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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와 그의 시 현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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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따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민족의 아픔을 따라가는 일과 대동소이하다. 시인이 공부한 북간도-서울-교토-도쿄, 그리고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까지 5년여에 걸쳐 답사하고 쓴 저자의 이 책은 그러기에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낸 동주의 행적을 쫓는 것은 진한 아픔이다. 그 젊은 나이에 이국의 땅에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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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따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민족의 아픔을 따라가는 일과 대동소이하다. 시인이 공부한 북간도-서울-교토-도쿄, 그리고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까지 5년여에 걸쳐 답사하고 쓴 저자의 이 책은 그러기에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낸 동주의 행적을 쫓는 것은 진한 아픔이다. 그 젊은 나이에 이국의 땅에서 생을 달리한 것도 그러려니와 시대가 젊은 지식인을 고뇌의 지식인으로 만들어간 사실이 안타깝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커다란 민족의 설움이다. 저자는 그 길을 통해 동주와 민족을 일깨워 보고 있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져 본다.
 
동주는 중국 관내 한인 학교 졸업생으로 소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한인 학교를 졸업하고도 중국 소학교에 편입해 마지막 학년을 한 번 더 다녀야 중학 입학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학창시절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유고 시집으로 동주를 사랑했던 벗과 가족들이 엮었다. 참람한 동주 삶의 여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주가 우리에게 남긴 건 그가 태어난 이후 성실하게 살았던 만 27년의 생애와 삶의 상처처럼 남은 그의 글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 젊은 나이에, 그 뛰어난 능력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한은 눈물겹다. 그 문물이 시가 되어 곳곳에 떨어져 있다. 저자는 길에서 그들을 줍고 있다. 그것을 우리들은 함께 한다. 동주는 원래 가족들에 의해 ‘시인’으로 칭해 지면서 글을 썼고, 그가 죽은 후 글이 정리되면서 시인으로 재인식 되었다. 절절한 안타까움을 주는 시인이다.
 
저자는 도시샤대학 교정을 거닐며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시구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어떤 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주의 고민이 가득히 밴 학교, 도시샤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이 학교에는 첨탑이 놓은 교회당이 있고, 이 건물은 동주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소재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주의 부끄러움은 시대의 지식인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현실적 삶에 있다. 나라는 힘도 없이 남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자신은 그 나라에서 공부를 한다고 있다는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그래서 <희생>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언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학교는 동주가 잡히기 전에 머물렀던, 동주의 많은 시가 탄생했던 무대가 된다.

 

문학을 통해 자유와 비상을 꿈꾸었을 교토에서 일상의 공간이던 곳에 갇혀 있었으니 동주는 얼마나 억울하고 절망했을까? 그곳에서 동주는 모국어로 쓴 글을 '왜놈의 글자'로 번역해야 했으니 자신의 시가, 자신의 삶이 모두 욕을 당한다고 생각했으리라. 이 고운 길옆에 갇힌 동주의 젊음이 서럽다.


동주가 1943년 7월에 체포되어 1944년 2월에 기소되었으니 조사 기간이 상당하다. 동주가 재판을 받은 곳은 교토지방재판소인데, 도시샤 대학에서 멀지 않다. 재판 결과는 징역 2년 판결을 받는다. 그러면 출감 예정일이 1945년 11월 30일이 된다. 그러나 동주는 우리가 알다시피 형을 다 살지도 못한다. 

 


동주가 갇혀 있었던 경찰서 건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신축한 경찰서가 들어섰다. 이름은 그대로 교토부 시모가모 경찰서다. Y자 모양 기모강의 빗금 부근이다. 경찰서 바로 옆에는 오래된 벗나무가 줄지어 선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얼마나 답답한 그의 젊음을 보내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니혼바시 마스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메트로폴리스 도쿄를 바라볼 때 동주는 자연스럽게 이상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만 더 날아서 벗어나고 싶던 식민지 조선에서 그토록 동경했던 도쿄에 왔지만 결국 폐결핵으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을 말이다.
 


