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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선 금서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금서란 권력자들이 지식과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책의 유통을 금지한 것으로 아마 책이 세상에 등장함과 동시에 생겨났을 것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기존체제를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이라는 이유로, 혹은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했다는 이유로 많은 책들이 금서로 낙인찍혀 불태워지고 출판이 금지되었음을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그런 기억이 많은지라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이 책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식을 금지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금서와 비교해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금서가 책에 한정된 것이라면, 이 책은 지식 전반에 대한 것이다. 아마 그래서 ‘금서’가 아니라 ‘금지된 지식’이라 한 것 같다. 저자는 지식이 인류문화 진화의 원동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려 할 때마다 방해를 받아온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본성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특히 과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시대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여 억압하고 은폐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올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크게 말하면 지식의 역사이지만 좁게 보면 과학사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금지된 지식으로는 성서의 천지창조 설화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획득한 지식, 즉 성에 대한 이야기를 원죄와 결부시켜 억압해온 교회의 금지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 과학자들이 밝혀낸 우주 혹은 원자에 관한 지식, 생명공학, 현대의 개인정보에 이르기까지 누가, 왜, 어떻게 그런 지식들을 금지해야 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초기의 금지된 지식은 단연코 교회와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지식의 개척자들은 영원히 억누를 수 있는 지식은 없다며 억압을 당하면서도 지식을 추구했다. 이러한 지식의 추구와 지식에 대한 욕구는 진화와 성 선택의 과정에서 인지를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능력이 생존에 유리했던 것처럼 인간의 본능이기도 했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오로지 끊임없이 적응시켜야 하며,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이 욕구의 모든 중단을 금지해야 한다. 그 일은 가치 있었고 계속해서 가치가 있다.’(110쪽)고 말하며, 계몽시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추구했던 탐구욕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연구대상의 비밀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비밀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기술에 대한 비밀, 사업상의 비밀처럼 공공연하게 과학적 지식들이 비밀이 되어갔으며, 급기야 국가기관으로서 비밀정보기관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종교의 영향뿐만 아니라 정치의 영향에 의해서도 금지된 지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화학무기나 핵무기처럼 전쟁에 사용되는 과학지식의 경우 획득과 금지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과학적 지식이 훗날 전쟁에 사용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근대에 들어서면서 금지된 지식이 적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지식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금지된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금지된 지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현대세계에서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금지되어 가는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누구도 주류에서 벗어난 생각을 한다고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다. 과학의 교의에서 벗어난 생각 때문에 자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 물리학에서조차 숨기고 널리 알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지식이 있었다. 단순한 망각이 아닌 기이하고도 분명한 의도로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고 연구에서 무시함으로써 은폐는 성공한다.’(188쪽) 설사 은폐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지식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는 집단은 또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과학연구의 결과와 거기에서 나오는 결론에 의심을 집어넣고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이용 가능한 지식을 가능한 감추는 정책을 선택한다. 심지어는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그 지식의 진위를 의심케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금지, 기후변화에 대한 화석연료업계와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담배산업계의 대응이다. 더불어 저자는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에 대한 살충제 제조업체들의 공격을 들고 있다. 지식이 권력과 함께 할 때 금지는 더욱 강력해지는 셈이다.
