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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를 이유로 선뜻 집어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들른 서울의 모 대형서점에서였습니다. 하필이면 몇 번이나 읽었던, 현재도 책장에 버젓이 꽂혀 있는, 그 책을 집어들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렇게 하는 게 그(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눈에 들어왔는데, 고작 몇 번 읽었다고 해서, 고작 집에 한 권 있다고 해서 그(책)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늦은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개정판이니 뭔가 달라졌겠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훑어볼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벼운 마음' 덕분에 그 날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전태일 평전, 그 이름만으로 모든 상념을 날려버릴 듯한 그 책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만이고, 세 번째입니다. 80년대 초반, 그러니까 제가 야학 학생이었던 시절, 문건으로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살 떨리는 긴장감과 함께 읽었던 기억이고, 두 번째는 대학 시절 학회 세미나를 위해 읽었던 기억입니다.
울지는 않았습니다. 새삼 울고불고할 감성이 제겐 남아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울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전태일이라는 거룩한 이름과 마주한 것이 아니라 초라하고 부끄럽고 별 볼일 없는 저 자신의 청춘기와 맞닥뜨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애증이 수없이 교차했던 그 날밤, 저는 울음 대신 상념의 구두점만 연신 찍어냈을 뿐입니다.
전태일이 점심 먹을 돈과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털어 어린 시다(여공)들의 주린 배를 풀빵을 사서 채워주고 자신은 밤새 걷고 달리기를 반복해 무려 3시간 여만에 집에 도착했다가 잠시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하곤 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눈물 대신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 역시 그런 내달림과 걷기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야학교사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저녁 무렵 이문동에서 출발해 한 시간 반 동안 내달려 종암동에 있는 야학에 도착하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 잘난 차비(토큰 혹은 회수권)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최루가스 냄새를 바람에 날려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내달려 최루가스 냄새를 없애고 대신 그보다 더 역겨운 땀 냄새를 풍기며 수업을 했으니,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아무튼 덕분에 체력도 좋아지고, 야학에서는 차비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내내 동정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제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른 것은 야학교사 때의 일이 아닙니다. 그 보다, 그러니까 그 보다 몇 년 전 제가 소위 '공돌이'라는 놀림을 당하기 싫어 옆구리에 늘 '앙드레 지드'나 '헤르만 헤세'를 끼고 다니던 야학학생 때의 기억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열다섯살 어린 여공이 공부해보겠다며 야학에 찾아왔다가 불과 3일만에 그만 둔 일이 있습니다. 선생님 한 분과 저는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그녀의 공장에 찾아갔습니다. 물론 문전박대만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어렵사리 야학에 들른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자신은 공부가 하고 싶은데, 오빠 언니들처럼 검정고시도 보고 싶은데, 공장주인이 야근에 지장이 있다며 못 다니게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흐느끼며 야학을 떠나던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서 저는 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손등과 손마디가 온통 피멍이었습니다. 요꼬(서서 좌우로 움직이는 직조기계)바늘에 찔려서 생긴 상처였습니다. 일이 서투른 시다나 견습공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상처였고, 공장에서 그 상처에 비례해서 숱하게 면박 받고 멸시 당했을 그녀가 하염없이 가엾기만 했습니다.
문학의 밤 때의 일입니다. 시낭송과 노래부르기가 끝나고 드디어 기대했던 연극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목은 '공장의 불빛'.(참나, 당시 교사들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우리한테 그런 공연을 시켰던 건지..) 한시간 이상 진행되어야 할 공연이 채 30분도 안 돼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조명문제도, 연기가 어색해서도, 연출이 엉망이어서도, 무대사고가 나서도, 관객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모두 울었습니다. 구경 온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도, 연극을 기획/연출했던 교사들(대학생)도, 연기했던 학생들도, 저도...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오래도록 펑펑 하염없이 울었던 때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책 읽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이 리뷰를 쓰면서 눈물이 핑 돕니다.