이상이 도쿄에 왔을 때 잠시 머물렀던 병원이다. 1936년 일본에 도착한 이상은 불령선인으로 몰려 체포 되고, 이때 결핵이 악화된다. 그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는 4개월 전에 그와 결혼한 변동림이다.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있었던 이상은 변동림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다 26세로 타국에서 눈을 감는다. 이상이 왜 그리 영혼의 방황을 하면서 작품 <날개>의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강렬하게 채색했을까? 이마 이런 이상의 흔적을 동주는 쫓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이 건물을 보면서 마음에 남는다. 동주의 흔적은 우리들에게 그의 절절했던 마음을 전하듯, 이상은 동주에게 그렇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릿쿄 대학 식당의 전경이다. 이 대학은 동주가 오래 머문 곳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서 동주의 마지막 시 5편이 쓰였기 때문이다. 날짜가 확인되는 동주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 진 시'로 1942년 6월 3일 창작 도는 기록됐다. <흰 그림바 1942.4.14> <흐르는 거리 1942.5.12> <사랑스런 추억 1942.5.13>과 날짜가 확인되지 않는 <봄>까지 다섯 편은 동주가 릿쿄 대학 시절 완성해 연전 동창 강처중에게 보낸 작품이다. 

 


동주는 이 대학에 잠시 머물다가 교토로 갔고 도시샤 대학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의 시간들을 보낸다. 릿쿄대학은 2010년부터 <윤동주 국제교류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 곳이다. '시인 윤동주를 초무하는 릿쿄 모임' 회원들이 윤동주와 관련한 활동 수익 전부를 이 장학금에 기부한 덕이다.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는 윤동주 시인이 두 나라를 이어 주는 다라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귀한 일들이고, 귀한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바람직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동주가 버릇처럼 '조선'을 되뇌었다는 우에노 공원은 그러나 우리 역사와 질긴 악연으로 엮여 있다. 메이지 시대 이곳은 박람회장으로 활용되며 박물관 동물원이 들어섰다. 이를 주도한 이가 이토 히로부미다. 그는 일본 황실 제도를 정비하며 총리 자격으로 우에노 공원을 근대식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들어 있는 우네노 공원이다. 이 인물도 정한론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 우에노 공원이 왜 우리와 악연인가? 1905년 을사늑약 후 일제가 파견한 초대 통감이 이토다. 그는 통감 자격으로 1907년 조선에 또 하나의 우에노 공원을 만든다. 그것이 창경원이다. 조선왕조의 지엄한 공간을 한낱 유락시설로 훼철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주는 정한론이 시작된 이곳을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로 나라 읽은 젊은 지식인의 한스런 비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굳센 마음 다짐을 하지 않았을까?


해방 다음 해 청년 윤일주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고 형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동주의 유고와 유품을 수습했다. 그러던 중 동주 2주기 추모 모임에서 유고 시집 발간이 추진되고, 3주기를 앞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되기에 이른다.
  


이 책에는 총 31편이 실려 있다. 정병욱 선생이 보관했던 동주의 자필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편과 릿쿄대학 시절 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낸 다섯 편, 조선일보에 발표한 두 편, 그리고 동주가 노트와 낱장에 남긴 5편이다. 도합 31편이 된다.


초판본은 동주 3주기 맞춰 출간하려 했으나 해방 직후 종이 등 물자부족으로 인해 벽지로 표지를 만들어 10권을 제본했다. 최초 본은 추도식 참석자들이 나눠 가졌다. 정식 출판된 초판본은 한 달 후에 나온다. 그리고 동주의 여동생 윤혜원도 서울로 오게 되고 이 때 동주의 작품 몇 편을 더 가지고 온다. 동주의 작품이 풍성해 진다. 동주의 유고시집이 나오게 된 상황들이 이 부분에서 제시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동주에 대한 인식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동주의 시를 부끄러움의 미학이 들어 있다고 한다. 나라를 강제하고 있는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한탄하며, 그 설음을 언어에 담는다. 조국은 일제의 지배 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지식인으로 공부만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프고 부끄럽다. 그 부끄러움이 언어가 되었다.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쓴 동주를 알며 저자는 부끄러움은 잊지 않되 자조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동주는 또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일상을 간직해. 몇 줄의 글을 겨우 얻었다고 했다. 동주의 그 곡진함 또한 잊지 않고자 했다. 동주는 참 모순적이다.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하고 우울하면서도 세련되었다. 동주를 만나고 있으면 진한 향기가 난다. 그것은 젊은이의 지적 세련과 사랑이다. 그 사랑이 자신을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만난다. 동주와 같이 걷고 있는 저자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동주와 같이 물리적인 거리를 지우고 걷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

