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10.0
  • 50대 10.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세잔처럼 한트케처럼
"세잔처럼 한트케처럼" 내용보기
세잔에게 관심을 적극적으로 갖게 된 것은 최근 일이 년간의 일이다. 사과와 오렌지가 공기의 힘을 받아 야트막하게 부유하며 들릴락 말락 하는 리듬을 울려내는 것 같은 그림들이 어느 날, 특별하게 진지하게 다가왔다. 생트빅투아르 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보아도 산이고 저기서 보아도 여전히 산일 텐데 숱하게 그려 놓은 이 산은 그림마다 저마다의 '정기'와 '활기'를 내뿜고
"세잔처럼 한트케처럼" 내용보기

 

세잔에게 관심을 적극적으로 갖게 된 것은 최근 일이 년간의 일이다. 사과와 오렌지가 공기의 힘을 받아 야트막하게 부유하며 들릴락 말락 하는 리듬을 울려내는 것 같은 그림들이 어느 날, 특별하게 진지하게 다가왔다. 생트빅투아르 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보아도 산이고 저기서 보아도 여전히 산일 텐데 숱하게 그려 놓은 이 산은 그림마다 저마다의 '정기'와 '활기'를 내뿜고 있음을 발견했다. 입체파나 추상표현주의에 지대한 여향을 미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는 호칭에 대해 '왜'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특히,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중, 이 책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을 발견했다( 독일어 원제는 『 Die Lehre der Saint-Victoire 』, 굳이 '세잔의 산'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이름과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력만 알고 있는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였다. 아직 잘 모르는 화가 세잔을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작품을 읽어본 적 없는 작가 한트케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만난다는 것, 어떻게 보면 내가 바라는 '배움'을 달성하지 못할 위험한 방식이기도 하다. 일단 예술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 예술론적으로 접근하고 싶으니 말이다. 한편, 망설이기에는 너무 매력적이기도 하다. 짙은 초록색의 양장 커버에 도드라지는 생트빅투아르산의 아름다운 색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뛰어난 작가가 위대한 화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면 여기에는 분명 특별하고 예술적이며 문학적인 변주가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가 앞섰다.

 

 

이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한트케의 이야기가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알고 싶은 세잔, 내가 여태 가보지 못한 액상 프로방스, 이곳에 있는 세잔의 아틀리에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게다가 예술책이나 여행책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사진이라고는 단 한 장도 없다(책의 앞 커버와 뒤 커버 안쪽에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이 한 장씩 있기는 하지만). 세잔의 작품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영감에 관해서도, 내가 작가로서의 한트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읽기가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이 갖는 힘 또는 의미를 또렷이 목격했다고 말하겠다. 왜 나는 세잔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좋아해오고 궁금해해온 그림이나 화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나의 실제적 삶에서 어떤 효용을 가질 수 있을까? 유구한 미술사를 읽고 또 읽으려는 시도는 단순히 취향이나 흥미 수준에 머무를 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내용에 의미를 나타내야 하지 않을까?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후 세잔의 장소를 찾으면서 개인으로서의 자신과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사색하고 모색하는 한트케처럼, 세잔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변해야 한다. 따라서, 예리하고 섬세하면서 간결하게 툭툭 파헤쳐내는 한트케의 문장들은 내가 세잔의 세계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주었다.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의 앞 커버 뒷장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의 뒤 커버 바로 앞 페이지

 

 

 

