것인데,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현재 입학 정원이 3천 명 정도인 서울대에서 수학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 명쯤 된다고 하면(실제로 그럴 것이다. 그보다 많을 수도), 그들을 놓고 그냥 추첨을 하자는 것이다. 시험 점수 1, 2점 차이로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누어 우월감과 좌절을 주는 대신 운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냐는 것이다. 점수 몇 점은 그날의 컨디션과 시험 문제에 대한 운으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 어차피 운일 수 있었던 것을 능력으로 환원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운으로 생각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더라도 대학 교육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세금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한 공동체의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토론을 바탕으로, 급여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없애고, 금융거래세(금융 거래 자체가 경제에 어떤 생산적인 가치를 더하는 것은 아니다)에 중과세하자는 제안을 한다.
두 가지 모두 논란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도 그냥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다만 이게 정말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는 토론이 이뤄진다는 얘기이며, 그 토론 속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토의도 이뤄질 수 있으며, 과연 어떤 사회가 공동체를 위해 옳은 사회인지에 대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반성도 하고, 반발도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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