j****3 2021.02.14. 신고 공감 1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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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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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소개된 책들 중 가장 읽고 싶었던 <동주, 걷다>. '靑年' 이라는 수식어와 맞춤옷처럼 어울리는 윤동주 시인을 표현한 듯한 파란색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든다. 제목이 곧 내용인 이 책은 시인이 전 생애에 걸쳐 머물렀던 도시들 곳곳을 뒤따라 걸으며 그가 남긴 작품 속 구절들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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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소개된 책들 중 가장 읽고 싶었던 <동주, 걷다>. '靑年' 이라는 수식어와 맞춤옷처럼 어울리는 윤동주 시인을 표현한 듯한 파란색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든다.
제목이 곧 내용인 이 책은 시인이 전 생애에 걸쳐 머물렀던 도시들 곳곳을 뒤따라 걸으며 그가 남긴 작품 속 구절들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쉽게 쓰여진 시'에 등장하는 '육첩방'이 있는 교토의 하숙집이라든가 '늙은 교수의 강의'가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릿쿄 대학의 한 강의실 같은 곳들.
그런 장소를 직접 찾아 가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행간마다 시인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이 드러나는데 고등학교에서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시인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숭실학교로 편입하면서 잠시 머물렀던 평양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을 빠짐없이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이번 답사가 아마도 결산보고서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 다음으로 <육사,듣다>의 출간도 준비하고 계시다는데 자못 기대가 된다.

내가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제대로 읽은 건 2002년도쯤으로 기억되는데 지하철역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산 자그마한 책 한 권(맨아래 사진)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윤동주 에디션' 같은 것들이 나오면 주섬주섬 사모으곤 했는데 결혼 전에 샀던 것들은 이래저래 사용하거나 분실되어 행방이 묘연하고 지금 집에 있는 것들은 사진에 보이는 정도다.

 






 

YES마니아 : 로얄 u*******9 2021.02.26. 신고 공감 5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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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동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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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식이 왔다! 일본 교토에 세 번째 동주 시비가 세워진단다."로 시작하는 『동주, 걷다』 는 독립운동가이자 천재 시인 윤동주의 일본 유학시절을 비롯하여 그의 산책길, 등굣길을 직접 거닐며 쓴 여행 에세이겸 인물사와 관련한 내용이다. 여정의 시작은 세번째 시비가 세워진 교토 남쪽 휴양지 '우지 강변'이다.   우지 강변에 세워진 이유는 이러하다. 태평양 전쟁이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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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식이 왔다! 일본 교토에 세 번째 동주 시비가 세워진단다."로 시작하는 『동주, 걷다』 는 독립운동가이자 천재 시인 윤동주의 일본 유학시절을 비롯하여 그의 산책길, 등굣길을 직접 거닐며 쓴 여행 에세이겸 인물사와 관련한 내용이다. 여정의 시작은 세번째 시비가 세워진 교토 남쪽 휴양지 '우지 강변'이다.

 

우지 강변에 세워진 이유는 이러하다.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 출신 동주는 일본에서의 학업이 불가능해진다. 귀향을 준비하던 동주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풍을 학과 친구들과 함께 이곳 우지로 온다. 냇가에서 밥도 해 먹고 놀던 그들은 동주에게 노래를 청한다. 「아리랑」에 이어 동주가 부른 노래는 흑인 노예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미국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Carry me back to old virginny)」였다. p.16

 

우지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이며 풍광이 아름다워 귀족들의 별장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근처에는 아마가세다리가 있는데, 동주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사진 한 장을 찍는다. 그 사진 속엔 교복을 입은 스물 일곱의 청년 동주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동주는 우지 소풍 직후인 1943년 7월 14일 일제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었고, 약 1년반 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5년 2월 16일)

 

우지의 시비가 세 번째 시비라면 동주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비는 어디에 세워졌을까? 첫 번째 시비는 동주와 가장 인연이 깊은 곳, 도시샤대학 예배당과 하리스 이화학관 사이에 1995년 2월 16일 동주 영면 50돌을 기억해 세워졌으며, 동주의 시비 바로 옆에는 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

 

이 시비에는 서울 동주의 모교 연세대에 세워진 첫 번째 시비처럼 「서시」가 그의 필체로 세겨졌다. 이부키 고의 일본어 번역 또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가로로 긴 도시샤대학 시비는 세로로 긴 연세대 시비와 인연이 깉다. 1968년 연세대에 동주의 첫 시비가 세워질 때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가 설계를 맡았다.... (생략)... 일본에 동주의 첫 시비를 세울 때는 동주의 장조카 윤인석 교수에게 디자인 의뢰가 간다.  ...(생략)... 도시샤대학의 동주 시비 돌은 한국에서 가져간 것이고 시비 방향도 특별히 고려됐다. '동주가 늘 보냈을 마음의 방향, 고국이있는 곳'을 향해 하루의 마지막을 배웅토록 한 것이다. p27  

 


동주의 두 번째 시비는 도시샤대학 재학 중 하숙했던 곳에 세워져있다. 동주가 하숙했던 집은 1930년대 건축된 현대식 아파트였다. 다케다 아파트라 불린 이곳은 교토대학이나 도시샤대학 학생 70여명이 하숙하던 규모의 아파트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때 불이 나 건물은 전소되었고 현재는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캠퍼스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에 세워진 시비에도 「서시」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었다.