한트케가 세잔을 '인류의 스승'이라 추앙하는 이유를 여러모로 생각해본다. 세잔은 지상의 사물을 '현실화'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한트케의 '사물 안으로 꿈꾸기'를 시도하는 작품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둘 다 어려운 말이지만 한트케가 세잔의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하면 무슨 말인지 조금 감이 잡히기도 한다. 한트케는 파리 주드폼 미술관에서 열렸던 세잔의 전시회에서 '정신의 단초'를 찾았다고 한다. '목적'이 생겼는데 작가답게 이는 글쓰기에의 영감이나 결단을 말한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잔의 <팔짱을 낀 남자>가 바로 이 단초의 핵심!(마침 내가 갖고 있는 세잔에 관한 예술책에 이 그림이 있다!) "그림이 떨기 시작한다"라고 쓸 정도로 전율을 느꼈던 이 그림 속 남자를 한트케는 소설을 써서 살려냈다. 또한, <큰 소나무>라는 그림에서도 특별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사방으로 비틀리며 자라난 가지와 의상처럼 펼쳐진, 수없이 다양한 농담 濃淡의 초록 바늘잎새들은 주변을 둘러싼 텅 빈 공간을 저절로 진동하게 만든다',라고 썼다. '샤토 누아르 위쪽 동굴 부근의 바위들'에 대해 '가까움'을 느낀다 했는데, 소나무와 바위가 '서로 얽혀 있는 문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는 아마 한트케가 생트빅투아르산을 직접 오르내리기 위해 액상 프로방스를 찾았을 때 실제로 볼 수 있었기에 그림에서 받은 감동을 더욱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세잔이 전쟁을 피해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레스타크에 대해선 세잔의 그림으로 본 게 전부이지만, '그 이름 자체로 내게는 평화의 장소를 상징한다. 그 지역은, 현재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이, 여전히 '은신의 장소'로 남아 있다,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팔짱을 낀 남자> 출처: 마로니에북스 『폴 세잔』

 

<큰 소나무> 출처: 마로니에북스 『폴 세잔』

 

 샤토 누아르 전경 <View of Chateau Noir> 출처: TASCHEM 『CEZANNE』

 

 레스타크 마을을 그린 < The sea at L'Estaque>.출처: TASCHEM 『CEZANNE』

 

 

한트케는 이 전시회에서 세잔을 발견하고선 알래스카와 미국을 거쳐 세잔의 아틀리에와 생트빅투아르산이 있는 액상 프로방스로 '느리게' 찾아온다. 파리에서 세잔의 그림으로 작가적 목적을 얻어냈다면서 왜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다 보니 짐작이 간다. 이렇게 돌고 돌아 세미하게 정확하게 집요하게 '사색'하는 것이 한트케의 방식이다. 같은 산을 날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조금씩 다른 붓질을 이어나갔던 세잔의 방식과도 통한다.

 

 

내가 한트케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았다면 이 책을 좀 더 잘 읽을 수 있었을까?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라면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로도 몇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써낼 수 있을 사람이다(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커다란 숲>에서는 숲의 공기를, 숲의 광채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평범한 사과, 흙길, 바위, 나무, 산에서 세잔이 무수한 색채와 형태를 길어올렸듯이 한트케는 산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그를 처음 대하는 형편이지만 이미 한트케의 이모저모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될 만큼 그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든다.

 

 

 

