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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의 마지막 책이라고 한다. “한국의 독자들과 ‘살아있는 영혼의 죽음과 깨어남’을 주제로 쓴 나의 마지막 저서를 함께 나눌 수 있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원제는 Auferstand in das ewige Leben: Uber das Sterben und Erwachen einer lebendigen Seele이다.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 살아있는 영혼의 죽음과 깨어남에 관하여>이다. 따라서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인 <나는 영생을 믿는다>는 약간 불순하고 상업적 냄새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적인 한국교계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계적 대신학자이자 진보적인 학자가 생애 말년에 드디어 영생을 믿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듯해서이다. 이 책은 역자 이신건 교수는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내시고, 그리고 머잖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는 가운데 ‘죽음과 영생과 부활’에 관해 깊이 묵상하고 책을 읽는 가운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11쪽)라고 옮긴이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기에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러한 한국어 제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마치 몰트만이 그 이전까지는 영생을 믿지 않았다가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야 믿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몰트만 자신이 서술한 다음의 문장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1995년에 내가 “죽음 속의 부활”을 거부했던 까닭은 그것이 내게는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를 주장하는 까닭은 내가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현재로부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미래로부터 개시된 현재를 바라본다(87쪽). 그러나 이 문장을 통해 그 동안 몰트만이 영생을 믿지 않았다, 불신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밝히고 있듯이 “죽음 속의 부활”을 거부한 이유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는 환원주의 때문이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자. 몰트만은 “두 가지 물음”으로 본론을 시작한다. ‘죽음 후에도 생명은 존재하는가?’, ‘영원한 생명: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질문하는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경험한다”(18쪽). 실제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죽음 경험”이다(19쪽). 몰트만은 죽음 경험을 ‘사랑’에서 찾고 있듯, ‘부활’ 또는 ‘영생’을 극복하는 길도 ‘사랑’에서 찾고 있다. 생명을 그 원천으로부터 살아 있게 만들고 생명에 대한 기쁨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고 체험한 생명에 대한 기쁨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의 충만”에 대해 질문하게 되며, 이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른다.”(22쪽) 따라서 영생은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현재의 영속성이 될 수 없다. 무한한 양적 시간이 아니라 순간적이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질적 시간을 뜻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를 부정하지 않는다. 미래,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의 생명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만물이 회복되는, 창조세계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새창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미래를 부정하는 신앙은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현재의 영속성의 동의어이며, 부활의 소망을 믿지 않는 기독교는 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다. 초기 제자들은 예수의 빈무덤을 통해 그의 부활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믿었던 것이며, 그 만남이 새로운 삶의 시작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출현이 그들의 부활 신앙을 촉발했다(60쪽). 부활 신앙은 현실도피적인 영지주의적 신앙과 현실에 대한 집착으로 점철된 번영신학의 덫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부활은 이 땅에서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자가 소유한 신앙이다. 이 땅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의할지라도, 이를 외면하고 저 세상(피안)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나라가 이곳에 임할 것을 고대하며,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활신앙’은 현세적인 삶에 대한 긍정(아모르 파티)이며, 불의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신뢰할수록 우리는 이 땅의 생명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생명을,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98쪽).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결국 우리 몸, 우리의 현세적 삶에 대해 긍정(yes)이다. 이를 부정하면 데카르트적 사유, 즉 몸과 영혼의 분리, 개인과 세계의 분리를 촉발시킬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사유는 유물론으로 귀결된다. 유물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이고 필연적이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고통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우리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분열되고 모호한 삶 속에서 ... 전체성을 경험”하도록 해준다(110쪽). 따라서 야훼 하나님은 부조리하고 불온한 세상을 “이처럼”, 즉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이며, 이러한 사랑이 하나님과의 지속적 사귐, 연결,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한글 제목 <나는 영생을 믿는다>는 현실도피적이거나 현실집착적인 왜곡된 신앙에 도전이 되는 적절한 제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타: 87쪽 중간, “오늘 내가 이를 주장하는 까닭은 내가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마침표(.) 누락 107쪽 중간, “그 가운데서 우리의 기억은 단시 부분적인 것만을 의식한다.” / “단시”가 아니라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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