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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 다시 보기 ― 방현석 『한글전사 정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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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는 과연 “말은 정신이고 글은 생명”이라는 정태진 선생의 가르침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일 자체를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까지 무심코 영어로 바꾸고 몇 개의 자음만을 따서 외계어처럼 사용하는 오늘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된다. 속도와 편
"이즈음,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 다시 보기 ― 방현석 『한글전사 정태진』" 내용보기

이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는 과연 “말은 정신이고 글은 생명”이라는 정태진 선생의 가르침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일 자체를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까지 무심코 영어로 바꾸고 몇 개의 자음만을 따서 외계어처럼 사용하는 오늘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된다. 속도와 편의를 앞세운 언어가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마저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현실에서 『한글전사 정태진』은 묻는다. 우리에게 말과 글은 과연 무엇인가.


『한글전사 정태진』은 한 인물을 영웅으로 박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묵묵히 해낸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모국어를 지키는 일이 어떻게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일제는 1938년부터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사실상 폐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당시 함흥 영생여고 교사였던 정태진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끼리는 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

사건은 한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경찰은 “오늘 국어를 네 번 사용하고 네 번 벌을 받았다”는 문장을 문제 삼았다. 여기에서 ‘국어’는 조선어를 뜻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일본어만을 국어로 강요하던 시대에 조선어를 국어라 부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저항이었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조선말을 사용하도록 가르친 정태진을 체포했고, 그를 혹독하게 취조한 끝에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갔다.


한 여학생의 일기장을 빌미로 시작된 사건은 조선어학회를 말살하려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확대되었다. 관련자 서른세 명이 검거되고 열여섯 명이 기소되었으며, 이윤재와 한징은 혹독한 고문과 옥고 끝에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정태진은 조선어학회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였고, 일제는 그를 발판 삼아 조선의 지식인과 우리말을 동시에 뿌리 뽑으려 했다.


방현석 작가는 정태진의 아들 정해동의 증언과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말을 지키는 데 삶을 바친 한 지식인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복원한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정태진은 대대로 관리와 지식인을 배출한 유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총명했던 그는 미국 칼리지 오브 우스터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 시절 언어학과 음성학을 접하면서 방언 속에 우리말의 고유한 정체성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게 방언은 표준어에서 벗어난 변두리의 말이 아니었다. 한 민족이 살아온 시간과 장소, 삶의 표정이 고스란히 밴 언어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지 몇 달 뒤 광복을 맞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정태진은 우리말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한강 다리가 끊기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신한 급박한 순간에도 그는 서울의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지키며 방언 자료에 몰두했다. 나라가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그가 놓지 않았던 것은 말이었다. 그에게 우리말은 연구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영혼이 깃든 집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말모이〉의 류정환은 정태진을 비롯해 우리말 사전 편찬에 헌신했던 조선어학회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전국의 사투리를 모으고 공청회를 열어 『큰사전』을 편찬하려 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글을 모르던 판수가 한글을 깨치고 사전 편찬에 힘을 보태는 과정은 한 인간의 성장인 동시에, 말과 글을 빼앗긴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가 허구의 인물을 통해 우리말의 소중함을 일깨웠다면, 『한글전사 정태진』은 그 역사의 중심에 실제로 서 있었던 한 사람의 삶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정태진이 감옥에서 지은 시는 그래서 더욱 절절하고 아름답다.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아름다운 꽃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새봄을 자랑하리.


1942년부터 1945년 해방의 순간까지 이어진 조선어학회의 ‘한글 사수’ 투쟁은 총과 칼을 들지 않은 문화항전이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무장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전쟁이었다면,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적 뿌리를 지켜낸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끝내 굴복하지 않고 모국어를 지켜낸 정태진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해방 이후에도 우리말로 생각하고 기록하며 문화를 일굴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현제명, 홍난파, 안익태, 김은호, 김기창, 최남선, 이광수, 서정주를 비롯한 적지 않은 예술가와 지식인은 창씨개명을 하거나 친일 활동에 가담했다. 누구보다 민족의 정신과 언어를 소중히 다루어야 할 이들이 모국어와 민족을 저버렸다는 사실은 뼈아프다. 그렇기에 모진 압박과 고문, 핍박 속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놓지 않았던 정태진의 삶은 더욱 고귀하게 다가온다.


『한글전사 정태진』은 과거의 위인을 기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이 가벼워지고 글이 빠르게 소비되는 오늘, 우리가 어떤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되묻는다. 정태진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만이 아니었다. 그 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존엄,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이었다.

이즈음,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l*******8 2026.09.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