세잔의 말대로 '보여진 것의 사색 속에서' 한트케는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모색하고 있다. 직접 생트빅투아르산을 걸으며 "세상의 중심이란, 델피와 같은 곳보다는 위대한 예술가가 작업했던 저 장소가 아닐까?"라고 감탄하는가 하면, "세잔의 산에서 뭔가 전달할 내용을 얻은 건 분명했다"라고 확신한다. '부드럽게 각인시키며 위안을 주는 이야기의 연속'을 이상적인 글쓰기로 생각한다는 한트케는 세잔의 산을 걸으며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문구를 빌어)"연결에 대한 욕구로 내 몸이 떨렸다"라고 단언, 인생의 매 순간을 다른 모든 순간과 직접 연결할 방법을 궁리한다.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일도 알고 있다. 바로 '자유로운 상상뿐'. 생트빅투아르를 오르내리며 파리의 여러 숲을 연상한다든지 계부, 어머니, 생부로 이어지는 개인사를 소환한다든지, 자신의 조국 독일의 여러 장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혐오감과 화해의 심정을 읊조린다든지 한트케의 '상상'은 드넓은 반경으로 뻗어간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순간순간 세잔은 사라지고 작가 한트케가 만들어내는 픽션의 세계에 놓이게 된다. 미술 에세이도 아니고 회화론도 아니며 세잔의 전기도 전혀 아닌, 세잔의 그림 속 인물과 풍경이 주인공과 배경이 되고 세잔의 회화 방식과 흡사한 글쓰기의 미학이 연마되는 세상 속에 덩그러니 서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한트케 자신이 한눈에 매료된 세잔의 그림 속 모티프를 찾아 미국까지 갔다가 액상 프로방스로 돌아오는 '큰 아치'의 여정을 따르며 세잔의 위대성을 확증함과 동시에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트케는 생트빅투아르산을 내려오며 '쓸 권리"를 갖게 될 것이라 예감했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마음껏 글을 쓰는 것일 텐데, 왜 '권리'라 하는 걸까? (작가에게는 '쓸 자유'가 맞지 않나?) 그의 문장을 읽다 보니 이해가 된다. 나의 일상에서도 제일 쉬운 일이 '독서'같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우선, 날씨가 적절히 바림직해야 하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이 차단되어야 하고, 집도 쾌적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나를 찾는 이가 없어야 한다. 이에 앞서 나의 내부 세계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렇게 따져보면 책 읽기조차 마음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글쓰기야 오죽하겠는가. 한트케가 필요로 하는 글쓰기의 조건은 '평온과 기쁨', '확신' 그리고 '불특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평온과 기쁨의 상태에서, 쓴다는 내 선량한 권리에 새로이 흠뻑 취한 채, 활자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나는 하필이면 쓴다는 권리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불특정한 사랑의 순간에 왔다. 그것이 없으면 당연히 글쓰기도 없게 되는, 그런 순간. --- 068쪽

 

 

 

이쯤 되면 세잔의 산은 한트케에게 새로운 작품을 허락하는 신의 계시와도 같다. 한트케적이면서 또 다른 한트케를 탄생하게 하는 절대적 영감의 원천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미 이 책 안에 한트케의 소설 아닌 소설이 등장한다.  <팽이의 언덕>에 등장하는 D라는 여인은 한트케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실제' 인물이지만 그녀의 이력이나 성격, 언행을 보면 어느 소설에 등장해도 상당한 주목을 받을만한 독특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외투 중 외투'는 세잔이 열중했었을 '그림 중 그림' 또는 한트케가 모색하고 있는 '작품 중 작품'과 연결된다. 잊지 못할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내 것으로 흉내 내듯 나 역시 옷 중의 옷, 책 중의 책, 음악 중 음악, 커피 중 커피, 여행 중 여행 .... 을 무수히 나열하며 과거-현재-미래를 오간다.... '시간 중 시간'을 찾아본다. 반면, <늑대의 점프>는 어느 공포물의 한 부분과 같다. 나도 너무 무서워하는 '개'이야기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내려오다가 '실제로' 맞닥뜨렸던 상황인데 긴박감이 넘치는 문장에 그 공포와 증오를 경험하게 된다. '소리 중에서 가장 악랄한 소리, 죽음인 동시에 전쟁의 비명', '본다는 것은 저주받은 그 무엇이 내부에서 들끓는 동물 자신의 고통이기도 했다', '악을 향한 그러한 무의식적 의지', '서로에게 오직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개는 내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나 역시 가능하다면 엄령으로 개를 죽여 없애고 싶었다','산의 아름다움은 무효가 되었다, 오직 악만이 현실이었다' .... 사납게 생겨 적의에 찬 것처럼 보이는 개 한 마리에게서 이토록 무겁고 암울한 글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나뭇잎 하나, 흙길의 한 모퉁이, 햇빛 속에 하얗게 흔들리는 나무 한 그루, 예사로이 나 있는 샛길 등 산의 모든 부분에 무한의 너비와 깊이를 더해주는 한트케의 아름다운 언어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불편함을 흩트리고 있다.

