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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양심을 등지는 출판사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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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촘스키의 자서전격이 되는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이책을 사서보았다. 읽으면서 책의 성격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해 책의 기획의도가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개인화되는 구도가 싫다며 평생 자서전을 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이책의 본문중에 나온다) 하지만 촘스키와의 편지서신을 가지고 그의 자서전의 성격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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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촘스키의 자서전격이 되는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이책을 사서보았다. 읽으면서 책의 성격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해 책의 기획의도가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개인화되는 구도가 싫다며 평생 자서전을 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이책의 본문중에 나온다) 하지만 촘스키와의 편지서신을 가지고 그의 자서전의 성격을 갖는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촘스키는 이를 알고 묵인한 것인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고유명사가 많이 나오는 책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상당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다. 촘스키의 활동분야가 다양하면서도 깊이있다고 하지만 역자주석등을 통해서 상당부분 매울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주석을 성실히 달았다면 책은 지금보다 25%이상 두꺼워졌을 것이다.) 촘스키번역서에서 자주 대두되는 번역상의 문제도 역시 보였다. 원래 쉽지않은 그의 글을 역자는 더 어렵게 해 놓았다. 역자는 언어학자로서, 촘스키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성격상 그러한 점은 큰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 같다. 말그대로 촘스키의 다양한 활동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자는 저자의 다양하고도 깊이있는 활동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Anarchist'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한 점을 그 일례로 들수 있다. 이는 일본의 번역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넘어온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아나키즘의 다양한 모습중의 한 부분일 뿐이다.(참고로 촘스키는 아나키즘을 사상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성향이라고 했다. 그만큼 정의하기가 어렵고 다양한 결론을 도출할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21세기의 마지막 대안이라고까지 하며 한참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라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Anarchist는 '아나키스트'로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 매끄러웠을 것이다. 촘스키의 정체성에서(그가 아나키스트이건 아니건) 아나키즘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번역상의 오류는 크다고 하겠다.(당연히 촘스키는 이 책에서 무정부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에 나열된 단편적인 사건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감명깊다. 또한 저자의 촘스키와의 서신왕래 내용은 신선하다. 책의 제목대로 촘스키의 끝없는 도전을 풀어 놓았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의미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뒤집어 말하면 흥미로운 사건의 나열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사는 의도가 무엇인지에 따라 평가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한권의 책이 갖는 기대치에는 못미치는 졸작이다. 심우진씀.
j*****6 2002.02.0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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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양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양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내용보기
노암 촘스키, 그는 과연 '통합적인 지식인'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다. 오늘날의 소위 지식인 이라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알고 있으며, 또 아는 만큼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그들의 학문의 깊이 만큼이나 그들이 들어앉은 진리의 깊이는 깊어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는 듯 해 보인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촘스키는 지식인의 살아있는 양심을 대변하고 있다. 그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양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내용보기
노암 촘스키, 그는 과연 '통합적인 지식인'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다. 오늘날의 소위 지식인 이라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알고 있으며, 또 아는 만큼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그들의 학문의 깊이 만큼이나 그들이 들어앉은 진리의 깊이는 깊어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는 듯 해 보인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촘스키는 지식인의 살아있는 양심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핵심적인 의문을 기점으로 하여 특정 학문에 국한되지 않은, 언어학, 정칙학, 인지심리학, 철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들을 아우르며 지식인으로서의 통합적인 사고와 옳바른 목소리,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학자임에 앞서 뛰어난 교육자임을 덧붙이고 싶다. 그는 참 교육자란 다른 경로를 톨해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이 세상속의 널리고 깔리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도, 스스로를 통제할 줄 모르는 인간을 체찍질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며, 학문적 열망으로 가득찬 이들에게 그들 스스로가 판단하고 사고한 작은 불씨가 꺼지지않고 활활 불타오르도록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역설하고 있다. 