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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아이>는 20세기 중반에 살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예요. 소녀의 이름은 스텔라 나타노브나 누돌스카야예요. 스텔라를 줄여서 엘랴라고 불렀대요. 엘랴는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요. 엘랴가 네 살 때, 아빠는 집으로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체포되었어요. 어떻게 아빠를 체포해 갔고 어떻게 집안을 수색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엘랴는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나중에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1937년 여름, 엘랴는 엄마와 함께 유배를 떠났어요. 엄마가 들고 있는 서류에는 '아래에 적혀 있는 사람', 즉 엄마와 엘랴를 3일 안에 모스크바에서 키르기즈 공화국의 칼리닌스크 지구 토크마크-카가노비치시로 유배를 보낸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겨우 여섯 살 엘랴에게 벌어진 비극이에요. 하지만 엘랴는 그때의 일을 완전히 새로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네요.
책을 읽고나서 다시 책표지를 봤어요. 붉은 말과 소녀, 그 뒤에 줄이... 앗, 철조망이었네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년)가 떠올랐어요. 유태인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암울한 순간들을 놀이로 만드는 마법을 보여줬어요. 참담한 비극 속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요. 가슴 뭉클했던 그 장면을 이 책속에서도 보게 될 줄이야.
<설탕 아이>의 주인공 엘랴는 엄마와 함께 끔찍한 수용소 생활을 했지만 거의 기억나질 않아요. 그 뒤에 간 곳이 설탕 공장을 위한 사탕무를 재배하는 농장이었는데, 그때 붉은 색 말을 탄 키르기즈인이 엘랴에게 "아크 발라, 칸트 발라 (백인 아이, 설탕 아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키르기즈인들은 엘랴를 칸트 발라, 즉 설탕 아이라고 불렀고, 그들과 함께 도와가며 살았어요. 똑똑했던 엄마는 사람들에게 밤마다 책을 읽어주었어요. 엄마가 러시아어로 읽으면 트랙터 운전사인 크라프첸코가 키르기즈어로 번역했고, 모두가 함께 들으며 (번역에 걸리는 시간 만큼 차이를 두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숨을 죽이기도 하고 깔깔거리고 웃기도 했어요. 깔깔거릴 때는 두 번 웃었어요. 처음에는 키르기즈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함께, 한번 웃음이 지나고 난 다음 크라브첸코가 번역해주면 러시아인들이 키르기즈인들과 함께 웃었어요. 엄마를 닮아 똑똑했던 엘랴는 키르기즈인들의 민족 서사시《마나스》를 모두 암송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키르기즈인들을 위해 마나스를 읊어주었어요. 엄마에게는 늘 일이 있었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엘랴는 이야기해요. 실제 나쁜 사람들이 적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엘랴의 기억에는 나쁜 사람들이 없었다는 거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건 누가봐도 혹독한 환경이잖아... 네, 물론 엘랴가 절망에 빠져 울부짖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곁에는 엄마가 있었어요. 엄마는 놀라운 사람이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침착했고 친절했어요. 엘랴는 엄마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엄마 눈에서 눈물이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엘랴는 아주 나중에 책속에서 "불굴의 의지", "확고한 결심", "강철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엄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또한 엄마는 항상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많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잘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씌우지 말라고 했어요.