 

 

처음에는 이 얇고 단아하게 생긴 책을 '편안하게' 맞아들였다. 글을 잘 쓰는 작가를 따라 그림을 잘 그렸던 세잔의 발자취를 밟으며 나도 아름다운 여행을 계획할 수 있으리라. 전 세계를 덮친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취소당한, 올 5월 어느 날 나의 액상 프로방스 여행을 상상하며 한트케의 글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으리라. 전문 예술가가 아닌 지적인 시각을 갖춘 사람을 통해 세잔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내가 한트케를 몰랐기 때문에 이런 '보통스러운' 예상만 할 수 있었던 게다. 세잔을 뚫고 지나가며 더욱 창대해지는 한 작가의 번뜩이는 탐구정신을 엿보았다. 세잔의 색채와 형태를 필사적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글에도 영원을 담을 수 있으리라 꿈꾸는 작가의 열망을 목격했다. 푸른 아름다움 속에 소멸하면서도 증식하고 끝없이 변하며 살아 움직이는 산과 숲, 한트케의 작품도 이럴지도 모르겠다. 최종적으로 한트케가 희망한 것은 '세잔처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인간의 내면에 '현실화'시킴으로써 그림을 보는 이에게 신선한 시각을 선사하고 미술에 대한 신뢰를 굳히게 하는 세잔의 그림처럼, 작가 한트케도 좋은 글, 읽을 가치가 다분한 글을 희망함에 틀림없다.

 

 

 

나는 '발명'하지 말고, 가르침에 따라서, '현실화'(개별 경우에는 결국 발명도 그 안에 포함되는) 해야만 했다. 또한 내 개인적인 확신은, 이야기 내면의 빛으로서 괴테의 '선한 자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독자를 밝히고 고양시키며 책을 읽는 동안 우선적으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못한 글은 읽을 가치가 없다---097쪽

 

 

ps: 세잔을 알아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페터 한트케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분명 행운이었다. 나에게 통째로 굴러온 이 행운을 놓아주지 않아야 하므로, 한트케의 책을 재빨리 읽어보려 한다. 우선, 집에 소장하고 있던 『소망 없는 불행』으로 출발한다. 세잔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던 한트케의 사색과 치밀한 시각, 세미하면서 큰 파장을 울려내는 문장들이 좋았기에 그의 본격적인 세계에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잔을 통해 한트케를 만나고 한트케를 통해 세잔으로 이어진다. 이 막강한 '연결'이라니!

YES마니아 : 플래티넘 s********e 2020.11.28. 신고 공감 7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세잔의 산
"세잔의 산" 내용보기
미술사 수업을 듣다가 수업해주신 교수님께서 추천하신 책이라서 읽었습니다. 술술 읽힐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페터 한트케의 다른 책들도 구입했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세잔의 산" 내용보기
미술사 수업을 듣다가 수업해주신 교수님께서 추천하신 책이라서 읽었습니다. 술술 읽힐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페터 한트케의 다른 책들도 구입했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l****9 2024.05.1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가끔씩 곱씹어보면 좋을 책
"가끔씩 곱씹어보면 좋을 책" 내용보기
페터 한트케가 줄줄이 쓴 자신의 산 정복기? 정도 되는 듯 합니다. 세잔을 기대했다면 대략 세잔의 이미지를 빌려오는 정도라고 보면 좋습니다^^;; 세잔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을 듯 합니다,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지 평론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소설가가 번역을 해서인지 문장이 부드럽게 잘 읽힙니다, 페터 한트케의 문장이 뛰어났던 것인지 배수아의 번역이 뛰
"가끔씩 곱씹어보면 좋을 책" 내용보기

페터 한트케가 줄줄이 쓴 자신의 산 정복기? 정도 되는 듯 합니다. 세잔을 기대했다면 대략 세잔의 이미지를 빌려오는 정도라고 보면 좋습니다^^;; 세잔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을 듯 합니다,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지 평론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소설가가 번역을 해서인지 문장이 부드럽게 잘 읽힙니다, 페터 한트케의 문장이 뛰어났던 것인지 배수아의 번역이 뛰어난 것인지 원문을 읽어보지 못해서 모르겠네요^^;; 짧은 책이라서 가끔씩 곱씹어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k*******5 2021.07.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