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대학을 다니신 분들은 이 출판사를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이나 '변증법적 논리학'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책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같은 책들이 바로 이 출판사가 펴낸 책들이죠. 미분방정식이나 유체역학의 공식들이 버거워질때 고려대 정경대 뒤쪽의 장백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선배누나에게서 공짜녹차를 얻어마시며 뒤적였던 사회과학 책들에는 '거름'이 내놓은 적지않은 수작들이 있었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표면적으로 완승을 거두게 되는 시점에 맞추어 많은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이 망해갔고 우리가 알고있는 신촌의 '오늘의 책'이나 '알'서점도 그 삭풍을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거름은 90년대 후반 들어 '돈이 되는 책'을 만들려고 하는 몸짓이 처절했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육아에 대한 책도 내고 인터넷과 관련된 잡서적들을 기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뭐랄까 자기 아이덴티티에 대한 회귀의식이랄까 아니면 그냥 돌아서기 멋쩍은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랄까 이런 것들이 거름으로 하여금 외양이나마 이런 제목의 책을 출간하도록 강제하는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죠. 그럼 책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넷은 고도로 발달된 생산력의 외양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정한 변화를 수반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르크스 또는 공산당선언이 등장하는 것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일 뿐 1장에서 7장에 이르는 본문은 오히려 매우 개괄적이고 기술적인 내용들은 펼치고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조금씩 볼까요?
제1장 멍텅구리 통신망
인터넷의 등장배경을 AT&T와 같은 기존의 독점적 전화회사들에 반하는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결정짓는 것은 '사실의 집적'이 아닌 '위기감'이라는 친절한 주석을 달아놓으면서 말이죠. 여하간 재미있습니다.
제2장 정보를 캡슐에 담아라
'무어의 법칙'을 경제학의 희소성의 원리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IBM과 MS사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독자에게는 쭉 읽어 내리는 것만으로도 전문용어의 학습이 가능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창녀같은 인터넷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비유를 하기도 하지요.
제3장 대역의 폭발
3장쯤 오게되면 마르크스고 뭐고 다 까먹게 됩니다.통신대역에 대한 다소 전문 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뭐 읽어서 손해볼 것은 없지요. 한국통신,데이콤,하나로통신,두루넷 이런 우리나라 통신회사들을 생각하시면서 읽어도 독서의 감칠맛이 있겠네요.
제4장 3층밥이 된 산업
인쇄업(출판업),금융업,정보산업을 3층밥으로 만들면서 인터넷 시대를 진단하고 있습니다.최근 우리나라의 금융구조조정과 관련해서도 음미할만한 대목입니다. 삼성SDS, LG-EDS, 현대정보기술 등 국내 대형 SI업체들의 최근 동향과도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5장 일본식 기업지배의 한계
일본식 고용관행에 대한 반성과 진단을 담고 있습니다.우리나라와 거의 흡사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대기업들.....아으...징그럽습니다.
제6장 새로운 기업지배 전략
정보가전에서의 일본업체 경쟁력 확보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SONY나 TOSHIBA는 지금같은 매스미디어의 좁은 세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컨텐츠를 가능하게 하는 개방형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럼 삼성이나 LG 그리고 우리 벤처기업들은? 당근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되네요.
그리고 에필로그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시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이 생각났나 봅니다. 그냥 넘어 가기에는 프롤로그가 너무 거창했다고 생각했나 봐요. 저자는 리눅스나 아파치 같은 오픈소스소프트웨어(OSS)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위 리눅스 정신은 이윤이나 명예욕과는 다른 영역의 문화요 '인터넷 생산관계'라는 주장입니다('인터넷 생산관계'는 저자가 쓴 개념이 아니고 제가 써본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경제행동이 오직 금전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였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떠오르는 모델이 '바자모델'이라고 규정하고 '분권적 경제모델'의 하나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문화적 근원을 미국 서해안의 히피문화에서 찾고서 그 문화적 기저는 반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사상에서 시작된 인터넷!'개인의 자유로운 연합'이 주도하는 탁월한 개방성과 경쟁의 힘으로 인터넷은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 성장해 나갈 것이라는 대단히 낙관적인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과연 그럴까? 너무 순진한 생각은 아닐까? 작은 책에 170페이지 정도, 그림이 있으니까 페이지 넘기기는 더욱 수월하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시고 담담하게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상깊은구절]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티몬'에서 이렇게 화폐의 악마적인 매력을 창녀에 바유하면서 , 그 '모든 자로 하여금 입 맞추게 하는 전능한 힘을 신에 빗대었다. 화폐는 상품세계의 공통언어가 되어 모든 것을 교환 할 수 있게 하고 자유와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한편에서는 인간세계의 상징적인 의미나 친밀함을 빼앗고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여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가치를 '가격'이라는 1차원으로 압축하여 캡슐속에 집어넣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를 패킷에 담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보내는 인터넷도 인텔리전트 네트워크 쪽에서 보면 정말이지 아무하고나 붙어먹는 창녀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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