저자는 또한 과학적 지식의 이면을 다루기도 한다. 유전공학은 유전과정의 완전한 이해를 꿈꾸었으나, 유전형질에 개입하고 바꿀 수 있다는 지식의 어두운 면이 등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인간게놈 프로젝트는 금지된 지식이어야 했는지를 묻는다. 그런가하면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식과 비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금지와 공개, 혹은 자의적 공개에 대한 생각을 이어간다. 의사들이 진료과정에서 알게 되는 환자들의 비밀, 소위 빅 데이터라고 하는 수많은 개인들의 사생활이 어디까지 비밀로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정보보호, 정부의 기밀문서, 일기와 같은 사적인 비밀문서 등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지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엇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허나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다 기쁠 수 있을까? 우리는 ‘알면 힘이다’라는 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가지고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저자는 이를 두고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지식도 알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일은 안되지만, 그 지식을 알고 이용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책을 어렵게 읽었다. 거기에 한 몫을 한 것이 교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조사들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고 명백하게 오류라 할 수 있는 단어들이 수시로 나타나 읽는 맥을 끊곤 했다. 더욱이 번역도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속사의 중복 사용과 목적어의 위치가 도치되어 이해를 방해하기도 했다. 아마 너무 직역에 매달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처음엔 하나하나 적어 나갔지만 너무 많아 이내 포기해 버렸다. 개정판에서는 보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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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자주 회자되던 갈릴레오를 그의 과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다소 비겁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의 영향 때문인지 그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는 것이 진정한 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논리가 통하지 않는 교회의 주장에 마냥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훗날 그가 주장한 것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위대한 과학의 지식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지만, 당시의 갈릴레오는 신의 위엄과 교리 앞에 불경죄를 저지른 죄인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선악의 열매를 먹는 순간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긴 죄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면서 동시에 유한한 삶을 살게 되었다. 어렸을 때 접한 이 성경 구절은 나로서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다. 벌거벗은 채 살아가다가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 왜 죄악이었을까? 더구나 그 대가로 추방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대로 인간에게 원죄 의식을 심어주었으니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과 욕구의 추구는 절제되는 것이 미덕이 되었으며, 실제로 이것이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였음에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했고, 또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낙원에서 추방당한 위의 두 사례는 "아는 것이 힘이다."로 대변되는 지식의 관점에서는 다소 의외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축적된 지식은 개인의 성공은 물론 나아가서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기에 이러한 사례는 모순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은 인류가 그토록 염원하던 지식을 억압하고 심지어 감추려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과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지식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금지된 지식'인 이유도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던 지식들이 과거의 수많은 금지와 통제 속에서 탄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책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학설을 주장한 토마스 헉슬리와 옥스퍼드의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의 격렬한 논쟁은 비록 갈릴레오와 같이 종교라는 일방적인 권위 앞에서 철저히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보다는 나아졌지만, 새로운 지식에 대한 금지는 여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윌버포스와 같이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중이 새로운 지식 또는 학설에 대하여 보인 반응이다. "우리가 원숭이에서 기원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는 이 말이 틀렸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만약 그게 맞다면,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한다." - p. 67 中에서 -
인간의 진화적 본성에 대한 다윈의 폭넓은 생각을 접한 영리하고 우아한 여인의 이와같은 발언은 여전히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다윈의 시대에서 인간 진화에 대한 지식은 무조건 의심해야 하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에 대한 부정과 억압이 19세기에만 국한된 것일까? 1925년 미국의 생물학 교사인 존 스콥스는 자신의 수업 시간에 다윈의 생각을 설명하고 진화론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은 신창조주의자들을 열렬히 지지하였으며, 이들은 미국 학생들이 생명 진화 학습을 전국적으로 금지하기를 원했다. 이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한 19세기가 아닌 20세기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침묵의 봄]의 저자이자 환경보호에 앞장 선 레이첼 카슨은 당시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살충제 'DDT'의 위험성을 고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DDT'가 인간은 물론 생태계에 얼마나 위험한지를 밝히면서 'DDT' 중단을 이끌어냈다. 인류의 건강과 생태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그녀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는 '멍청한 암염소' 같은 여자로 폄하되었으며 집단 학살자로 불리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서도 환경보호에 기여를 한 레이첼 카슨의 또 다른 면을 지적하며 그녀를 비판한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DDT'의 유해성이 그리 크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지 못함에 따라서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 레이첼 카슨이 그러한 주장을 폈을 때, 산업계는 언론을 통하여 그녀를 맹비난하였다. 아마 그녀 역시 갈릴레오 또는 다윈의 시대에 살았다면 주장을 굽히거나 또는 'DDT' 중단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지원으로 결국 그녀의 주장이 대부분 옳았으며, 결국 그녀를 억누르려고 했던 산업계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 성은 금기시되었다. 특히 교부 철학으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예 성에 대한 지식을 인간의 원죄론과 결부시킴으로써 중세 유럽에서 성은 금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흥분에 대한 신체의 자연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을 인간의 원죄로 규정하였으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아예 인간의 본능마저도 억누른 셈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인류 지식사에서 호기심 금지로 귀결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까지 하였다. "(중략) 육체를 통해 영혼 안에 들어있고, 육체적으로 즐기려 들지는 않지만 인식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채 육체를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공허한 참견이 있다. 이것이 바로 호기심인데, 이로 인하여 눈이 감각의 주도권을 넘겨받는다. 성스러운 말씀에서는 이를 눈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 p. 45 中에서 -