 

동주의 시비 세 개를 모두 찾은 뒤, 저자는 동주가 하숙집에서 도시샤대학을 오갔을 등하굣길로 향한다.동주의 등하굣길을 따라 걷던 저자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동주'를 떠올린다. 그는 동주의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다. 송몽규와 둥주는 북간도 같은 집에서 태어나 한마을에서 자랐고, 명동소학, 은진중학을 함께 다녔으며 잠시 떨어져있다 연희전문에서 다시 만나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이국 교토에서도 가까운 곳에 살았다.  (동주의 하숙집과 몽규의 하숙집은 걸어서 5분거리다.)

 

그런데 저자의 시선을 따라 동주와 몽규의 등하굣길을 따라가다보면 곧 씁쓸함과 공포감을 선사하는 곳이 보였다. 그 곳은 동주와 몽규가 체포돼 갇혀있었던 '시모가모 경찰서'로, 동주와 몽규의 등굣길 그 언저리에 위치해있었다.

 

먼저 짐을 부치고 귀향을 준비하던 동주는 1943년 7월 14일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된다. 몽규는 이미 나흘 전에  끌려간 터였다. p.47 ...(생략)... 동주가 갇혀있던 경찰서 건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신축한 경찰서가 들어섰다. 하지만 이름은 그대로 시모가모경찰서다. ... (생략)... 경찰서 바로 옆은 오래된 벚나무가 줄지어 선 아름다운 산책로다. ... (생략) 수개월의 조사 끝에 동주는 1944년 2월말 기소되고 재판을 받는다. ...(생략)... 재판받은 날짜는 그해 3월 31일이다. 동주가 재판을 받은 교토지방재판소 또한 도시샤대학에서 멀지 않다. p.49 ...(생략) ... 재판결과 동주는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으로 징역 2년에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본형에 삽입'한다는 판결을 받는다. 이 판결대로라면 출감예정일은 1945년 11월 30일이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듯 동주는 형을 다 살지 못했다. 출감 예정일이  1946년 4월 12일이었던 몽규 또한 그러했다. p51

 

교토에서 체포된 두 사람은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감되고 그 곳에서 한 달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1장, 천년 고도에서 청년 동주를 만나다.>에 관한 내용이다.

 

이어지는 <2장, 일본의 신장에서 동주, 부활하다.>는 2019년 2월 17일 도쿄 릿쿄대학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와 함께 2019'의 추도식으로 시작한다. 일회성이 아닌 열두 번째 열린 이 추도식은 동주가 눈을 감은 1945년 2월 16일을 염두에 두고 잡은 일정이었다. 첨언하자면 몽규의 사망날짜는 3월 7일이다.

 

릿쿄대학은 동주가 도시샤대학을 다니기 전 짧게 다녔던 곳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다.현재 우리에게 남은 동주의 마지막 시 다섯편이 이때 쓰였기 때문이다. 날짜가 확인되는 동주의 마지막 시는 「쉽게 쓰여진 시」,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를 포함하여 날짜가 확인 되지 않는 시 「봄」까지 다섯편은 동주가 릿쿄대학 시절 완성해 서울의 연전 동창 강처중에게 보낸 작품이다.

 

편지를 받은 강처중은 편지 부분을 폐기한다. 당시 엄혹한 시국 때문이었으리라. 그 과정에서 「봄」의 마지막 부분과 날짜가 소실됐다.  동주가 릿쿄대학 재학 시 이 다섯 편만 쓴 건 아닌 듯 하다. 다른 친척이나 친구에게도 소식을 전하면서 시를 적어 보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p.72

 

릿쿄대학 답사가 끝난 저자는 도쿄에서 동주가 머물던 하숙집으로 향한다. 교토의 하숙집은 재판 관련 서류에 기록이 남아있어 찾기 수월했으나 도쿄에서의 하숙집은 릿쿄대학시절 동주가 일경에게 체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자료였다. 릿쿄대학 학적부를 통해 얻은 정보로 동주의 하숙집을 들린 후 저자는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로 향한다. 