"... 아무것도 절대로 믿어서는 안돼. 어떠한 단어도 구호도 크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누구를 비판하거나 칭찬해서도 안돼. 머리로만 생각하고 심장으로만 들어야 해. 마음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심장으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심장은 뛰기만 하잖아."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렇게 말해. 네가 언젠가 쿠프라노프 씨네가 왜 유배되었냐고 물은 적 있지? 그때 내가 혁명 후에 재산이 많았던 모든 부농들이 인민의 적 또는 착취자라고 한다고 설명해 주었잖아. 그리고 수천 명의 부농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너는 그때 내 이야기를 듣고 물어봤어. '부농들은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우리도 도와줬잖아요. 일을 잘하고 정직한데 왜 그들이 적이야?'라고 말이야. 그게 바로 심장으로 듣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귀로 인민의 적들에 대해서 듣지만 네 심장은 믿지 않고 그것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잖아."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듣는 것을 믿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는 심장이 없는 거야?"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귀로 듣는 것만을 믿지. 그 사람들은 뭘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 생각하려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누가 이야기해주는 것을 믿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훨씬 쉽거든. 하지만 너는 점점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있잖아, 안 그래?" (194-195p)
졸업반 10학년이 된 엘랴는 독일어를 러시아어만큼 자유롭게 말할 줄 아는데도 독일어 수행평가 시험에서 3점을 받았어요. 지난해까지 전과목 5점을 받았던 엘랴에게 선생님은 왜 3점을 주신 걸까요. 그리고 얼마전에 있었던 러시아어 작문 시험에서도 3점을 받았어요. 졸업 학년에 두 과목에서 4점을 받아도 메달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러시아어라면 불가능해요. 결국 엘랴는 금메달은 고사하고 은메달도 받기 힘들다게 되었어요. 사실 엘랴는 시험점수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알고 있어요. 그건 공평하지 않은 일이에요. 화가 나고 수치스럽지만 그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도 따지지 않을 거라는 걸 엘랴는 알고 있어요. <설탕 아이>를 다 읽고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귀로 듣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분열과 갈등, 더 나아가 전쟁을 겪어 왔어요. 그러나 엘랴 엄마의 말처럼 세상은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심장으로 듣는, 용감하고 착한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수많은 시련을 극복해낼 수 있었어요. 그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었다고, 설탕 아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네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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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러시아 전역을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오랫동안 농노가 존재하였고, 황제인 차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혁명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머나먼 시베리아로 끌려가 수용소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렸네요. 연해주와 간도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도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역사책에는 담담히 기술되어 있지만 개개인이 겪은 고통은 정말 말로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설탕 아이' 의 저자는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사람으로부터 살아온 인생을 듣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소설로 엮었네요.
혁명의 뜨거운 열기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켰을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설탕 아이' 에 나오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려 시베리아의 마가단이라는 지역으로 유형을 떠나야 했네요. 지도에서 찾아보니 마가단은 우리나라보다 더 동북쪽에 있어 매우 추운 곳이고 모스크바에서는 지구 반대편입니다. 반항 했다가는 정당한 재판 없이 바로 죽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생이별을 하였네요.
반역이라는 굴레는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그대로 덧씌워집니다. 아버지가 떠난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주인공도 중앙아시아에 있는 수용소로 가야만 했네요. 수용소에서는 추위를 막을 변변한 방도 없이 땅을 파서 자야했고, 힘든 노동에 비해 음식은 매우 부실했습니다. 주인공은 아직 어린이였기 때문에 하루종일 혼자서 놀았는데 튤립을 보고 있다가 군인에게 총의 개머리판으로 세게 맞아 기절한 것을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네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어린아이를 때린 군인을 보면서 전쟁이 이렇게 사람을 바꿔놓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주인공의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아는 것도 많았기 때문에 힘든 곳에 갇혀 지내면서도 생명을 지켰고, 수용소에서 풀려 나와서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대로 하면서 주인공과 함께 살아나갈 수 있었네요. 책 중간중간에 일러스트가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이름도 낯선 키르기즈스탄으로의 이주,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등 차분하면서도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히틀러는 '인종 청소' 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서 죽였습니다.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치에게 끌려갔네요. '안네의 일기' 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알려졌는데 '설탕 아이' 를 읽으면서 러시아 혁명 당시 얼마나 많은 가정이 고통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어린이다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혁명의 시대를 직접 겪어야 해서 안타까웠는데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서평을 썼습니다.
#청소년문학 #설탕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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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아이>라는 제목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책이다. 책소개를 읽고 결코 밝은 내용의 책은 아닌데, 왜 제목이 설탕 아이일까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이 이름은 주인공의 별명이었다. 키르기즈인 족장이 스텔라 누돌스카야를 보고 '칸트 발라(설탕 아이, 백인 아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시작된 이름이다.
여러 해 동안 역경 속에 살게 된다. 엄마와 엘랴가 가장 먼저 도착했던 수용소에서 흙벽돌을 만드는 생활을 하는 것부터가 그 고난의 시작이다. 바로 그 곳에서부터 엄마의 강인함을 잘 엿볼 수 있다. 엘랴는 말했다. 엄마는 불굴의 의지와 강철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을. 책을 읽어갈수록 엄마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엘랴의 말처럼 정말 불굴의 의지와 철저한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힘든 삶 가운데에서 엘랴를 키우고 함께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책 속에서 보이는 엘랴의 성품은 엄마를 그대로 닮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책과 함께 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올바른 성품으로 커 나가도록 온 삶으로 본을 보여준 엄마가 있었기에 그녀, 현재의 엘랴가 있는 것이다.