아우구스티누스 본인도 교부 철학을 집대성하면서 중세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욕망으로 정의하여 그것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니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그로 인하여 중세 유럽이 '암흑의 시대'를 보내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저자 역시 서구 사회에서 이 호기심 금지라는 아이디어를 극복하기까지 무척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언급되어 있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를 우리는 조선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직 주자학만을 학문이라 인정하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논쟁이 생기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으며, 조선의 중후반에 등장한 실사구시의 실학을 배척한 움직임 역시 지식에 대한 통제와 억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지된 지식'이 무조건 새로운 지식을 억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2차세계대전 기간 중에 미국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원자폭탄 제조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뜻 개발에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그들을 설득한 것은 바로 히틀러가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정보였다. 실제 독일은 이론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근접한 상태였다. 아인슈타인이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인슈타인과 달리 조국인 독일에 충성을 하는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히틀러가 먼저 원자폭탄을 손에 넣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 독일은 당시 우라늄 235를 1그램도 생산할 수 없었으며, 연구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즉, 독일이 전쟁 기간 동안 원자폭탄을 만들 위험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는 뉴멕시코에 있는 미국의 물리학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 정보가 전해진다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은 명분을 잃을 수 있기에 중간에 영국의 비밀정보기관이 그것을 가로채서 은폐하였기 때문이다. 이 '금지된 지식'에 의한 파급 효과를 우리는 역사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서 말이다.
이러한 '금지된 지식'의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저자는 진실의 개척자들이 과거나 현재에도 언제나 검열과 탄압, 극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식을 금지하고 은폐하려 했던 상황 속에서도 지식이 힘을 얻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태동과 사유, 논쟁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지성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의 역사는 곧 억압의 역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저자가 오직 지식을 궁극의 것으로서 무조건 찬양만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지금까지 지식에 대한 부질없는 시도라 비판한 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상반된 주장에 우리는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원자폭탄과 같이 인류가 지식에 의하여 퇴행될 수 있는 사례를 감안한다면 그런 주장에도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IT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하여 과거에는 결코 상상도 못한 신기술을 우리는 일상에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로 아날로그의 모든 것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우리의 실체 그 자체가 모두 위조될 수 있다. '딥페이크' 기술이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또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SNS는 마음만 먹는다면 '빅 브라더'의 존재가 자유롭게 개인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채널로 활용될 수도 있다. 또한 유전공학은 아예 인간 그 자체를 위조가 아닌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일정 부분 제한이 필요한 영역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과 기술에 대하여 무작정 통제와 억압을 가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은 더 커질 수 있기에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것 역시 중요함도 지적하고 있다.
[금지된 지식]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호기심' 그 자체를 통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늘날의 수많은 지식이 온갖 통제와 억압에 직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흥미로만 접근한다면 제법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그동안 지식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관심이 끊임없는 분석과 연구를 통하여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수많은 난관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지식의 생성 과정에 대한 전환에 관한 것임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는 지식이 반대로 부분적으로나마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을 보다 유연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점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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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학사학자인 저자의 지식과 권력, 혹은 권력과 정보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다룬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서양에서 지식의 역사는 종교와의 갈등이 가장 중심에 놓여있다. 그래서 철학은 독자적인 학문이기보다 근대 이전에는 과학사의 한 분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새로운 학설이 정립될 때까지 종교적 권위에 의해 억압을 받는 일이 반복되었고, 이는 과학이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영원불변'의 가치를 믿는 종교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과학적 관점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관계 속에서 종교적 권위에 의해 새로운 지식은 억압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세계관이 정립되면서 <금지된 지식>은 새로운 이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정립하기 위해 애쓴 이들을 저자는 포괄적으로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이라 일컫는다. 종교 혹은 권력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을 요구하는 세태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막대한 연구비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대기업들의 행태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최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드러난 일부 학자들의 그릇된 처신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종교와 권력의 힘으로 지식을 억누르고 왜곡하던 주체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돈과 권력’으로 무장된 기업으로까지 확장된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신념'으로 무장된 종교적 권위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밝히려는 과학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신념은 '사실'로 여기고 타인의 생각까지 개조하려는 무리한 시도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최근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일부 종교 집단에서 자행되고 있는 행태가 그러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짜 뉴스' 역시 음모론 혹은 자신의 신념에 기대어 그릇된 현상을 사실로 오도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즉 과학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마저 부정하고, 자신의 신념만을 따르는 현상이 지금도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빅데이터'와 'SNS'로 대표되는 정보 과잉 시대의 지식의 의미를 다룬 7장의 내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자발적으로 개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노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방대한 인터넷의 바다에서 개인이 거쳐가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정보화 시스템의 중독자로 변해버린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고, 이러한 정보 과잉 시대에 주제척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다.
