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쟁취하자 연일 여성과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혐오의 멸시를 쏟아내며 오만불손한 본색을 드러낸다. 분노를 절로 불러내는 무례와 악의, 거짓의 언어가 창궐한다. 분노란 실재하는 악 혹은 인지된 악을 벌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위의 인용 문장은 아흔이 넘은 고령의 노투사가 정의와 자유의 방향을 상실케 하는 역사의 잘못된 흐름에 분노할 것을 외치는 목소리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국 사회에서 분노 할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시민들이 서 있을 곳도, 행복도, 존엄도 잃어버리게 되는 세계가 되고 만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훼손하려는 그 어떤 것도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역사적 경험이다. 일반화된 망각증, 인간의 가장 저열한 부분을 자극하는 프로파간다, 적의(敵意)충만한 언어가 어리석은 대중을 장악했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사회에 만연한 몽매함과 이기심처럼 격분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사실 이러한 윤리적 가치의 퇴행적 움직임들을 눈 치켜뜨고 주시하는 것은 극도의 피로감을 안겨준다. ‘역사는 연이은 충격으로 이어진다’는 헤겔의 문장이 진리처럼 다가오는 시대이다. 그런데 눈을 감고 이 분노의 정의에서 잠시라도 멀어지고 싶어진다. 내게 평온함을 주기 위해서.
열렬한 스토아주의자인 세네카의 인생철학 에세이 중 「분노에 대하여」를 편역한 이 작은 책을 들게 된 이유이다. 내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아니 마음에서 떨어내기 위한 소극적 방책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행위에 대한 반응을 자신의 보존, 지극히 사적 평화의 존속이라는 이기심의 유지가 참이라 말하는 이 고대 철학자의 실용주의적 절제의 언어들이 저항감과 한편으론 받아들여야겠다는 의지의 반복된 순환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분노를 잠재우겠다는 기대는 분노의 원천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권하는 회피적 이성의 말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이 비루함의 변명에 대항해 참여할 것인지에서 갈팡질팡, 좌고우면(左顧右眄)한다.
세네카는 분노란 ‘정념과 뒤섞여 오염된 이성’이라며, 이전에는 거부할 수 있던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이에 흔들리기 시작한 정신은 이것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며, “감정, 격분이 아니라 의무감, 지혜와 통찰을 지니고 동료와 가족을 위해 행위 하는 것만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1.12)”이라고 분노를 그칠 것을 요구한다.
귀족중의 귀족, 최고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던 인물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처신의 규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의 방어력이 커지지 않으면, 내 눈 길이 닿은 곳마다 화낼 일이 널려있다(3.28)”는 조언은 분명 개인의 관계에서 적절한 언어이지만 공동체,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오만 방자한 권력의 행사에도 잠자코 있어야 할 것인가? 이 무심함이야말로 비열함이요, 이기심이고, 불의를 외면하는 변명이지 않은가
또한 “분노의 치료법은 분노를 지연하는 것이라며, 진실은 더 많은 공을 들일수록 더 반짝이는 법이니 만큼 바른 판단을 위해 시간을 갖는 것(2.29)”, 그러하면 분노는 잦아지고 잊혀 질 것이라 주장한다. 이 망각만큼 터무니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없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중은 얼마나 빨리 탐욕스러운 무리들이 야기했던 오랜 기간 수많은 폐해들을 잊고 있는가?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면 인신의 구속은 물론 폭력도 마다치 않았던 집단이 바로 그들이지 않았던가? 내 이웃과 가족들, 동료 인간들에 대한 경멸과 모욕, 무례, 악의를 무참히 행사하던 그 권위주의적 세력에게 분노치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세네카는 이에 대해 분노의 제 1원인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믿어서는 안 된다.(2.22)”며 거짓이 진리의 외양을 하고 나타나기에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함에 주목하여, 가해자의 불의를 보지 말고 자기 본성의 오류 가능성을 보라고 주장한다. 이것야말로 노예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정치 철학자는 인간 사회의 평화란 ‘상호 관용의 협약’뿐이라 한다. 약자에게 혐오와 조롱을 반복하며, 시민 대중에게 무례를 행사하는 악의적 권력에게 대체 어떤 상호 관용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서기 1세기 로마 공화정 위에 군림하던 절대 권력인 황제의 권력 앞에서 분노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분노는 강자의 소유물이다. 약자의 분노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약자는 분노해서 얻을 것은 없으며 잃을 것만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 사회에서 개인인 개체, 특히 장애인, 여성 개인은 약자 중의 약자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연대하여 강자의 지위를 획득하려한다. 그래야만 강자로 행세하는 권력에 분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를 해체하여 개인인 약자의 상태로 머물게 하려한다.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나락으로 밀어 넣기 위해서.
물론 화났다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을 향해 화를 낸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참담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무감함과 오만함, 뻔뻔함까지 지닌 것들에게 분노 할 때 수치스러움이 몰려 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것들을 방관하거나 타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곧 공동체의 파괴임을 알기에 우리는 분노를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이 스토아주의자의 말처럼 가끔은 이렇게 ‘무지한 자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고통스럽기조차 하다. 그자들은 배우고 싶지 않으며 상대의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배우지 못했다면 결코 그자들이 배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분노의 감정을 애초부터 갖지 말 것을 권하는 세네카의 말들은 어쩌면 분노의 감정을 갖지 못하는 불감증의 인간, 무관심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스테판 에셀’의 외침처럼 분노할 대상은 몰염치한 특권계층의 교만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뿜어내는 뒤엉킨 문제들의 무수함이다. 자기 평안에만 기탁해 무관심으로 방관하는 안일함은 오늘의 사회에선 죄악이 되고 만다. 분노를 진정시켜 내 마음의 평화를 기대했던 책 읽기는 한 고대 청치인의 에세이를 통해 오히려 행동할 권능에 대한 더욱 확고한 믿음이 되었다.
역사의 발전은 언제나 불의한 권력을 향해 분노한 시민의 대결이었다. 기득권 찾기에 혈안이 된 썩어빠진 권위 지향적 권력에게는 분노한 시민들만이 발견 될 것이다. 분노에는 고귀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는 세네카의 기회주의적 정치 신념에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분노는 약자들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이다! 분노는 약자에겐 다스려야 할 것이 아니라 권장 되어야 할 고귀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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