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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이 피었다 박용범 독서작가(2022)
꽃이 진다. 그리고 꽃이 핀다. 봄이 시작된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간다. 어린 가슴에도 팍팍하지 않은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한다. 경제적 가치를 최고로 여긴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가치를 누리며 살고자 한다. 반딧불이와 딱따구리. 그들과 친구가 된다. '돈을 쓰지 않는 삶'에 도전한다. 자연에 접해 사는 것은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가지고 있는 책을 모두 정리하고 자연으로부터 자연을 배워나가야 한다. 책 속에 자연이 있지 아니하다. 다만, 자연 속에는 무궁무진한 책들이 숨어 있다. 자연살이는 여유와 낭만이다. 쫓김이 없다. 그런 것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돈은 필요 없다. 하지만 무언가 글로 남기고 싶다. 명예욕이 소유욕보다 한 단계 높이 서 있는 욕망인 것을 분명하다. 명예욕 위에는 어떤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지난 한 해 떠돌며 간절하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겉모습에 혹하여 세상의 명리를 구하고자 하였던가. 아니었는가. 마음속에 한 점 어긋남이 없었는가. 하루해가 진다.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그렇게 십 년 세월이 흘렀다. 동안 불어난 살림살이들이 내 발목을 붙들며 문을 열어놓고 다니던 집은 이젠 자물쇠를 채우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주기고 하지만 언젠가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새들의 노랫소리에 눈을 뜬다. 아침이다. 문을 열면 거기 하루가 다르게 깨알 같은 풀씨들이 깨어나고 이윽고 제 차례가 되어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 눈부시다. 꽃은 일 년에 한 번 꽃을 피울 뿐이다. 두 번 꽃을 피우는 것은 자연이다. 너도 곱다. 나도 곱다. 그래 우리 서로가 곱다.
P72 베어하트라는 인디언이 쓴 『인디언의 지혜』라는 책에는 그가 어린 시절에 늘 가르침을 받았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들아,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얻는 길은 조화를 통한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자신과 조화를 이루어라. 앞으로 네 인생에서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좋고 어던 것은 나쁠 것이다. 사람들이 비난을 하고, 어떤 사람은 네 인생을 통제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조화'라는 그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네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바람과 물과 대지와 꿈들. 기다려온 것들이 꽃을 피운다. 시는 곧 그 감동의 정제된 울림이다. 누군가를 향하여 다가서는 사랑이며 슬픔이며 절망이며 쓸쓸한 것이며 처절한 것이며 목을 놓은 것이며 깊고 따뜻한 것이며 지독하도록 잔인한 것이며 보이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깊어 간다. 풀벌레 소리도 잦아들고 있다. 고요와 소리들의 사이에 내 삶은 늘 한 걸음 비켜서듯 흔들렸었지. 봄과 여름의 날들. 힘겨웠던가. 기쁘게 맞이하였는가. 고통스러웠는가. 후회 없는 삶이라니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가을의 초입, 어떻게 살ㅇ아가야 하겠는가. 한동안 마당을 훤히 밝히던 보랏빛 투구꽃이 꽃잎을 떨구었다. 어쩌면 그렇게 예쁜 꽃이 낙화마저 절정의 순간에 벼랑 아래 몸을 던지듯 져 내리는 것인지. 내 삶고 그럴 수 있다면, 투구꽃을 보며 떠올려본다. 바래어본다. 나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투구꽃이 지며 용담 꽃을 불러들였다. 이제 막 꽃잎을 열기 시작한 용담 꽃은 푸른 동해 바닷물을 길어다 빚어놓은 쪽빛에 가깝다. 아니 쪽빛이다. 그 쪽빛의 꽃들, 뜰 앞은 이제 용담 꽃의 자태로 눈이 멀겠지.
박꽃이 피었다. 분꽃처럼 박꽃도 저녁 무렵이면 피어나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지고 만다. 하얀 박꽃, 얼굴이나 피부가 곱고 하얀 사람을 일러 박꽃처럼 하얗다고 한다. 또한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보고 박속처럼 하얗다고 하는데 박을 켜보면 그 하얀 박속이며 그 박 속에 가지런하게 박혀 있는 박씨들을 보고 그리 말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제가 아직 세상의 어디에 쓰임이 있습니까. 이렇게 미망을 가득 찬 못난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제 원망하는 마음 다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쓰십시오. 나를 드리오니, 온전히 다 드리오니……. 시인 안도현은 삼 년의 복직 생활 만에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다. 그 길, 어찌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 않겠는가. 삼 년 전인 1999년에 그는 내가 사는 모악산 앞자락 구이 근처의 산골에 아담한 작업실을 마련했다. 여기저기 벽이 무너지고 흉가처럼 비어 있던 집이었다. 무너진 돌담을 쌓아 올리고 작은 정자도 한 채 모양을 갖추며 마당에 잔디도 곱게 심어놓았다. 기다린다. 기다림만이 남았다. 응석대에 감긴 등나무의 우거진 그늘이 푸르른 날의 석양을. 반영정의 수면에 내려와 앉은 해와 달과 별들의 하늘로 등을 켜는 날을, 도서관 앞 원형 기둥을 가득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붉은 단풍을 내다는 날을, 하늘 기도소에 나아가 세상의 맑고 아름다운 기도가 들여오는 날을. 그날, 그의 건축이 세상의 순리를, 그 순리의 시간을 비로소 담아내는 날.
《꽃이 진다 꽃이 핀다(박남준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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