지금도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과 폭넓은 '정보 공개'를 주장하는 이들이 입장이 뚜렷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금지되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정보가 공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기준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닌, 각자 원하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너무도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는 분명 장단점이 존재한다. 개별적인 존재들이 인터넷을 통해 가상 공감에서 서로 연결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꼽히는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취하면서, ‘자기 신념’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이 ‘확증 편향’으로 작용하면, 객관적으로 옳지 못한 ‘가짜 뉴스’임에도 그것을 맹신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의 에덴동산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식과 금기에 대한 방대한 역사를 훑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정보화 시대인 현재의 지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이해된다. 서양의 역사를 통해서 종교나 권력의 권위로 지식을 억눌렀던 사례들과 그에 맞서 ‘진실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했던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 주목한 까닭이라고 하겠다. 한때 진실로 여겨지던 정보가 추후에 다른 관찰의 결과로 수정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예컨대 ‘방사선’의 발견은 누군가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정도로 대단한 업적으로 치부되었지만, 핵무기나 원전사고로 인해서 인류에게 큰 재앙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현실은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다. 모든 과학적 발견이 반드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지금 막강한 권위를 얻고 있는 ‘지식’은 얼마든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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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에른스트 페터 피셔/이승희 다산북스/2021.1.21.
옛날에는 글자를 해독하는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평민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특권층에서는 일반인들이 글자를 해독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무지한 상태에서 특권층의 도구로 전락되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종교인들이 일반인들을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모두 금지 시켰다. <금지된 지식>에서는 지식을 금지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수많은 부질없는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퀼른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켈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에 과학사학자로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해 콘스탄츠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가르쳤다. <만하이 포룸>의 발행인이며, 저서로 <인간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비롯해 70권의 책을 썼다.
지식이란 인간이 관찰 감각을 통해 모으고 시각적 인지를 통해 인식한 경험적 재료를 개념이나 생각과 연결한 다음, 이 연결을 자신의 관점으로 표현하여 외부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 <금지된 지식>에서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낙원에서 금지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 비밀을 다루는 법,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 등 앞부분에서는 주로 종교적으로 금지 시켰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봉인을 떼라 에서는 생물학 중에서 분자유전학에서 다루고 있는 DNA의 연구에 따른 문제를 짚어본다. 마지막으로 지식사회의 사생활과 비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창세기의 설명은 악이 이미 원죄 이전에, 심지어 낙원에도 있었다고 가정한다. 