그 해 겨울을 난 뒤, 제가 좋아했던 여학생은 고검에 합격한 후 여상에 들어갔고, 어떤 여학생은 공부를 접고 다시 공장생활에 전념하기로 했고, 저를 무던히도 따르던 어떤 남학생은 고검 합격 후 대검(대입자격 검정고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어떤 형님은 장가를 갔고, 어떤 누나는 남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며 공장에만 전념하기로 했고, 어떤 여학생은 교사(대학생)와 연분이 났고, 어떤 동생은 말도 없이 야학을 그만두었고, 아뿔싸 야학은 우리들의 야학은 건물주의 느닷없는 재산권 행사로 인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생이 되어 슬픔 대신 열정과 분노로 다시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두 번째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의 감성은 무디어질 대로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전태일의 일기 속에 담겨 있는 숭고한 인간애입니다.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186쪽)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201쪽)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208쪽)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239쪽)
단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단지 벗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참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졌던, 그 스물 두 살의 꽃다운 청춘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뒤로하고, 그토록 사랑했던 어린 여공들과 청계천변 평화시장의 노동형제들을 남겨두고 마침내 한 줄기 불꽃으로 산화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애절하고도 절통한 죽음에 대해 저 같은 소인배가 저 같은 한량이 감히 무슨 자격으로 토를 달고 초를 치겠습니까. 그저 성마른 목소리로 이 척박한 대지 위에 작은 불꽃을 틔워 마침내 성화요원으로 타오른 시대의 초인, 전태일의 유지를 새삼 가슴깊이 새겨두고자 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領域)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하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指環, 金力을 뜻함)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유언(책의 마지막 쪽) [인상깊은구절]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208쪽) |
| 전태일(全泰壹).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 불리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 이라고 부른다. 『전태일 평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계속해서 조영래는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는 맹세하였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스물 둘의 젊음이, 이러한 맹세까지 하였고, 자신을 불살라서까지 시정하려고 하였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그를 죽음으로서까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인가? 전태일평전을 따라, 그의 발자욱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비록 세간에선 전태일의 ‘신화화’까지 이뤄져 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의 분신 후 한세대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그를 보기 위해선 그의 수기에 철저하게 바탕을 두고 있는 이 평전을 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닐까 한다. 그의 어린 시절을 정확히 그리고 있는, 그의 수기의 일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열네 살의 한 소년이 …… 잠시 갈증나는 더위를 피하고 있다. 소년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아,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기에 전부가 다 행복한 얼굴들일까?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계절에 맞지 않는 헌 떄뭉치 옷을 입어야 할까? 누구 하나 그 소년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없다. 그는 정말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다. 학력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 중퇴와 청옥고등공민학교 생활이라고 해봐야 채 1년도 되지 않은 것이 전부였으며, 안정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그는 열 다섯이 되던 해(1961)에 처음으로 가출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여러차례의 가출과 복귀(?)를 거듭하게 된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는 생존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 ‘거리의 천사’가 될 수 밖엔 없었고, 이때의 경험을 시작으로 현실을 교사로 삼아 모순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그의 수기에서 접할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 그 억센 비를 맞으며 하나라도 더 팔려고 “우산!”하는 소리에 한걸음에 3층까지 뛰어 올라갔었지. “우산 하나 얼마니?”“예 35원입니다”“왜 35원이야, 30원주고 샀는데.”“아녜요, 35월이면 본전밖에 안됩니다.“”밑지긴 뭐가 밑져, 예들은 왜 곧 죽는 소리야? 기분 잡치게. 아니 이거 헌 우산 아니야! 자루가 이게 뭐야. 곰팡이가 슬고, 이거 헌 거로구나!”“아-, 아닙니다. 천만에요, 이건 분명히 제가 금방 받아온 거야요.”“변명은 말아! 너희들이 그런 지저분한 변명을 하니까 밤낮 그 모양 그 꼴이야. 이 거지 같은 자식아!” 그래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거지예요. 댁에서는 태어날 떄부터 그렇게 도도한 집안에서 태어났고요. 내내 도도하십시오. ... 조영래는 이를, 전태일의 정신적 성장과정 중에 발생한, 부한 환경이 그와 다른 수많은 이들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그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분명한 의지가 고개를 든 것이라 평가한다. 부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내내 그렇게 도도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와도 같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서울로 이주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평화시장의 시다로 취직하게 된다. 조영래에 따르면, 그의 이러한 취직은 당시 떠돌이 청소년들이 취할 수 있는 두가지 선택 ―노동지옥과 형무소 ―중 노동지옥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박통에 의해 개시된 개발독재체제 하에서 그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유휴인력으로서 그들이 가진 노동력을 최대한 짜내야만 하는 존재들로서 이해되었으므로 자본가들에게 있어 그들은 그저 생산라인이 돌아가기 위한 기계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 위에, 그들은 엄청난 노동강도 하에 혹사당하게 된다. 