지식인들 뿐만이 아닌, 일반 대중을 향한 그의 목소리는 기존의 반 강제적 가치체계에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신이 원하는 가치체계를 스스로 선택하여 그 안에서 사고하고, 외부적인 자극과 조건에는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책을 통해 독자들은 매우 오래간만에 한 지식인의 삶속으로 뛰어들어 매우 유쾌한 감동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학자로서의 길과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고있는, 또 걷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자신의 명성 때문에 그 어는 학생도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신념을 지닌 참 교육자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생각할 것과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b*****2 2000.01.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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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삐딱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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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삐딱이의 삶」. 나더러 하라면 이렇게 번역했을거다. 내가 사는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신문 서평에 의존해서 산 책이었다. 본문에서 베낀게 틀림없는 서평은 이렇게 쓰고 있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이어 세계에서 8번째로 인용 빈도가 높은 학자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기록했다고. 특히 동티모르 사태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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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삐딱이의 삶」. 나더러 하라면 이렇게 번역했을거다. 내가 사는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신문 서평에 의존해서 산 책이었다. 본문에서 베낀게 틀림없는 서평은 이렇게 쓰고 있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이어 세계에서 8번째로 인용 빈도가 높은 학자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기록했다고. 특히 동티모르 사태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세계의 이목을 그곳으로 모았다고. 무척 끌리는 인생이었지만 곧바로 책을 구입하진 않았다. 결국 서점에 다시 가게 된 데는 일선이와 나눈 대화의 힘이 컸다. "지금이 형 인생의 최저점이라고 생각해요? 난 왠지 안그런거 같아요." "아예 저주를 퍼부어라." "촘스키 책 나오거 봤죠? 기득권 포기하더라도 자기 할말은 하고야 마는 사람, 그거 형 아니에요?" 그렇게해서 9800원짜리 책을 사게 됐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난 여전히 변형생성문법이나 최소주의 프로그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이해하자면 아무래도 언어학 책이나 촘스키에 대한 다이제스트를 보는게 나을 듯 하다. 아무래도 좋다. 전문적인 언어학 이론에는 관심도 없으며 누구나 인정하는 그의 학문적 위상에 도전할 능력도 의사도 배짱도 없으며,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사도록 한 정치 분야에서의 편력이다. 정치분야에서의 편력이라면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입장과 행동 사상은 뜻한다. 촘스키의 경우 '머크레이저'이자 무정부주의자며, 선동가다. 학자, 특히 정치학자들과의 만남과 토론은 피하면서 대중들을 가까이 한 촘스키를 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사회이론에 대한 토론에는 대부분 등을 돌리며 그의 마음은 늘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운다? 일단 인정. 그렇지만 밤의 군대와 함께 펜타곤으로 데모 행진을 하면서 한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니,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래, 나도 한때 그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시위대가 죄없는 경찰과 싸우나... 하지만 진정 변혁을 바란다면, 변혁을 위한 투쟁은 성공해야 하며, 그러자면 당연히 '효과적'이어야 한다. 그 '효과적'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성은 이성 또는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사회이론이나 문학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촘스키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분명한 한계를 짓는다. "문학은 상상력과 통찰력과 이해력을 고양시켜 주지만, 분명한 결론을 내리거나 결론을 증명하는데는 어떤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호소력'의 방법은 좀더 직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시위의 성공, 즉 시위를 통한 성공적인 의사 표현을 이뤄내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 썼듯 촘스키는 여기에도 별반 관심이 없다. "진실과 사랑은 증오와 거짓을 타파하고 승리할 것이다"라는 바츨라프 하벨의 말에 촘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촘스키의 방식으로 싸운다면, 하벨의 말은 언제까지나 거짓으로 남아 잇을 가능성이 크다.///
k****9 2001.12.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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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함께 읽은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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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화된 대중문화 소비행태는 노동의 차원에 속한다. 소위 세계를 가장 적게 만드는 행위로서, 필연성에 매여있고 반복의 리듬을 지니며, 끊임없이 원래의 세계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소비나 여가는 노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한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의 판에 박은 듯한 내러티브와 스펙터클이 주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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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화된 대중문화 소비행태는 노동의 차원에 속한다. 소위 세계를 가장 적게 만드는 행위로서, 필연성에 매여있고 반복의 리듬을 지니며, 끊임없이 원래의 세계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소비나 여가는 노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한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의 판에 박은 듯한 내러티브와 스펙터클이 주는 순간적인 쾌락이 그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노동과 소비의 리듬에 이어지지 않는, 다른 종류의 활동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계와 무관한 취미만이 존재하며, 여가 역시 새로운 노동을 위한 힘을 주기에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생산의 영역은 빠른 소비에 반대하는 대상들을 만드는 세계다. 생산은 맹목적 반복이 아니라 목적지향적 활동이고, 그 활동의 결과물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일부를 구성한다. 생산은 이렇게 세계를 만들기는 하지만 진정 개방되고 예측할 수 없는 활동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에 의하면 노동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며, 생산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진정한 개방성과 자유는 행동에서만 존재한다. 