비록 아담은 홀로 선악과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담이 하느님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악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실제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행동이 나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p.32)” 신의 금지명령을 어긴 뒤 아담과 이브의 눈이 열렸을 때, 실제로 중요했던 건 성 또는 성과 관련된 욕망이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성서가 전해주는 바와 달리 나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즉, 다른 성을 본 것이 주제가 아니다. 다른 성을 봄으로써 당연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성적 욕망이 중요했고, 아담과 이브가 획득한 금지된 지식은 실제로는 금지된 사랑을 가리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에서는 처음으로 외국과 외국 지배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 진행되었다. 그밖에도 스파이 활동은 고대 중국이나 고대 인도와 같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있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금지된 정보의 수집 방법을 다룬 책도 등장하였는데 기원전 500년 경에 살았던 중국의 손무가 쓴 <손자병법>이 대표 사례다.(p.130)” 뉴턴은 자신의 지식이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한 지식인 무리에게만 접근을 허락했다는 말이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보통 ‘비밀’로 알고 있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비밀 직식들이 있다.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 장미십자회, 다양한 신비주의 분파들과 많은 비밀 조직들, 그리고 신지학 단체 등 각 조직과 사상마다 책 한 권씩은 필요할 것이다. 뉴턴은 자기 원고의 많은 부분을 비밀 언어로 작성했으며, 오늘날까지 누구도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 게놈에는 30억 개의 구성요소가 있다. 각각의 구성 요소는 알파벳 철자의 나열로 표기된다. 여기서 하나의 텍스트, 즉 유전자 언어로 만들어진 생명의 텍스트가 나온다. 인간은 이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없는데, 각각의 구성요소는 4개의 철자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A. T, G, C라는 4개의 글자가 DNA의 30억 개 사슬에서 서로 번갈아 나오며, 이 4개의 철자는 각각의 화학적 명칭 즉 아데닌, 티민, 구아닌, 사이토신의 첫 글자들이다.(p.237)” 자신의 게놈을 탐구한 사람은 수백 년 동안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크는 자기 탐구의 모험이 끝난 후 원했던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정보들로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다. 이 정보들은 수백만 년 동안 유기체 수백억 개를 거쳐 마침내 나에게 맡겨졌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다양성은 자연의 진화가 생산하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존중받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의 다양성을 신봉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꿈꾸는 미래의 전망이 완벽할수록 그곳에 살아가는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영리함도 서로서로 더욱 닮아갔다.(p.254)” 과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개인적 인간들만 주목받을 수 있다. 세포 분자생물학은 존재하지만, 사회분자생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전공학자들이 인간의 유전물질 개선책을 알고 싶을 때 마르크스주의나 다른 이상주의자로부터 배울 수는 없다.
“가톨릭의 전설의 금지 텍스트 목록인 ‘금서 목록’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줄여서 ‘인덱스’라고 부르는 이 금서 목록은 1559년에 처음 작성되었고, 그 후 수백 년에 걸쳐 6,000개의 제목이 수록되었다. 목록이 6,000개에 도달하던 1962년에 로마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6년에 책 읽는 신앙인, 혹은 신앙심 깊은 독서가들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감독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p.263)” 당연히 가톨릭교회는 이 금서 목록 때문에 큰 손해를 자초했고, 목록에 오른 책들은 큰 신뢰를 얻으면서 나중에는 세게 고전문학을로 상승하였다. 블레즈 파스칼, 장자크 루소, 하인리히 하니네, 그레이엄 그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 목록에 오른 작가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2천 년 전 타키투스도 생각했고 역사가 함께 증명해주듯이, 탄압은 박해받는 이들의 권위만 키울 뿐이다. 반면 탄압하는 지배자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검열관은 짧은 기간 동안만 성공한 것처럼 보이며, 긴 관점에서 보면 단지 우스운 인물로 남을 뿐이다.