엘랴는 좋은 사람들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책 속에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엘랴가 좋은 사람들만을 기억했기에 작가도 그렇게 소설을 썼다고 한다. 모두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서로 나누고 서로를 보살피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랴와 엄마의 삶 속에는. 그 가운데에서 벌어진 삶의 행보들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늘 배울 것을 찾는 엘랴처럼 우리도 힘을 내보자.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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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로 '별'이라는 뜻의 '스텔라'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진 아이, 줄여서 '엘랴'. 모스크바에서 귀족인 엄마, 아빠 밑에서 태어나 문화적 풍요를 누리는 문학 소녀. 스스로의 힘으로 '매듭을 풀어' 선물받은 말 인형을 타고 책에 나오는 용감한 장군이 되었던 엘랴. 소녀의 소중한 말은 따뜻한 거실이 아닌 가시 철조망에 걸려 있다. 소녀는 발끝을 들어 말을 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피의 숙청, 사회주의 혁명, 스탈린, 2차 세계대전, 강제 이주. 1930년대 역사책 속 몇 줄 속에 엘랴는 살았다. 마치 소설 태백산맥을 읽는 느낌이었다. 역사책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을 보는 것 같았다.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 믿기힘들었다.
'민중의 적'이었던 아빠는 체포되고, 엄마와 엘랴는 수용소에 수감되며 집안은 풍비박산난다. 사랑받으며 자랐을 엘랴는 6살 나이에 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정신을 잃고, 개와 대화하다 채찍질을 당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귀족 여성이었던 엄마는 흙벽돌을 만들다 흙 구덩이에서 아이와 잠이 든다.
"우리를 노예로 판거야, 그런거야? 우리는 이제 노예야?"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 생존조차 위협당하는 그 순간. 혼란스러워하는 딸의 슬픈 물음에 엄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슨 말이야, 예쁜아. 노예는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거야. 자유스러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 들어 봐.
...(중략).. 그의 몸은 비록 노예였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운 사람이었어. 설탕아이. 55쪽.
문학 따위 다 집어치우고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다. 빈털털이로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직업은 얻기 어려워 배고픔과 병, 가난과 싸워야 하는 상황. 그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엄마는 끊임 없이딸에게 외우고 있던 시와 동화를 들려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듯이 문학으로 딸의 영혼을 지키고 살찌웠다. 엄마는 이 무저갱 같은 현실 속에서 딸의 정신만은 자유롭기를 바랐던 것 같다.
두 모녀의 상황과 다르지만 급변하고 있는 오늘.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를 생각하게 했다.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내 아이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든, 음악이든지.
이 책은 설탕처럼 하얗고 약해보이는 모녀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모녀는 설탕처럼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다. 현실에 낙담하고 울고 떼쓰지 않는다. 담담한 어조로 쓰여진 이 책처럼 현실의 매듭을 두려워하지 않고 풀어나간다. '안네의 일기'가 역사의 태풍 속에 꺾인 섬세한 꽃의 느낌이라면, 이 책은 태풍을 이겨낸 푸른 나무의 느낌이다. 능동적으로 엄마를 지키려고 한 아이에서, 화학자가 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연구하고 싶어했던 대학생으로, 다시 정치탄압 희생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노년으로 자라난 나무.
작가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지 않고 담담하게 써내려가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실제로 문체도 무겁지 않고 간결하고 담백했다. 고통스러웠을 시간 속에서 좋은 이웃과 희망을 노래하는 책이었다. 내 아이가 커서 청소년이 된다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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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사랑의 감정만으로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을까.
가끔 이런 이야기들이 떠돌곤 한다. 어린 자녀가 차 밑에 깔리는 교통사고가 났다. 평소 장바구니도 낑낑거리며 겨우 들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차를 들어 올려 아이를 구하고서 쓰러진다. 아이는 살았다. 무사하다. 그리고 초능력처럼 아이를 살린 엄마의 팔은 탈골이 되었다.
어쩜 그런 위기 순간에 그런 힘이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혹자는 평상시에는 위험한 순간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이런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평상시 근육이 최대치까지 무리하지 않도록 뇌에서 통제를 한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에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엄마의 뇌는 근육통제 시스템을 마비시켜버리고 폭발적으로 근육에 힘이 집중된다.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그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초능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설명이다. 이쯤 되면 엄마가 발휘하는 초인적인 힘은 정신력이 아니라 호르몬 분비 덕이라고 해야 하나.
