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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연대기적 흐름을 거부하고, 단문이나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특유의 내러티브 방식을 사용하는데, 각각의 단편의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닌 모티브를 결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의미를 드러내며 마치 성좌와 같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해서 이런 용어를 붙인 듯하다.
간략하게 이 소설에 대해 브리핑하자면, 1990년대가 시간적 배경이고,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트노와 그 주변 지역인 ‘검은 숲’, 등산로, 노바루다, 밤비에지체, 쳉스토호바 및 브로츠와프 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참고로 노바루다는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곳인데, 올가 토카르추크가 여름마다 머물며 글을 쓰는 곳이다). 그러나 에피소드들에 따라 인물들의 기억은 2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성녀 쿰메르니스가 살던 옛적으로 가기도 하면서 각 에피소드들 엮어 '별자리'를 보여주는 셈이다.
II 이 소설은 주인공 커플이 몇 달간 머물렀던 집과 여러 가지 짧은 이야기, 주인공의 생각들을 모아 놓은 콜라주이다. 소설은 수십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인물들 그리고 주변에 대한 주인공의 섬세한 관찰이 나타난다. 작품의 화자는 크워츠코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 주민들의 발자취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데, 그녀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일상생활과 피에트노 주민들의 역사, 독일 정착민에 대한 전후 이야기, 인물들의 꿈, 성녀 쿰메르니스의 전설 등 많은 것들이 얽혀 있다.
여러 이야기들이 혼재하다 보니 읽으면서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인데, 저자가 배치해 놓은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결합하면 비로소 그 의미가 나타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컨셉을 올가 토카르추크는 '별자리 소설'이라 지칭한다.)
III 작품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온전히 알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스터리의 진상을 규명하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마렉 마렉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 파스칼리스는 여성성의 비밀을 탐구하며, 레프는 예언의 힘을 발견하고, 주인공은 마르타의 진정한 얼굴을 알고 싶어한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꿈과 실재의 경계에 있는, 때로는 마법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기이한 질병이나 갈망,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고, 인물들은 이것을 배경으로 움직인다.
소설 속 세계는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소이며, 이것은 인물들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의 대상이 되어 자신을 재발견해야 하며, 주변 세계의 요소들이 잊히지 않도록 정의하고 이름을 지어야 한다.
IV 소설의 제목에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집'은 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이다. 주인공은 작은 마을 피에트노에 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거주지를 둘러보고 이웃을 만나고 손님을 초대하고, 이러는 사이 낡은 건물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밤이 되면 주인공은 집이 내뱉는 꾸준한 숨소리가 들린다고 느낀다.
한편 집은 인간의 내면이기도 하고, 인물들은 종종 소설 속 집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지하실과 넓은 방, 1층 및 다락방이 있는 아늑한 건물로 상상한다. 집은 그녀의 꿈에도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은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마지막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V 집과 더불어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 중의 하나는 꿈이다. 꿈은 주인공의 열정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꿈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인터넷에 기록된 꿈과 비교한다. 그녀는 집과 마르타, 자신의 피부에 대한 꿈을 꾼다. 꿈은 그녀가 자신과 바깥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고인의 유령이 나타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유령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를 통해 어떤 인물들에게 있어 꿈 혹은 환상이나 환영은 인간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꿈의 모티프는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그녀는 환상 중 하나에서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가 단지 삶을 꿈꾸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로 살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p.218)고 고백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집과 꿈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인간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딜레마를 제시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인생과 소멸에 대해 되돌아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꿈을 꾸는가, 아니면 우리의 삶은 그저 꿈일 뿐인가? 그리고 우리가 깨어났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행위를 통해, 그 과정 속에서 이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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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말에서 이번 달 초까지는 내게 누락된 시간이다. 나는 삶의 첨예한 문제로 시들시들하였다. 나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해결되지 않음으로 유지되는 젊음의 시간들을 보냈지만 이제 그 시간들은 끝이 났다. 이제 내가 겪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난감해지는 문제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누락된 시간들 대부분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명해야 하는 순간들로 채워졌다. “긴 방 창문에서 마르타의 집이 보인다. 삼 년째 나는 마르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녀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뭔가 다르게 말했다. 심지어 자기 생일조차 매번 다르게 얘기하곤 했다. 나와 R에게 마르타는 여름에만 존재했고, 겨울에는 이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그녀는 작고, 머리는 거의 하얗게 세었으며, 이도 좀 빠져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주름졌고 건조하며 따뜻하다. 내가 이걸 아는 이유는 우리가 때때로 키스나 심지어 어색한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p.14) 나는 불안으로 촘촘한 시간들에 길을 내기 위하여, 책을 읽는 일만은 포기하지 못했다. 오래전 나는 길을 보여주고 따라오라는 소설을 읽었고, 그 다음에는 길을 보여주긴 하지만 내가 따라가야 하는 소설을 읽었다. 그러다가 나는 점차 길을 보여주지 않아서 내가 길을 내야 하는 소설로 옮겨갔고 급기야 길을 잃을 위험이 아예 없는 소설 혹은 길을 잃어도 아무 해가 없는 소설에 이르렀다. “졸린 상태에서 그녀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고,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고, 행복하게 잠들었다. 그러나 비몽사몽간에; 생긴 일이었는지, 아침에 그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버렸고, 그녀에게는 자신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인상만 남았을 뿐이었다.” (p.71) 그러니까 올가 토카르추크의 《낮의 집, 밤의 집》은 내가 다다른, 길을 잃어도 아무 해가 없는 소설들 중 하나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 《방랑자들》도 거기에 속하고,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소설)들도 그렇다. 나는 이들 소설들을 읽을 때 독자로서 자유롭다. 얽매이지 않고 부러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평온한 상태에서 목적지를 잃고 헤매기 일쑤다. “행성의 영향에 대항하기 위해 쓰고 다니는 나무 모자가 프란츠 프로스트의 특징이었다면, 별명이 없다는 것과 컬이 가득한 머리 모양이 그의 아내의 특징이었다. 그녀는 집 앞 계단의 회반죽 잔류물을 쓸어 내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선 새 집은 햇빛에 침묵하고 있었다. 집은 어렸고, 아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집 뒤쪽 연못가에 그녀의 남편과 어린 아들이 함께 있었다. 어딘가 서쪽 먼 곳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p.203) 목적지가 없으니 헤맨다는 설정조차 무의미하다. 그 무의미함이 좋아서 독서에 기한을 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그 순간까지 읽은 것들을 정정하거나 보정하지 않는다. 그저 때때로 나를 붙잡는 문장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다. 한 번 읽고 잠시 눈을 감고 아무 것이나 떠올린다. 거기에 나를 두기도 하고 거기에서 나를 없애기도 한다. 내가 있는 문장을 한 번, 내가 없는 문장을 다시 한 번 읽는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도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p.321) 나의 누락된 시간은 실체가 있는 나의 삶이 진행되고 있는 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내가 동시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도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낮의 집’에서 누락된 시간은 ‘밤의 집’에서 보충되고 있었다. 어쨌든 문제는 끝이 나거나 해결되었고, 나의 리뷰는 언제나 두 개의 집에 동시에 기거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 / 이옥진 역 / 낮의 집, 밤의 집 (Dom Dzienny, Dom Nocny) / 민음사 / 474쪽 / 2020 (1998,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