“이전 세대는 개인 생활과 여기서 느끼는 감정을 일기장에 털어놓고 일기 작성자는 여기서 자신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었던 반면, 오늘날 세대는 인터넷을 발견했으며, 여기서는 사적인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버린다. 쇼셜네트워크인 페이스북에서는 이를 ‘공유’라고 부른다.(p.347)”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때에만 혼자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혼자 있을 권리에 따른 의무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스마트폰 세대에게 이 지식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느냐이다. 아마도 이 세대는 다음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더는 어떤 방에도 혼자 앉아 있지 않고 그 방에서 환상을 펼치지도 못한다. 대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새장에 갇혀 있다. 그 새장은 자유의지를 더는 허락하지 않으며 우리를 감시하고 조작한다. 이 현실을 모르게 하는 일이 금지되어야 한다. p.356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 이 주장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인상적인 사례는 페이스북과 생물 유전학이다.(p.364)” 페이스북을 먼저 살펴보자. 첫 번째, 우선 페이스북의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이 가져오는 정보들은 예전에는 자신을 위해 간직하며 외부의 (거의) 모든 시선에서 차단되어 있었던 정보들이다. 두 번째, 사용자들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기계 앞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이용자들은 금지된 어떤 일을 한다는 데 엄청나게 매력을 느낀다. 다음으로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많은 관찰자들은 오늘날 생의학에 질문을 제기한다. 최근에 시작된 유전물질에 대한 방대한 연구 덕분에 언젠가는 인간에게 공급할 수 있는 완전한 유전자의 형태를 알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은 어떤가? 유전학의 제자들은 지혜를 몰래 빼낼 수 있는 스승은 없지만, 어느 날 유출된 시디롬 혹은 디스켓을 얻는다. 그 안에는 실제 금지된 지식에 속하는 인간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p.365 아마도 오늘날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유전자 편집’을 지시했을 것이다. 비록 최근에 처음으로 경고 알림들도 나왔고 게놈을 과도하게 수정하면 암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기술적으로 니체의 바람은 실현 가능해 보인다. 이 인간 실험에서는 지식에 대한 타고난 인간적 욕구가 없는 유기체가 생성될 것이다. 이런 존재는 더는 인간적인 삶을 꾸려가지 못한 채 누군가 자신을 끌어주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지식은 계속해서 더 많은 기쁨을 주며, 그 즐거움은 그곳에서 금지된 것과 함께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권력도 지식을 금지시켜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듯싶다. 많은 사람이 함께 읽어 진정한 지식의 자유를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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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2천 년간 끊이지 않았던 지식을 둘러싼 논쟁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거대한 지식과 빛나는 통찰로 인간 지성의 본질을 꿰뚫는 유럽 최고의 과학사학자 에른스트 피셔의 역작! 왜 그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가? 지식 탄압의 역사 속에 펼쳐 보이는 강렬한 지적 파노라마. 표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특히 과학의 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통찰. ... 정신의 밤 측면과 전체에 대한 느낌을 인간 안에서 혹은 인간으로부터 활성화하는 일은 금지된 지식이 없는 온전한 자연과학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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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이 사과 그림입니다. 썩 먹음직스럽지는 않습니다. 명암을 검은색으로 표현하였고 바탕 전체가 검은색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금지된 지식은 인류의 지식 발전을 여러 가지 이유로 막았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표지 그림으로 유추되겠습니다. 시작은 개신교 성서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아담과 이브에게 먹지 말라 하였던 선악과입니다.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픈 게 심리인지라 인류는 먹었고, 그 먹은 것이 원죄라 하여 지금의 개고생을 한다 함인데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교부들의 지배 논리 되겠습니다. 신의 명령을 어긴 결과 죽음이 있고 남자는 땅을 파야 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여자의 유혹으로 인했으니 그 죄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더불어 여자는 유혹의 악마이며, 성적 욕구는 억눌러야 한다는 논리였던 거죠.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은 창세부터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해성과 일식과 월식은 신의 징조여야 했던 천문학이며, 아픈 환자를 마법과 고문으로 다스렸던 의학이며, 수천 수백만 종의 생물들은 모두 신의 창조물이어야 했던 생물학이며, 지구 나이 고작 6000년에 머물러야 했던 지질학이었습니다.