재단사 전태일의 일기는 이를 여실히 증언해준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마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가지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명. 그 사람들이 할 것 나 혼자서 다 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아게 잘하는 사람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그러나 그는 아직 순진하였다. 그는 재단사가 되어 고통받는 미싱사와 여공들의 어려움을 조금 해소시켜주기를 바랬을 뿐, 그렇게 일하는 현실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는 못한다.그러나 재단사로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조금뿐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기업주들의 비인간적 횡포와 학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바보회와 같은 조직적 저항에의 모색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연결고리는 어디서도 확실히 밝혀져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겪은 평화시장의 끔찍한 현실, 그의 소설 구상에서 B로 등장하는 한 소녀의 참상 속에서 보여지는 절절하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여실히 깨닫고, 잘못된 현실에 노예적으로 굽혀 살아가지 않은 채 그를 변혁하려는 의지가 움터올랐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조직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그를 이끈다. 근로기준법이 있음에도 그에 명시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지 못하는 평화시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바보로 생각되어 그는 바보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생계를 걱정한 다른 노동자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몇달이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고 만다. 실제로, 전태일의 분신때까지 그가 노동운동으로 인하여 지고 있던 빚은 무려 1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처세술로 무장한, 사회에 잘 적응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유보다는 책임을 숭상하여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어리석고 무모하다는 것을 마치 공리처럼 받아들이는 세인들에게, 바보회는 하나의 ‘일갈’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인정받기 위해, 다만 생존기계로서의 삶에 의문을 던진 것이었다. 현실의 드높고 두터운 벽을 깨닫게 되고서도 체념하고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며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바보회는 물론 노동실태 조사를 통해 노동부에 진정서를 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이익을 남길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범업체를 설립하려는 등의 활동을 행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은 군대와 생계라는 벽 앞에서 조직적 활동은 얼마 안가 멈추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부한 환경이 거부하는 대다수의 민중이 스스로에게 계속하는 자기비하의 늪에서 빠져나와야만 이 불합리한 현실이 개선될 수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얽어매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으로 인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적대적으로 될 수 밖에 없음을 보았고, 여기서 그는 이러한 현실에의 안일한 굴종이 아닌 주체적인 결단을 통하여, ‘덩어리‘와 ‘부스러기‘의 구조가 아닌, 서로가 서로의 인간적인 필요에 봉사하며, 참된 관심과 애정으로 결합된 이상사회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러한 현실 인식 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바보회를 대신하여 삼동친목회를 설립한 그는, 자세한 항목의 노동현실 조사를 통하여 수치적으로 끔찍한 노동지옥을 증명해 보였다. 당시 대선정국을 배경으로 하여, 어느정도의 ‘자유’가 확보된 기회를 삼동회는 놓치지 않는다. 언론에 노동지옥의 실상을 폭로하기도 하며, 노동자들을 규합해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두터운 현실의 벽, 다시말해 개발독재논리가 굳건히 자리하던 당시의 상황, 게다가 공권력까지 자본가측을 보조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자본가측이었다. 그는 결국 불꽃 속에 목숨을 던지게 된다. 그는 진정으로 목숨을 건 채로 그의 투쟁에 임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를 치기어린 행동으로 매도하였던 언론들도 있으나, 이는 분명 그가 가진 현실 개혁에의 의지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으로서까지 실천하려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일이다. 분명 그의 희생으로 촉발된 수많은 사람의 문제의식과 그 개혁의 의지로 인해, 지금에 이르는 기간동안 우리 사회에는 분명 수많은 개선이 있어왔다. 그러나 또다시 신자유주의의 폭풍 속에 우리는 다시금 물신화의 신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는 다시금 ‘덩어리’와 ‘부스러기’의 상황을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까지 박통시대의 개발독재논리를 완전히 극복해 본 적이 없으며, 아직도 특권층의 보이지 않는 억압과 착취의 구조는 지속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여기서, 전태일의 문제의식과 우리의 문제의식은 일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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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전에 얼굴을 보이는 수 많은 사람 중에 나폴레옹이 있다. 신념과 용기로 황제의 지위까지 올랐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유럽을 정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이루었을까? 단지 자신과 국가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수 많은 전쟁과 살상을 일으켰을 뿐이다. 한 인간으로서 나폴레옹은 위대한 정신력의 소유자일 수는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위인일 수 도 있었겠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이 배제된 그의 삶이 위인이라고 하기에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게는 아무도 거부하지 못할 위인, 전태일이 있다. 노동자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성자, 암울하고도 비참했던 노동자의 삶에 환한 빛을 비추어 준 이 시대의 위인, 억압과 폭력에 맞서 자신의 몸을 사른 이 시대의 진정한 투사. 그가 바로 전태일이다.
