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너무 좋아서 책을 구입했다. 세 번을 연달아 읽고 한참이 지나 한 번을 더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너무 좋다. 설익은 문장들이 범벅인 불량식품 같은 소설들을 벌칙처럼 읽다가 이런 소설을 읽으면 문장과 문체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넋을 잃게 된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보는 경험을 하게 되길 바란다. 이렇게 읽을 때마다 여운이 길고 아름다운 작품도 드물다.
1장 무명작가의 문장
1장은 화자는 존 레넌이다. 『어떤 무명인의 비망록』이라는 책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이야기는 존 레넌을 넘어 엘리아스 카네티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다. 카네티의 강연 내용과 아스트리드의 편지를 통해 카네티와 그가 쓴 『군중과 권력』을 언급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랭보와 레넌, 카네티까지 모두 이어진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무명인의 비망록』을 쓴 무명작가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 작가의 메시지와 이 소설의 주제가 여기서 이미 뚜렷해진다.
개인적인 생각에 이 소설의 백미는 1장이다. 무명작가와 랭보의 스토리도 잘 연결되어서 작품을 유기적으로 만든다. 내용상으로도 구성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2장 작가와 혁명가
2장의 화자는 엘리아스 카네티고 이 장에서 비로소 체 게바라도 등장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체 게바라가 인간적으로도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2장에서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가 독일에서 일할 때 만난 마르타와 그의 사이에서 태어난 티나 (카네티는 티나가 찾아온 이후에야 자신에게 딸이 있는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결핍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채워 쿠바 혁명에 뛰어들고자 하는 티나까지... 그리고 이들과 랭보의 상관관계까지 이야기가 촘촘하게 이어진다.
3장 작별
엘리아스 카네티는 쿠바 혁명에 참여했던 딸의 죽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딸의 유품을 전해온 딸의 연인을 통해 자신의 연인이었던 마르타의 편지를 읽게 된다. 이 소설엔 꽤 많은 편지들이 등장하는데, 형식적으로나 구성상으로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인물마다 문체를 다르게 하고 편지의 내용과 편지를 읽는 사람의 생각 등을 통해 거듭 변주하며 내용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매우 우아하지만, 이런 식으로 소설 전체의 흐름과 리듬, 완급을 면밀히 주도하는 작가의 세심함과 치밀함이 돋보인다.
4장 골짜기에 잠든 자
4장에서 작가는 부스토스와 카네티의 만남을 기술한다. 부스토스의 배반을 통해 체 게바라가 죽게 됐다는 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진 믿음이었다. 카네티는 자신의 딸이 티나라는 걸 밝힌 후 자신이 부스토스를 찾아온 이유는 부스토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의 배신에 대해 알고 싶으신 게 아닌가요?" "난 당신에 대한 드브레의 비난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왔소." (p.205)
부스토스는 혁명의 실패 이후 자신이 툰드라 지역에서 경험했던 겨울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네티는 체의 죽음과 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카네티는 존 버거의 글 「제국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체를 죽인 자들이 그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의도와 달리 그의 사진은 안드레아 만테냐가 그린 <죽은 예수>를 떠오르게 한다.
제국주의자들이 체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목적으로 시신 사진을 전 세계에 공개했지만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체는 오히려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p.240)
취리히로 이주한 카네티는 1971년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다.
카네티는 티나의 시선을 느끼며 바다를 등지고 들판을 걷는다. 그러나 그것은 티나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시선이 늘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마르타의 얼굴이기도 했고, 티나에게서 신성한 존재를 인식한 체의 얼굴이기도 했고, 가슴속에 노인처럼 쭈글쭈글해진 아이를 품고 있는 레닌의 얼굴이기도 했다. 죽음의 기척에 둘러싸인 채 무엇인가를 간절히 보려고 한 미켈란젤로의 얼굴이기도 했고, <론다니니 피에타>에 사로잡혀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p.242)
덧. - 이 소설에선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서 주제를 변주해서 보여주는데, 많은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해서 소설을 풍성하게 하는 것도 독자들에겐 큰 즐거움이다. - 체 게바라가 말하는 콩고 혁명의 실패는 안타깝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성공했던 게 아프리카에선 실패한 이유는 무얼까? 왜 어떤 혁명은 성공하지만 어떤 혁명은 실패할까? - 이 소설의 저변엔 항상 랭보가 있다. 소설 제목도 랭보의 시 제목에서 가져왔듯이. 그래서 읽다보면 랭보와 랭보의 시가 자꾸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진다. 프랑스어로 된 원서를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나마 가장 번역이 잘 되었다는 판본을 골라 시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 마지막으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부스토스가 경험했던 툰드라 지역의 겨울을 경험해보고 싶어 진다. 시간이 부드럽게 이어져 흘러가는 그곳에서 겨울잠을 자고 나면 정말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