순간의 사고에서 자동차도 번쩍 들어 올리는 힘이 나오는 것은 언제 들어도 경이롭다.
그런데 순간의 사고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지독한 위기와 고통 속에서, 인간의 실존과 존엄이 저해당하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미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어떤 힘을 낼 수 있을까.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극한의 위기가 지속될 때 한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고(남이 극악스럽게 갉아먹는다 하더라도) 강력한 모성애로 어린 자녀가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살뜰하게 보듬고, 게다가 이웃과 인간의 존엄을 서로 존중하고 나누며 살 수 있을까.
오래전에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봤었다. 나치에 의해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유태인 아버지 귀도가 아들과 상상놀이를 하며 아들이 정서적으로 망가지지 않도록 눈물겹게 지켜냈던 이야기를 보며 한동안 무엇에 눌린 듯 가슴이 무지근하고 뻐근했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좋을 인생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비슷한 결의 소설을 찾았다. 인간의 모성애, 부성애가 얼마나 아이를 존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에 대한 소설 '설탕 아이'이다.
여기에서 밑줄 쫙 그어야 하는 것은 아이를 그냥 지켜낸 것이 아니다. 의식주와 실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상상할 수 있는 아이로,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존엄함을 알고 수치심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로 자라나도록 부모라는 발판 위에 바탕을 다져놓았다. '설탕 아이'는 모성애와 인간애, 위기의 상황에서 갖고 있어야 할 삶의 철학에 대해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허구의 소설(fiction)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팩션(fact+fiction, faction)이라는 점이 놀랍고 읽다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설탕같이 생긴 백인 아이 스텔라(줄여서 얼랴). 1930년대 초 엘랴가 태어나서 청년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러시아 사회는 격동의 시기였다. 1905년 차르에게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행진했다가 대대적인 총탄 세례를 받았던 피의 일요일 이후, 차르의 전제 통치에 반발하고 나선 사회주의 혁명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1922년에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귀족과 부농들은 대대적으로 불모지로 유배를 떠나 비참한 삶을 살거나 숙청당했다. 그 이후 차르 전제정치를 대체한 공산당 정권은 전제정치 못지않은 폭압적인 통치를 했다. 내전, 사회주의 불순 세력의 대대적인 숙청 및 강제 유배와 이주, 세계대전이 이어지는 혼란의 시기였다.
엘랴의 엄마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다섯 개의 외국어를 할 줄 알고, 피아노를 칠 줄 알고, 그림을 잘 그리며,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문학교에서 교사를 하였으며, 엄마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뼈대 깊은 귀족 출신이다. 또한 엘랴의 아빠는 발틱해 연안의 유태인이다.
엘랴의 엄마는 귀족의 피가 흐르는 데다가 공부를 많이 해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여서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에서 위험요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엘랴의 아빠는 강직한 성품으로 동료를 구하려 하다가 '조국을 배반한 민중의 적'이 되어 유형지로 끌려간다. 아빠가 끌려가면서 가정이 해체되고 '인민의 적'의 딸인 엘랴의 삶 또한 역사의 질곡을 피해 가지 못한다.
엘랴와 엄마는 '조국을 배신한 사람, 민중의 적'의 가족이다. 사회주의 정치 체제에 위협이 된다면 민중의 적뿐만 아니라 가족 또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직업에서 쫓겨나고 빈털터리가 되어 유배지로 쫓겨나던 때, 그때 엘랴의 나이는 고작 네 살이었다.
엘랴의 기억 속에 아빠의 얼굴은 남아있지 않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커다란 외투 주머니에 있는 사탕으로, 아빠가 엘랴를 부를 때 썼던 별칭으로 남아 있다.
고작 네 살에 헤어진 아빠이지만 엘랴의 기억 속에서 아빠는 남다르다. 아빠가 엘랴에게 남긴 귀한 가르침을 엘랴의 시선으로 따라가보자.