저자는 갇혀있던 인간의 과학적 지식을 논증하기 위해 많은 저서를 인용합니다. 어쩌면 철학서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또 어렵게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신선하기도 합니다. 단순 교양서나 비평서라면 뻔한 이야기겠지요. 여기에서 논증되고 있는 지식은 서양의 금지된 지식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동양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금지의 울타리를 치는 세력은 종교에서 정부로 넘어옵니다. 21세를 사는 지금은 어쩌면 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라 대표되는 우리 대중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는 것 같습니다. 가짜지식이 가짜지식을 낳은 거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갇혀있는 것 같습니다.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 (364쪽)
위 문장이 핵심 주제 같은데요. 예를 하나 들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GMO, 즉 유전자변형 농수산물을 뜻하는데요, 대표적인 게 미국의 거대 몬샌토라는 회사가 개발한 제초제에 강한 콩,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48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GMO 식품의 표기를 우리나라에는 개나 소가 먹는 사료에는 표기가 되는데 인간이 먹는 식품에는 전혀 표기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금지된 지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식품을 사용해서 만드는 제조사의 압력인지는 몰라도 정부는 아직도 표기를 강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미국 정부와 거대 자본의 힘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있을 텐데요. 가격경쟁으로 이러한 농산물을 사용해서 가공식품을 만들어야 한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소비자가 하는 것이고요. 포털에 GMO가 검색되는 것을 보면 금지된 지식은 아닙니다만, 가공식품에 표기되지 않는 것은 금지된 지식입니다. 더불어 언론이나 나라의 지식인들이 이 부분에 대해 크게 여론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것 또한 금지된 지식입니다. 또 나아가 이러한 유전자변형 기술의 남발은 어느 범위까지는 통제되어야 하는 지식일 것 같습니다. 알아야 할 지식과 알려야 할 지식, 그리고 통제되어야 할 지식입니다.
지식은 책에 갇혀있는 게 아니기에 이렇게 떠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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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획득한 자가 무릇 윤리적 자기 통제력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타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야기할 때 그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사실 인류 역사 시대이래 오늘만큼 과학 기술이 획득한 지식이 인간 존재 자체에게 위협이 되었던 적은 없다. 이러한 과학기술에 대한 우려와 달리 저자는 "18C 콩팥이 아닌 시험관에서 요소가 만들어졌지만 아무일도 없었"기에, "21C에도 끔찍한 재앙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230쪽)"을 표명한다. 인간 생명 조작 기술에 접근한 오늘에 대한 이러한 낭만적 이해가 이 책의 중심 신념으로 이해된다. 저자의 용맹한 믿음이야 어떻든 '금지된 지식'에 대한 백과전적인 지식의 나열이 그나마 책장을 넘기는 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성서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생명의 나무 옆, 지식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창조주의 행위 이야기로 책의 포문을 열며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은 이것이 곧 '지식'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 즉 본성임을 말하려는 저자의 적나라한 의도일 것이다. 이어서 "창조주가 인간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알지 못하기를 원했던 지식은 '성적 결합', 즉 생명 창조의 불꽃, 세상 초월의 기쁨에 대한 경험의 금지"라 주장한다. 결국 앎의 추구는 '리비도 스키엔디(libido sciendi)', 인간의 리비도적 욕망 추구이며, "인간 지식의 발전과 형성은 즐거운 통찰이 아니라 불쾌한 금지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사가(科學史家)가 진화생물학 등의 과학이 획득한 지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신화로 인간의 지식 욕구를 설명하는 것이 여간 석연치 않은 것이 아니지만, 곧 이어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기본 물리학에서 양자 물리학으로 도약하는 인간 지식 추구의 열정과 그 여정 속에서 발생하는 악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인 나름 진지한 윤리적 성찰이 지식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중성에 대한 이해로 사유의 격을 살짝 높여준다. 어쨌건 에너지의 함량이 관성에 의존한다는 E=mc² 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폭탄 제조로 이어질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라는 이야기다. 그리곤 "역사적 여정 속에서 지식 획득의 금지를 통해 핵폭탄 제조를 막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가?" 라고 묻는다.
책 표지를 장식한 에덴동산의 나무에 꽃사마귀로 변신하여 이미 악이 존재하고 있듯이 세계의 잠재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것은 한편 "의심을 일으킨 새로운 지식이 과학과 세상을 주술화한다."와 같이 플랑크로부터 시작된 양자역학은 주술을 풀기는 커녕 세계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고 있지 않았느냐는 반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지식, 특히 과학기술의 윤리적 면죄부가 은연히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일례로 수소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기술적 달콤함"을 말했다고 인용하면서 "윤리학자들이 더 많은 용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64쪽)"이라고, 과학의 의지를 제한하지 말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실 저자 '페터 피셔'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 알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게 하는데, 끝없는 모순된 주장을 펼치고 있어 지식의 추구에 한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완전함, 지식의 모든 안개를 지워버릴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인지, 논지의 모호성이 책 전편을 파편화시킬 정도이다.
