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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나 닦으시지요 박용범 독서작가(2022)
겪고 보니 운동을 한결같이 했기에 그나마 큰 탈 없이 넘겼지 싶다. 환갑 되던 해 도망 나오듯 새벽녘에 대중을 떠나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동안에 전혀 문밖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치열한 구도 생활이었다. 보다 못한 근처 스님께서 입구부터 무성한 풀을 예초기를 싣고 와서 제초작업을 손수 해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 또한 계절 지나가면 사그라들게 될 것이다. 그것이 1년 반인데 스님을 모시면서도 1년을 또 그와 같이 지냈다. 꼭 30개월을 방에만 들어앉아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등산 배낭을 메고 날마다 하루는 두부 사고 다음 날은 콩나물 사는 구실로 고갯길을 넘어 다녔다. 출가수행 과정에 오로지 부처님의 출가 의지와 수행 과정, 그리고 깨달음 이후의 모습을 주시하며,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공간이라 인식한다. 즉 공간은 물질이 없다는 의미이다. 물질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라진 곳인 공간도 본디 없어야 맞다. 무에서 시작하여 결국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섭리이다. 삼라만상을 좇아 분별심을 내는 마음은 잠시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므로 욕계에서는 선이 불가하다. 욕계에서 수행을 하려 해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언어의 파편인 망상은 삼매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욕심이 사라져 머릿속에 더 이상 망상이 오고 가지 않을 때 비로소 첫 선정을 경험하는데, 즉 색계 초선(初禪)이다. 욕구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언어 문자가 색계 초선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므로, 초선에 바르게 들어가면 언어가 적멸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고(苦)의 근본이 뿌리에 있음을 자각하고, 잎을 따고 가지를 솎아내던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심신이 안락해진 경지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불전에 향 꽂고 무병장수와 가내 평안을 기원하던 식의 수행은, 색계 초선에서조차 도저히 용납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P135 산속 스님이 저잣거리에 계시는 스님에게 '도회에서 배회하지 말고, 산새와 물소리를 벗하며 마음이나 닦는 것이 어떠냐'라고 안부 삼아 서신을 보냈다. 답장에 '도를 모르고 산에 살면 단지 산만 볼 뿐이요, 도를 알았다면 산속이 아니더라도 산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참말로 산속이라도 그렇다. 설거지감 들고 내려가는 개울가 오솔길의 풀잎도 신경 쓰기 시작하면 온 산천의 초목을 정원수처럼 가꾸어도 성에 찰지 말지다.
달리 모신 불상도 없지만, 거처하는 방에 달력 말고는 족자 한 폭 걸어본 적 없고, 몸에 흔한 염주조차 지니지 않았다. 소소한 장식과 기호품에 정신 팔면 순식간에 방안이 온통 잡동사니 천지가 된다. 재가 불자들도 좌복을 둔 방은 창호지 벽지에 향꽂이 하나 바닥에 두고 지낸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수행에 무슨 난삽한 이론이 필요하겠는가! 오직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의 선택이 생식이었을 따름이다. 세속의 모든 꿈을 접고 이 길에 들어서서, 오랜 세월 토굴과 선방을 화두 하나에 의지하여 전전했다. 수행 말고 다른 것들은 모두 남의 일처럼 여겼다. 불교신문은커녕 불교TV와 방송도 거의 본 바 없으니 절집 소식도 불통이요, 애초에 관심 두지 않고 살았다. 그러므로 외전(外典)에 관심을 둘 여력도 거의 없었다.
《원효스님! 왜 그러셨어요!(정경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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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스님! 왜 그러셨어요!(정경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고 필사하면서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천당 극락 가겠다고? 그다음 생은 어떻게 할 건데! 왜 굳이 천당 극락에 가려고 하는데. 네 삶의 가치와 본질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기나 하니? 너는 너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있기는 한 거니.
하루 한 끼 생식을 하면서 삶의 본연의 모습에 대한 참구를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의 본능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돈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희망의 빛을 보고자 노력하는 자가 희망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이다. 사망한 이후에 모든 것이 그것을 말해주게 될 것이다. 사후 30년을 반짝거릴 수도 있고, 사후 2000년 후에 반짝거릴 수도 있다. 인생에 대한 판단은 역사에 맡기면 되는 것이고 지금은 역사에 남을 역사를 만들기 위한 정진 수행 공부에 몰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최선의 길은 스스로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했을 때 이루어진다.
두메의 산자락 비닐하우스에서 토굴 삼아 지내다가 부산 근교로 온 후 쉬이 인터넷을 접할 수 있어서, 얻는 정보가 무궁하니 이 글을 적어나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책은 정보를 얻고 사상을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책을 소유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던 과거의 현실은 너무 어리석은 날들이었다.
20여 년 전 인터넷이 처음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종이책이 당연히 대세였다. 그 시절에 책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구입하고 한 권 한 권 쌓아놓는 것에 만족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과거의 부끄러운 이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이후에 전자책이 나오고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정보를 얻기 위해서 꼭 종이책이 있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식의 폭을 넓혀나가기 위한 독서법으로 초서독서법에 매진하고 있다. 필사를 통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면서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나드는 공부를 한다.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해 나간다. 지식을 컨트롤하는 중추적인 역할은 대뇌가 할 것이다. 종이책은 단지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식인의 자세이다. 책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생각한 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변해가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나거나 홀로 생겨나는 법이 없이 시절과 인연에 따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연기설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통해 얻은 내용이요,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였다. 색이라는 공, 공이라는 색의 의미는 그렇게 만물은 생성소멸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인듯해도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다. 그러면서도 오늘이 이어져 내일이 오게 되고 내일은 또다시 오늘이 아닌 듯 하루를 엮어가게 된다.
구산 큰스님의 '목숨은 호흡 지간이다'라는 법문을 새겨들은 이후, 촌각일지라도 노후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노후 대비다. 그런 이를 보면 어떻게 그때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지도 이해불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싣달타는 출가하자마자 세 분의 스승을 차례로 탐방하며 한결같이 생로병사의 뿌리를 끊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에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이름난 스승이었던 그들이었으나, 그 가르침에 절만하여 홀연히 6년 고행의 길을 택하였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돈으로부터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돈 공부'의 고행을 택해서 자본으로 자본을 창출해내는 방법을 익히면 된다. 돈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알아야 한다. 더 이상은 돈에 휘둘리지 않고 돈을 지배하면서 살아가고자 '돈 공부'에 매진해야겠다.
거듭 강조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라면 결코 삼법인과 사성제조차도 섣불리 아는 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스러운 무지가 수행자에게는 엄청난 자량임을 알고 정진해야 옳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공부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의 바른 자세요, 공부는 지레 포기하고 부질없는 일에 치열하면서 불법을 논한다면 과연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 지녀야 할 화두이다. 화두는 평생 지니고 씨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빨리 타파해서 대해탈인이 되기 위함이다. 환갑이 되던 해 도망 나오듯 새벽녘에 대중을 떠나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동안에 전혀 문밖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근처 스님께서 입구부터 무성한 풀을 예초기를 싣고 와서 제초작업을 손수 해주셨다.
풀은 가을이 되면 사그라져 시들어간다. 그 세력을 잃게 된다. 나이 환갑이 되도록 삶의 본질적 이치조차 깨우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사리판단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몰입하면서 살아가는 진중한 자세로 삶에 접근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기 이전에 지금 가고 있는 곳에서 헛돌지 않기 위한 노를 젓는 행위가 이어져 가는 하루가 지속되어 간다. 그것이 삶의 흐름에 이어져 내리는 인생을 환하게 빛의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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