 

윤영춘 선생의 증언에 이런게 있다. 나는 둘의 손목을 마주잡고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를 내 집 뜨락처럼 쏘다녔다. p.88 

 

그런데 우에노공원은 우리 역사와 질긴 악연으로 엮여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메이지 시대 이곳은 박람회장으로 활용되며 박물관과 동물원이 들어섰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의 우에노 공원 조성이 왜 우리와 악연인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일제가 파견한 통감의 내정 간섭을 받는데, 잘 아는 것처럼 초대 통감이 이토다. 그는 통감 자격으로 1907년 또 하나의 우에노 공원을 조선에 조성한다. 창경'원'이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지엄한 공간을 한낱 유락 시설로 훼철한 것이다. p.89

 (*훼철 : 헐어서 치워버림)

 

그렇다면 이토는 왜 하필 창경궁을 공원화 한 것일까? 

 

경복궁은 너무 컸고 경희궁은 당시도 이미 상당히 훼철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는 폐위된 고종이 거처했다. 이 무렵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새로운 생활이 즐거우시도록 모든 시설과 설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건립지로 결정한 것이다. p244

(*이어하다 : 임금이 거처를 옮기다.)

 

이 뿐만 아니다. 우에노 공원에는 왕인박사 (4C,백제인물,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전파)의 기념비가 있는데 여기에도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기념비가 세워진 시기를 따져보면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두 개의 기념비는 1904년과 1941년에 각각 세워진다. 1940년이면 중일전쟁이 확전 일로에 있던때다. 일제는 부족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징발하려고 했다.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선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정신 무장'이 필요했다. 두 나라가 하나니 같은 이름을 써야한다는 논리에서 창씨개명이,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한다는 논리에서 '국어', 일본어 전용이 강제 되었다. 이런 사례를 과거에서 억지로 끌어온 것이 왕인 박사다. 고대로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에 '귀화'한 것을 '내선일체'의 구실로 삼은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발기인 중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의 이름이 포함된 것에서 이런 저의를 알 수 있다. p.91

 

우에노 공원을 지나 니혼바시로 가는길 '고서점 거리 진보초'를 경유한다. 이제 독자는  <3장, 현해탄에서 동주를 통곡하다>를 마주한다. 3장에서 저자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향한다. (동주가 갇혀있던 후쿠오카 형무소는 사라졌고 현재는 후쿠오카 구치소가 들어서 있었다.)

1장과 2장은 교토, 토교 답사를 통해 동주의 삶과 흔적을 좇는 여정그린다. 반면, 3장은 후쿠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의 답사를 통해 동주의 죽음과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들의 유골을 안고 후쿠오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주의 아버지 윤영석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할까,  동주와 몽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이 언급한다 (p108). 필자는 이 책을 읽어보고자 따로 기록해두었다. 

 

동주와 몽규의 죽음, 부재를 확인한 뒤 저자의 시선은 룽징 시내를 지나 명동이란 마을에 도달한다. 그 길 초입에는 '명동' ,'윤동주 생가'라는 한글이 새겨져있고, 그의 생가 앞에도 그의 생가임을 알리는 한글이 적혀있다. 동주의 생가로 알려져 있는 그 곳은 몽규가 태어난 곳이기도하다.  몽규는 동주보다 3개월 앞서 태어난다. 몽규의 어머니는 동주 아버지의 큰 누이로 동주에게는 큰 고모가 된다. 이는 <4장, 북간도, 동주로 기억되다>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장인 <5장, 동주의 가장 빛나는 시간을 걷다.> 는 동주의 연희전문 시절과 서울의 산책길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말하는 동주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5장에서는 동주의 친구 '강처중' 과 후배 '백영 정병욱'에 대한 이야기도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동주의 시를 만나보지 못했을 지 모른다.

 

책을 덮으며 시대의 비극이 함께한 동주의 삶의 흔적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동주와 몽규가 조금만 더 버텨주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함께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도서 『동주, 걷다 』는 가독성 면에서 좋다. 또한 근현대사이야기를 다시 한번 새기기에도 좋은 도서다. 다만 반복되는 내용들이 많다. 그 부분은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동주, 걷다 』의 저자 김태빈님께선 현재 『육사, 듣다 』 를 준비 중에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이육사 시인,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그 기대를 품고 필자는 리뷰를 마치려한다.

r**********2 2021.01.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