작은 사람. 중요한 단어다. 아버지가 나를 부를 때 썼던 말이다. 내가 한 행동이 마음에 들면 '훌륭한 작은 사람'이 되었고, 더 큰 칭찬을 할 일이 생기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 훌륭한 사람은 많은 걸 의미한다. 훌륭한 사람은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 있다. 세 살 반이 된 사람은 혼자서 옷을 입고 세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빠는 알려주었다. 훌륭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겁을 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겁을 내지 않는다면 두려울 이유가 없고, 그렇게 되면 용감한 사람이 된다. 훌륭한 사람은 모든 매듭을 혼자서 푼다. 삶을 살면서 사람은 여러 가지 매듭을 접한다. 그때마다 매듭을 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칼로 자르는 것이지만, 매듭은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빠는 나에게 해양 매듭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매듭은 풀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혼자서 할 수 있다. 훌륭한 사람은 참을 줄 안다. 참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기보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참는 것이다.
아마도 종잇장 뒤집히듯 삶이 뒤바뀌는 격변기에 중심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 아버지 스스로도 되뇌었을 말이었을 테다. 고작 4살이 된 엘랴를 무릎에 앉혀놓고 일러준 내용들을 엘랴가 어린 나이에 온전히 이해했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삶의 곡절을 겪으며 아버지 말씀은 엘랴의 삶에서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엘랴와 엄마가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비참하고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어릴 적 병에 걸려 한 쪽 다리를 절며 거동이 불편한 엘랴의 엄마는 흙벽돌을 만들고, 하루 종일 일하느라 손바닥에서 매일같이 피가 나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나날이 지속된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도 안 된 어린 엘랴가 철조망 너머 핀 꽃 한 송이를 가져오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감시하는 군인은 엘랴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힘껏 때려 엘랴는 일주일간 혼절하듯 정신을 잃고 머리에 철조망이 박혀 머리를 삭발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엘랴의 엄마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린 딸 엘랴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시를 읽어주며 수많은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엘랴의 정신이 고양되도록 한다.
이게 다 무어라 말이냐. 남편이 '민중의 적'으로 몰려 끌려간 데다가 덩달아 가족이라는 이유로 남편과도 헤어져 낯선 유배지에 보내지고, 감시와 통제 속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그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다. 먹을 곳과 쉴 곳, 제대로 잠을 청할 곳이 부족하며 안전의 욕구가 채 보장되지 않는 삶. 포기하고 싶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그 상황에서 시와 노래, 문학작품을 들려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던져버릴 수도 있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에게 채찍으로 등과 발을 호되게 맞은 어린 엘랴가 엄마에게 묻는다.
"우리를 노예로 판 거야, 그런 거야? 우리는 이제 노예야?" "무슨 말이야, 예쁜아. 노예는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거야. 자유스러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 그리고 엄마는 소리 내어 시를 읊기 시작했다. " 쿠르프스키 공작은 황제의 노여움을 피해서 도망갔다. 공작과 함께 잇는 마부인 바시카 쉬바노프도 함께 갔다. 공작은 불행했다. 그가 타고 있는 지친 말이 쓰러졌다. 그래서 노예적 충성심으로 쉬바노프는 자신의 말을 사령관에게 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쉬바노프가 노예였을까?" "아아~아니. 아마 아닐거야. 물론 아니야." "맞아. 제대로 맞췄어. 그의 몸은 비록 노예였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운 사람이었어." 이건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런 경우를 책에서 '앓던 이가 빠졌다'라고 한다.
우리 나이로 고작 유치원생인 딸이 철조망을 주변을 산책하며 개와 대화했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그런 딸이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이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어떤 모습을 딸에게 보이게 되겠는가? 엘랴의 엄마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우는 대신 딸의 등을 보듬으며 자신들의 상황을 빗대어 시를 읊어주고 몸은 속박되었을지언정,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알려준다.
나의 인생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는 부성애를 발휘해 아들에게 비참한 수용소에서의 삶을 낭만과 유머, 모험의 세계로 포장해서 보여주었다. 귀도가 처한 현실은 비극이었지만 아들 조슈아는 아버지의 다정한 품 안에서 완전히 보호받고 있었다. 영화 속 조슈아의 시선으로 볼 때 수용소에서의 현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상상 속 모험이 현실로 바뀐 환상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설탕 아이'의 엘랴는 좀 다르다. 비참한 상황을 고스란히 겪고 느끼고 혼란을 느낀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도와주는 좋은 사람만 있다고 말해주며, 어린 딸에게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법을 알려주면서도 동화를 외워서 들려주고, 시를 읽어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주고, 삶과 현실이 문학과 맞닿아있는 것을 알리며 문학작품을 통해 수치심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아내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돕는다.