촘스키는 이야기했다. 이 시대의 지식인의 역할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암울했던 박정희의 독재시절,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은 침묵하였고 노동의 새벽은 절대 밝혀지지 않을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던 그 때, 전태일이 자신의 온몸을 불사르며 이 땅의 노동운동의 새벽이 열렸음을 선포하였다. 정규교육을 기본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무식한 자였다. 제대로 된 학력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이력은 사회적통념으로 보았을 때, 무식한 노동자의 전형적인 형상이었지만, 그는 그 당시 존재하던 어떤 지식인 보다도 위대한 지식인이었다. 지식인의 참뜻이 촘스키의 말대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과 독재가 그 진실을 감추고 협박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지식인이라면,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세상을 향해 있는 그대로 소리쳐 외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가난했다. 운명처럼 모질게 그를 붙잡고 늘어진 가난 속에서 그는 암울한 20여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 가난 속에서 있는 자의 세상, 가진 자의 착취, 권력의 비굴한 속성을 목도 하였다. 이 책의 저자 조 영래는 이야기한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 찍는다. 노예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전태일은 그러한 가난과 착취 속에서 성장하면서 바보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마침내 진정한 바보로서 사회에 일갈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함성이, 분노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타인에 대한 못 견딜 사랑이었다는 사실이다. 위를 보고는 살아도 아래를 보고는 못사는 인간의 속성상,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성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는 죽었다. 온 몸을 불살라 죽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꽃 다운 미래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자라는 민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정신적 삶의 시작이었으며, 그가 가슴 아프게 사랑했던 노동자에 대한 사랑의 증표였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환경 속에서 일하고, 정당한 권리를 향유하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그가 그의 마지막의 모든 재산인 그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전태일이 가고 삼십 여년, 이 땅의 노동운동은 엄청난 변화들을 겪어왔다. 언제나 권력과 가진 자들은 탄압과 착취로 노동을 유린하여왔지만, 전태일 이후의 수 많은 전태일들이 이 나라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고 보호했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려 왔다. 그로 인해 세상은 변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다. 가진 자와 권력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탄압에 항거한 한국의 노동운동사는 이제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생존권차원의 투쟁을 넘어서 이제는 정당한 참여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에 까지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의 또 다른 적인 '귀족노조'가 출현했다고도 이야기한다.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지고지순 한 사랑이었다. 내 권리와 내 명예를 위한 투쟁 이전에 나보다 못한 이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땅의 노동운동사가 그러한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랑운동으로 역사해 갈 때, 전태일은 비로소 웃을 것이다. 가난과 착취는 사회적 폭력의 다른 말일 뿐이다. 온갖 사회적 폭력이 걷히고 이 땅에 진정한 웃음이 가득하는 날, 우리는 전태일이 소망하였던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식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에게 그러한 세상을 도래케 할 것이다. 전태일은 "잠시 쉬러 갔지만" 그의 사랑의 불꽃은 아직도 남아있다. 처연히 불 타오르는 그 불꽃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책 - "전태일평전" 이었다. [인상깊은구절]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 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인 것이다. |
|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또 저물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땐 그저 유쾌하고 재미있는 곡이구나, 하는 정도만 느낄 수 있었다. 미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노래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몰랐다. 노래가사의 그 슬픔과 한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때는 “전태일 평전”을 접하고 난 이후였다. 키에르 케고르가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하였거늘 골방에 갖혀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는 어린 청춘들에게선 도무지 희망이라는 단어가 무색했다. 하지만 그들의 안타까운 삶에 쉽사리 눈물을 흘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처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마치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흘리는 내 눈물이 위선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움 때문이었다. 이 책 이후에 내가 읽으리라 다짐했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그 책은 분명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나를 이끌어 줄 것이며 “성공”이란 길로 내 등을 떠밀어 줄 것이 분명하지만 도무지 “전태일 평전”은 나를 망설이고 또 망설이게만 했다. 