행동이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말과 행동으로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에서는 사람들과의 관련성 속에 있기 때문에 타자의 개입없이 시작되거나 끝맺지 못한다.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시작이 중단없이 가능하다. 말과 행동은 단번에 모든 것을 변화시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얼마전에 본 유행이나 혁명에 관한 분석서인 티핑 포인트가 연상되는 구절이다. 한 순간에 하나의 행동이 덧붙여 짐으로써 세상의 흐름을 뒤바꾼다. 나비효과같은 것이다. 반면 이제까지 이론적 지식인들이 잡혀있던 세계는 생산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촘스키의 기성 지식인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 "누군가가 인간의 관심사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진지한 이론을 창안해서,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믿을 만한 결론을 내린다고 칩시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이론에 심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무리지어 있는 지식인의 군상만 보입니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중에서...) 이론적 지식인의 경우 고유하고 정치한 이론적 성채를 생산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생산된 것은 견고하고 지속적이다. 우리 삶을 보는 여러 시각 중 하나를 형성할 것이고, 우리 생활에 안정성을 부여할 것이다. 어쩌면 노동의 세계 속에서 이뤄지는 순간적이고 반복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멋진 대안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안정적인 만큼 자폐적이다. 이론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지식인들은 소속을 가리고 무리짓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자신이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노동의 영역에서의 빠른 소비에 저항하는 물건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목적지향적인 만큼 생산의 결과도 확실하고 그 눈에 보이는 결과 덕에 보람도 느낄런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생산한 이론이란 것이 가구나 건물 같은 물건과 같은 것임을 재빨리 알아채지 못한다. 촘스키는 이론적 지식인들의 무리짓기 사교장인 세미나같은 곳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삶의 역동적 행위의 장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던진다. 그에게 있어 진정으로 "지적인" 것은 이론적 세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이 말대로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분출"이다. 그는 항시 투쟁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행동의 영역과 생산의 영역이 서로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는 상태에서 나온다. 일하면서 싸운다는 향토 예비군의 슬로건에 빗댄다면, 그는 싸우면서 공부한다. 즉 싸움의 과정, 즉 끊임없는 새로운 시작의 과정에서 개방적이고 적절한 이론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살펴보면 아렌트의 노동, 생산, 행동의 삼분법이 고스란히 적용되는 듯하다. 기득권층과 기성질서에 무비판적으로 야합하여 엘리트들의 지배질서의 하위요소가 되고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반복과 필연성의 노동의 영역에 갇힌 지식인들이라고 볼 수 있겠고, 상아탑에서 이론의 고고성을 울리는 지식인들의 이론물신주의자들(?)은 생산의 영역에 속할 듯 하다. 반면 촘스키같은 류의 지식인들도 있는데,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는 현대 한국에서 활동의 영역에 넣을만한 지식인들이 90년대 이래로 많이 늘어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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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에 대한 부적절한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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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에 대한 전기라고 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비슷한 책과 함께 구입해서 보았다. 촘스키의 정치적인 성향이 그의 개인사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고 당대 인물들과 주요 역사적 순간들과 어떻게 관계지어지고 있는지를 세세하게(거의 촘스키 개인을 연구할만한 사람에게나 필요할 자료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게 여타의 좌파 사상가들과 구별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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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에 대한 전기라고 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비슷한 책과 함께 구입해서 보았다. 촘스키의 정치적인 성향이 그의 개인사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고 당대 인물들과 주요 역사적 순간들과 어떻게 관계지어지고 있는지를 세세하게(거의 촘스키 개인을 연구할만한 사람에게나 필요할 자료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게 여타의 좌파 사상가들과 구별되며 그의 언행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의 좌파로서의 인간과 세계와 권력을 이해하는 시각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일각에서 촘스키를 폄하하려는 여론조차 권력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을 뿐임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뿐이다. 미국 내에서나 유태인 세계에서는 어떠한지는 몰라도 책에 주로 소개되고 있는 많은 인물들이나 일화는 우리들에게 그리 인상깊게 기억되고 있거나 또 기억할 만한 것이 못된다. 비록 프랑크푸르트학파나 데리다와 푸코 등과 빗대어본 저자의 시각이 새롭다 하더라도 익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좌파 진영의 대표적 인물들과의 비교에서 작가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막연한 유추에 기대고 있다. 촘스키는 간혹 주요한 시사적인 사건에 튀는 발언처럼 내뱉는 미국을 향한 독설로서 만이 아니라 언어, 인간의 인지 과정, 매스미디어와 권력의 속성, 교육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혁신적인 관점을 부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촘스키를 이해하는 입문서로는 이 책은 너무나 불충분하고 독자를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 저자가 어떠한 관점에서 촘스키를 평가하는지도 모호하고 특히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못한다. 촘스키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출판사(김영사나 시공사)의 촘스키 소개 책자를 권하고 싶다.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한 책으로는 '언어지식'이나 '최소주의 문법'이 번역되어 있으나 쉽게 쓰여진 입문서(특히 최근 인지과학 이론과 견주어 볼만한)는 따로 없다.
d******m 2002.02.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