인생의 고단함을 경험적으로 배운 아이들은 일찍 철이 난다. 소설 속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학교도 채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 엘랴는 장티푸스에 걸린다. 낮동안 엘랴는 하루종일 혼자 버텨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엘랴는 철저한 절식을 하지 않으면 위장이 꼬여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일하러 간 엄마가 실수로 음식을 자물쇠로 잠그지 않고 가자 엘랴는 삶과 죽음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위기는 상황임을 직감한다. 허기진 엘라는 그 음식을 먹는 대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큰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한다. "음식을 궤짝에 넣고 잠근 뒤 열쇠를 가져가 주세요" 라고 말이다. 우리 나이로 고작 유치원생 정도 되었을까, 어린아이가 홀로 외롭게 방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버텨내는 것을 보며 눈물이 차올랐다.
엘랴는 이제 점점 성장하고 자라난다.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라난다. 그 안에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를 위해 당돌하게 사벨리 할아버지 댁에 방문을 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엄마가 일자리를 잃자 키르기즈어로 직접 마나스를 읊는 마나스치가 되어 스스로 직접 돈을 벌고자 한다.
또한 엘랴는 이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며 깊게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다. 죽음의 위협이 상존한 그곳에서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복종이 생존 확률이 더 높다. 그런 엄마는 현명하게도 엘랴에게 현실을 살되,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귀로만 듣고 쉽게 판단하지 않도록 심장으로 듣는 법을 가르친다. 엘랴 모녀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민중의 적'의 가족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엘랴의 엄마는 엘랴가 스스로 비굴하게 살아가지 않도록 심장으로 듣는 법, 상상할 줄 알고, 문학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아는 아이로 만들어나간다.
도대체 어떤 원동력이 있었기에 어린 딸 엘랴를 죽을 고비 속에서도 바르게 키워내는 게 가능했을까 생각해 봤다.
엄마 자신이 갖고 있었던 문화적 자산(비록 소련 정치체제에서는 그 문화적 자본과 자산이 칼날이 되어 자신을 겨누었지만), 그리고 넓게는 인간에 대한, 좁게는 딸 엘랴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 덕이 아니었을까.
강철같은 강인함을 가진 엘랴의 엄마가 수용소와 유배지를 전전하는 가운데 보여준 말과 행동, 가르침은 비록 작은 날갯짓에 불과했지만 그 날갯짓은 또 하나의 바람과 반향을 일으켜 엘랴를 성장시켰다. 엘랴는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비참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있는 자리에서 강인하게 살아냈으며, 남을 위해 올바른 소리를 낼 줄 알고 손해를 감수할 줄도 아는 용기와 대범함을 지닌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모진 바람을 견디면서도 삶의 순간순간 희망을 보려 하는 엘랴의 어머니, 실존하셨던 분이었기에 책을 덮고서 진한 여운이 남는다. 극심한 변혁기에 역사의 무게가 개인의 삶을 압도하고 짓누를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살아낸 엘랴 어머니.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직시하며 정치탄압의 희생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노년의 엘랴(스텔라).
문득 강철 나비와 같은 그녀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결국 모두 잘 살아냈습니다. 그 삶 속에 얼룩진 상처는 많았지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려움을 겪어냈지만, 그래요. 이제 결국 당신들이 이겼어요, 구소련의 정치 체제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정신은 죽지 않고 이렇게 남겨졌습니다. 귀로만 듣지 않고, 심장으로 듣는 법 다시 한번 일깨워주어 감사합니다.