아무런 의심없이 향하고 있는 ‘경제적인 여유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내 길이, 갑자기 너무 부끄러웠고 차라리 전태일을 몰랐을 때의 나의 그 뻔뻔함과 자기 확신이 그립기까지 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를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잘 산다는 것”과 “가치있게 산다는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가치관 때문이었고 그 생각 속에는 힘들고 어렵게 하는 “내 이웃”들을 적어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도 말했다. “내 어머니를 생각하고 내 가족을 생각하면 그저 열심히 일해서 재단사가 되어 나름대로의 안락한 삶에 만족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결코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외면할 수 없었다. 급기야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cud화시장의 자라지도 못하는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결국에는 분신자살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통해 스스로를 다 바쳤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는데 나는 아직 주춤거렸다. 나는 여전히 나에게로만 향하는 이익에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며 내 여유로운 인생을 위해서만 땀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태일의 마지막을 보면서 너무나도 외소하고 나약하고 작기만 한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엔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르는 그의 용기를 보면서 자꾸 작아지기만 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감히 눈물을 흘리기가 두려웠다. 그나마 여유 있는 자의 아래로 향하는 값싼 동정이 아닐까 두려웠고, 위선의 또 다를 모습이 아닐까 두려웠고 앞으로 내 인생에 미치게 될 그의 영향이 두려웠다. 소시민인 내 자신은 차라리 그를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허구가 아니었고 진실 그 자체이기에 나는 결코 외면할 수 없으리라. 그의 인생을 따르며 내 한 몸을 희생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까지도 내일이 없는 불우한 현실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하자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 든,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또 다시 안락의 달콤함에 빠져 허덕이는 내 자신을 보노라면 내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전태일”의 몸에 또 한번 불을 집혀 나를 채찍질하는 스승으로써 그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리라 내 스스로와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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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에 시내의 헌책방에서 구입했던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완독했다. 이 책은 1983년에 초판이 발행되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5공정권에 의해 판금 조처를 당한 바 있다. 내가 구한 책은 1991년에 나온 개정신판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젊은 나이에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 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그는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으나, 사회의 무반응과 개혁의 불가함에 의분했다. 결국 분신으로서 항거한 노동 운동가다, 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책은 5공정권에 쫓기던 조영래 변호사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쓴 책이고, 한동안 저자 미상으로 전해지다가 조 변호사 사후 그의 저작이라는 것이 알려졌다는 것도 들은 바 있다. 내가 아는 지식은 그 정도였다.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본 나는 그런 책이라면 소장 가치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구입했을 뿐이다. 읽고 싶다는 욕구는 크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많았고,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러던 중 책을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고 무심코 책장을 넘겼을 뿐이다. 책을 읽고 난 뒤 가슴에 남는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책장을 넘기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집은 시골이었고,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만큼 극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겪은 가난을 내 주위에서도 보면서 성장했으므로 대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이웃이나 친구들 중에도 그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었고,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 104명 중에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30명 정도였다. 전태일 열사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나의 세대에서조차 가난은 먼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열사의 가난을 보면서 나의 벗과 이웃을 떠올리며 새삼스레 가슴이 뭉클했던 것이다. 둘째, 전태일 열사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무학이나 마찬가지다. 초등학교를 중퇴했고, 공민학교마저 1년 만에 중퇴했다. 그가 가장 바라던 소망은 자신에게 근로기준법을 해설해줄 대학생 친구였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그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성한 문서나 설문지 분석 등을 보면 고졸 학력의 사람들도 미치지 못할 만큼 치밀하였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검색할 수 있거나 노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동고동락한 동지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에 대한 설문지를 비밀리에 전파해서 수거하고, 그것을 분석해서 기자들에게 넘겨서 언론에 발표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태일 열사 혼자의 힘이나 마찬 가지였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세계 노동운동사의 어떤 활동가에도 뒤지지 않을 영웅의 전형이었다. 셋째, 영웅과 문사의 힘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그 분은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과 그를 믿는 이들에 의해 신약성서로 기록되었다. 그로 인해 인류의 성인을 넘어 구세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위대한 제왕과 영웅, 또는 그 반대의 인물들이 어떻게 해서 역사에 기록되었는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해 위인들의 빛이 발하고, 악인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위대함은 어떻게 해서 민중에게 알려졌을까? 물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의 행적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문사인 춘원 이광수에 의해 유려한 문체로 창작된 전기 소설 <도산 안창호>에 힘입은 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영웅적인 생애는 조광래 변호사를 만나서 <어느 청년노동자>란 제목으로 재구성되었다. 그 책은 5공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잠자던 민중의 혼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만나기라도 했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와 일면식도 없었다. 그 점에서 볼 때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의 관계는 예수와 그 제자들의 그것을 뛰어넘는 위대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생전에 그렇게도 노동법을 해설해 줄 대학생 친구를 만나기를 간구하던 열사였다.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후에라도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서 자신의 삶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여한은 없으리라고 본다. 끝으로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는 당시의 통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하고자 한다. 박 대통령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단 한 마디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 분의 딸인 박근혜 씨 역시 아버지는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다가, 대통령 후보가 된 뒤에야“아버님 시대에 고통을 당한 분들에게 사과한다.”라는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사과이면서, 그 표현도 매우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아버님 시대에 고통을 당했던 분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노동운동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 억울하게 애매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당한 인혁당 관련 희생자들, 부일장학회와 MBC를 비롯하여 큰 재산을 빼앗긴 김지태 회장 등에게 아버님을 대신하여 딸로서 사과를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근혜 씨가 이와 같은 표현을 했다면 그것이 과연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가 훼손되고, 스스로에게는 짐이 되는 것일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은 업보에서 벗어나고, 박근혜 씨의 사과는 진정성을 갖게 되어 더 큰힘으로 보강되리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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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다. 지난 9일에 사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다 읽게 됐다. 그동안 책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페이지 정도 보다보면 머리속에는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서 눈은 촛점이 흐려진다. 이러길 수차례... 그렇게 오늘까지 책을 보게 됐다. 어쩌면 일반인들은 한 번 읽고 넘어갈 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보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고민하는, 내가 구하는 대답이 여기에 다 들어있음을 보게 됐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시발점이랄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원인이랄까? 이러한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고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 책을 봄으로써 그러한 점들이 명확해 졌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전태일 동지가 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겪고 있으니까... 근로감독관의 태도, 그밖의 노동부 공무원의 태도, 언론의 무관심, 나아가 권력을 쥐고 있는 관료들의 파렴치함! 이 모든 것이 그때와 지금이 변한 것이 없다. 우리 근로자들은 기본적 권익을 침해받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권익을 찾으려고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헌법소원을 청구하고 나서 노동부로부터 의견서가 접수된 것에 의하면 모든 절차를 다 거쳐서 권리구제를 하고 그래도 안될때 헌법소원을 하라고 한다.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각하되어야 한다고 의견서를 제출한 게 노동부장관이다. 나 또한 반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렇다면 우리 감시단속적 근로자들은 모든 절차를 거칠 수 있을까? 내 대답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차를 거쳐서 한다고 해도 의견이 무시되기 일쑤이다. 거기에 법은 너무 멀리 있다. 6,70년대 전태일 동지가 했던 것처럼... 우선 감시단속적 근로자들은 1년씩 계약이 되는 비정규직의 신분이다. 그리고 용역회사에 의해 간접고용된 상태에 있다. 더불어 실고용자와 사용고용자(나는 "사용자"라는 말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사용"이란 말은 인간의 존엄과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용자"라는 말은 "사업자" 혹은 "고용자"라고 바뀌어야 할 것이다)가 다르다. 거기에 근로기준법의 가장 중요한 사안인 근로시간과 휴게시간, 휴일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행정심판, 행정소송을 거쳐 헌법소원에 이를 수 있을까? 결론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시단속적 근로자의 신분이 계약직이고 간접고용되어 있으며 법률에 의한 근로기준법 완전적용이 되지 않는 상태의 권리제한이 따르기 때문이다. 