네 줄 추쳔평 무거운 이야기라서 시종일관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완벽한 오산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문체는 때로 재기발랄하고 때로 담담하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정신력과 사랑으로 버텨내는 그녀들의 이야기, 극한 상황에서 서로를 도우며 온정을 베푸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절망보다는 희망을, 어둠보다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책, 그러나 아이를 가진 부모가 읽으며 성찰한다면 더 좋을 책.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자유롭게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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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 학교 도서관에서 '안네의 일기'를 읽고 연이어 두세번을 더 읽던 아이였기에, <설탕아이> 또한 아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책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틀에 걸쳐 책을 다 읽은 아이가 "엄마, 이 책 안네의 일기랑 느낌이 비슷해." 라고 말하더군요. 배경이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 내용이 완전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주인공 스텔라 누돌스카야가 1930년대 후반에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고, 그런 와중에도 그들을 지켜주던 이웃들과 함께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이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저나 우리 자녀들에게는 이 책의 배경이나 이 책에서 나오는 생활 모습들이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 또한 전쟁을 겪었었고, 이데올로기로 인해 지금까지도 나라가 분단된 고통을 겪고 있기에, 어찌보면 <설탕아이> 속 인물들의 삶은 우리 선조들이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이야기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청소년문학 <설탕아이>는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지만, 설령 그런 걸 모른다 하더라도, 묘사가 세세해서 그냥 이야기 자체만으로의 흡입력이 높습니다. 시대배경은 생소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면서 충분히 머릿속으로 인물들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을 그려가며 읽어갈 수 있습니다.
저희집 예비중 소녀에게는 아직 어려운 내용이긴 했지만, 이 책이 가진 희망의 메시지는 이 책을 읽을 청소년들에게 충분히 전해질거라 생각됩니다.
아이도 나중에 꼭 다시 읽어볼거라 다짐을 하더라고요.
아이와 이 책을 함께 읽고 잠깐이나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엄마아빠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설탕아이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합니다.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이 여자아이의 인생에서 몇년 되지 않는데. 아빠가 아이게게 심어준 메시지가 설탕아이의 인생 전체에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설탕아이>는 책 말미에 작가가 말합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어떻게 이 책을 서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주고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니, 저는 이 책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고통만 가득할 것 같은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설탕아이(주인공 스텔라)와 그녀의 엄마를 통해 오히려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되는 책이거든요. 작가가 이 책을 읽을 청소년들을 위해 책을 서술하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겠구나 싶었습니다. 청소년 문학도서이지만, 중고등학교 학생 뿐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내용입니다. 중고등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엄마아빠와 함께 읽어보길 권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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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한 소녀의 처절한 생존기 <설탕 아이>
스텔라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어린 소녀입니다. 어린 시절 스텔라와 부모님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사라져버리고 엄마와 스텔라는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수용소와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어린 소녀가 겪게 되는 고난과 시련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네요. '설탕 아이'는 '백인 아이'라는 뜻으로 여러 지역을 떠돌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낯선 외양의 스텔라를 키르기즈 지역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었어요.
"우리를 노예로 판거야, 그런거야? 우리는 이제 노예야?"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예쁜아. 노예는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거야. 자유스러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p.55)
엄마 아빠와 함께 산책을 하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던 평온한 삶은 더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텔라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스텔라의 엄마는 비관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언제나 미소짓는 얼굴로 스텔라에게 아름다운 노래와 시를 들려줍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스텔라는 함부로 울지 않고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며 힘든 시기를 견뎌내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엄마, 다 이해했어. 이 노래는 지금 우리에 대한 노래야."
"그래, 파도보다도 높고 바다밑보다도 깊어.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강직한 돛단배야. 우리는 반드시 끝까지 헤쳐나갈거야." (p.62)
스텔라는 어리지만 절대 울지 않아요. 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엄마만 있다면 그 어떤것도 헤쳐나갈 수 있답니다. 어린 몸으로 힘든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 스텔라도 대견하지만 절대 동요하지 않는 (어쩌면 그러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는) 엄마의 강인한 정신력에 줄곧 감탄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다행스러웠던 점은 언제나 최악의 경우로 밀려나던 스텔라를 기다리던 것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스텔라와 엄마는 위기를 극복하고 삶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러시아 혁명이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다면 더욱 깊이있는 독서가 가능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념의 대립과 전쟁이라는 것이 민중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개인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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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로 '별'이라는 뜻의 '스텔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소녀가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인 스텔라를 애칭으로 '엘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부모님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6년 어느날 밤에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체포해 갔습니다. 그때 엘랴는 네 살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아빠는 멀리 있고 자주 편지 못 쓰지만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가 인형을 사 주겠다는 엽서를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해 엘랴는 유모와 함께 유모의 집에서 지냈고 얼마뒤 엄마가 엘랴를 찾아왔고 엄마와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엄마와 엘랴를 유모의 집에서 머물게 하고 싶었지만 정부는 엄마와 엘랴 모두 키르기즈 공화국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엄마와 엘랴는 그곳에서 수용소 생활을 합니다. 엄마는 전에는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진흙덩어리로 흙벽돌 만들기를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엄마는 흙벽돌 건조장에서 일을 합니다. 몸이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엘랴가 여섯 살이 지나 수용소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칼리닌스크로 가 엄마는 유배를 당했고 칼리닌스크 지역에 배정되었다는 증명서는 가지고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이젠 더 이상 가진 돈이나 물건도 없어 건초더미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엄마의 건강은 더 나빠져 결국 열이 나고 움직일 수 없었고 밖으로 나간 엘랴가 사벨리 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사벨리 할아버지에겐 이미 결혼한 딸 둘이 있었고 이들이 엘랴의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와 돌봐주게 됩니다. 그리고 엘랴로부터 어떻게 칼리닌스크로 왔는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엘랴와 엄마를 도와준 유자코프 가족도 많은 일을 겪은 가족이었습니다. 1918년 사벨리는 혁명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판 뒤 마차에 싣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중앙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합니다. 1년 뒤 정착을 하지만 곧 겨울 대기근이 닥칩니다. 이것은 농업개혁과 수자원 개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지역 지주와 기반을 잡은 이주농민들로부터 땅과 물을 몰수하게 됩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유자코프 가족은 엘랴와 엄마에게 농장에서 살라고 했지만 거절합니다.
소설 『설탕 아이』는 1930년대 후반 러시아의 상황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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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학 #설탕아이 / 올가 그로모바 지음 / 쎄네스트
#청소년문학 #설탕아이는 20세기 중반에 살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소설을 통해 어린 소녀의 시선에서 바라본 러시아 혁명과 전쟁(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무자비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어려움과 힘겨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청소년문학 #설탕아이 저자 올가 그로모바는 1956년 11월에 태어났다. 도서관 사서로 25년 동안 일을 하였고, 사서들을 위한 잡지 〈학교 도서관〉 편집장으로 일을 하였다. 10년 동안 외국의 사례들을 통해서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국들의 학교 도서관 및 어린이 도서관 실무 시스템화를 위한 연구를 하였다. 교원 재교육을 위한 연구소에서 〈학교 사서 과정〉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36년 2월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그날 밤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체포해 갔다. 그때 내 나이는 네 살이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1937년 여름에 유배를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프룬제로 가는 기차에서 나의 평범한 어린 시절은 끝이 났다.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수용소였다. 그곳에는 "인민의 적들"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설탕 아이(Sugar Child) ’ 혹은 칸트 빌라 소설의 주인공인 엘랴가 ‘설탕 아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마을의 족장인 소손바이가 ‘백인 아이’라는 의미의 키르기즈스탄어로 칸트 빌라, 즉 설탕 아이라고 하여서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생긴 별명인 ‘설탕 아이’는 다른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1917년 내전 당시 적군(赤軍)에 대항하여 혁명을 반대했던 세력을 흔히 백군(白軍)이라고 한다.
러시아와 한국,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와 한국의 근현대사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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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피빈 국제 청소년 문학상(2013), ?휀 국제 청소년도서관 화이트 레이븐스 선정도서(2015) 등의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는 이 책은 20세기 중반 러시아 혁명과 세계2차 대전을 살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과 2차 대전에 대한 세계사 상식이 있다면 이 책을 더 의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이에 대해 잠깐 구글 검색을 통해 알아보고 독서를 시작한다면 좋을 것 같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사라지고 엄마와 함께 수송열차에 실려 유배를 가게 된 6살의 어린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가 겪게 되는 험난한 삶의 여정이 당시의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소녀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이 경이로왔다.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시와 노래, 역사적 지식을 아이에게 가르친다. 책에서 주인공은 어머니가 목소리 높이는 것을 평생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다.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서 잠을 자고, 여러 날 배를 곪는 상황에서도 평생 친절하고 온화했던 이 훌륭한 어머니에 대한 저자의 기억은 나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 2차 대전의 시대를 사는 동안 주인공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겪은 역경 속에는 여러 선량한 이웃들이 등장한다. 소녀가 만난 이웃이 모두 착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텐데 주인공은 훗날 자신이 선택적인 기억을 하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나도 내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을 더 많이 기억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는 시기라고 한다. 평생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 이 행운에 감사한다. 더불어 지구촌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지금 여기서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주인공 소녀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가 엄숙하고 장엄하다. 나의 삶에 감사하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잠잠히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책이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해 주신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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