일단 노동자가 실고용회사와 간접고용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되면 이유없이 해고된다. 하나의 회사를 상대하기도 힘든데 두 회사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더 힘들다. 해고되고 나서 권리구제 하겠다고 절차를 밟는 것조차 우리에게는 힘겹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처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4년 동안 방치되어 왔고 개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만큼 철저히 권리를 제한하고 있기때문이다. 최저임금도 적용되지 않아서 저임금의 상태로 해고되어 구제되기까지 몇 개월을 버텨야 한다는 것만 봐도 우리에게는 권리구제란 참으로 화려한(?)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없다. 생계를 팽게치고 그렇게 나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의 생계를 지켜주지 않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현재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 단속적 근로자로 너무 가혹한 요구에 의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나는 해고를 당하였다. 벌써 7개월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참한 형벌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억압하고 탄압하기만 할 뿐이다. 바로 6,70년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그래 그렇다면 하나하나 밟아가자. 행정심판이 필요하다면 해야지, 행정소송이 필요하다면 해야지. 현재 감시단속적 근로자 승인 취소 진정이 돼 있고, 진정결과 뚜렷한 결과가 없이 종결되어 재진정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재진정 결과도 편의적으로 처리되고 사업주 봐주기로 처리된다면 행정소송이라도 가야지... 내가 어려운 것은 정부의 안이한 업무와 사업주의 많은 편의를 봐주면서도 노동자의 권익을 짓밟는 행위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나를 무쳑 힘들게 한다. 또 더불어 이 시대의 지식층이고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고 있는 학계, 종교계, 언론계의 무관심들... 이 모든 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모두가 눈 감아 버린다.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의 권익을 내팽게쳐버린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최극빈층으로써 살아가기도 벅찬데 권익주장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해한다.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권익을 자포자기 하는 모습은 노동자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전태일 동지가 처참하리만큼 겪었던 6,70년대와 지금은 달라진게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 졌고, 부자인 자는 더욱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거기에 우리는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민주화를 이룬 세력들이 군사정권의 악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어떠한 통치행위를 하고 있는지 모른 채 "현 정부는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묻혀버린다. 진짜 민주화가 되어진 것처럼......... 민주화가 되었다면 왜 권리주장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어야 하는가? 과거 자신이 투옥되고, 군사정권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세월을 잊었단 말인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법률이라는 허울좋은 제도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채 하는 것인가? 법!!! 좋다, 법. 이 법을 누가 만들었지? 서민들이 만들었나? 아니면 빈곤한 사람들이 만들었나? 아니다. 바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다. 이른바 기득권층이라는 사람들이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이 법에 서민들을 위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 이다.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광고용일 뿐이다. 또한 법을 연구하고 회피방법을 연구하는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서민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정치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이렇게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국민의 권리는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 "전태일평전"을 보면서 해답은 풀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이것이 남겨진 과제이다. 나의 과제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
| 어려웠던 시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여주셨다.그리고 그가 노동청에 가서 각고의 노력을 보이는 데도 그를 외면하는 직원들의 장면을 보여주셨다.내가 그였다면 어떠했을까? 서울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구두닦이며 신문팔이, 삼발이 팔이까지 하면서 그가 얻은 것은 세상의 험난함이었다. 시다에서 재단사로 올라갔지만 시다들을 도와 청소를 해주고 버스비까지 털어 붕어빵을 사주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적은 임금,이들을 마구 부려먹는 공장 주인들... 그는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시킬 것을 요구한다.그리고 그들에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줄 것을 바란다.그렇지만 어려웠던 시대는 그의 목소리를 묵과한다.그는 마침내 최후의 방법을 쓰려한다. 자기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자신의 외침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사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용기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의 죽음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그나마 인간답게 살고 일할 수 있게 한 뿌리이다.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허리를 구부리고 꽉 막힌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