208쪽에서 이 낭만 사가는 "과학의 정당성은 당연하지 않다....살아있는 세계의 존엄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연구의 자유보다 위에 있기에"라고 "과학 연구 포기의 자유"를 역설한다. 애매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과학 스스로 절제의 미덕을 가지겠으니 외부의 요구에 의한 금지는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그리고 갈릴레이나 다윈의 사례를 거론하며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며 그들의 과학적 발견을 금지했지만 현실은 "의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매우 충실히 낳는다."며, 지식 금지 무용론을 확인한다. 그런데 바로 209쪽에서 "과학자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비이성적 그림자 측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고 윤리적 자기 통제 결여를 고백하기도 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통제력이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이러한 횡설수설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하고 악한지 알고 있을까?(251쪽)"라며, 인간의 인지적 폐쇄성이라는 태생적 무지, 즉 무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를 수밖에 없음의 한계를 토로한다. 그런데 불과 30쪽 앞인 219쪽에서는 유전자변형 식품 개발을 통해 소위 비타민A를 함유한 황금(?)쌀을 그린피스를 비롯한 환경집단이 거부해 인류의 생존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자신은 유전자 변형 식품이 인간에 어떤 이득과 해악을 끼치게 될지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일 테다. 전지전능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자처럼 말한다.
한 편의 코미디 같은 문장이 이어지는데,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을 때 자유로워진다.(255쪽)"고 자신의 사상적 스승인 소위 인식론적 다원주의자인 '니콜라스 레셔'의 "모든 일이 무지의 안개속에 머물 필요없이 명확해진다면....인간적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변형하여 반복한다. 다시금 불과 40쪽을 지난 299쪽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완성'을 통해 행복의 상태에 도달할 권리가 있다."고 상반된 주장을 펼친다. 자신의 지식이 되지 못한, 남의 것을 열거하다보니 진정한 논의가 실종되고 정보의 무수한 열거만 맹목으로 남는다.
유전자 삽입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피셔의 주장으로 마쳐야 할 것 같다. "지식은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사람을 돕는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좋은 교육을 받은 중간 계급이 '완전한 아기' 를 가지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이 자유주의적 우생학 지지자는 도덕적 진공 상태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적 조차 없는 것 같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유전자의 교정적 간섭을 당연시하며,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고, 즉 인간 생명을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려들고,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저자가 아닌 삶을 살며, 자기의식과 책임의 대칭적 균형을 상실케 되고 말것이다."라 지적했듯이 '윤리적 자기반성'이야말로 지식의 한계를 결정짓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가 박스로 배달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하는 일본인이 쓴 쓰레기같은 삼류 소설을 거론하며 "볼만한 가치가 있다.(252쪽)"고 주장할 때 이 책을 덮어버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이다. 전혀 체화되지 못한 인용 문장들이 훼손되는 듯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윤리학자 '한스 요나스', 노벨의학상 수상자 '막스 델브뤽'이 무슨 죄란 말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 그 비밀과 한계, 불확실의 안개는 세상에 여전히 머물기 때문에, 인간 실존 양식에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217쪽)" 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비판하던 의사(疑似)과학을 빼닮은 이 책을 무어라 해야하는지. 터무니없는 니체 비난의 너절한 주장('힘에의 의지'에서 '힘'이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에 대한 반박을 쓰기에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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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와 호기심 <고백록>에 서술되어 있듯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의 탐욕’을 거부하기 전인 청소년 시기에 이미 성적 욕망을 느꼈을 뿐 아니라 이를 활발하게 발산했다고 한다. 397-398년 처음 나왔고, 이후 늘 새롭게 번역되고 출판되는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금욕과 절제를 청하고, 거의 농담처럼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p.44 하느님은 인간에게 ‘절제’를 명하셨고, 인간은 주님에게 육욕과 호기심, 즉 두 개의 리비도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일이 주님의 뜻에 따라 가능해지기를 청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을 끝마쳐야 하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고, 긴 생애에서 남아 있는 수십 년 동안 그러하기를 청한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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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에른스트 페터 피셔/이승희 다산북스/2021.1.21. sanbaram
옛날에는 글자를 해독하는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평민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특권층에서는 일반인들이 글자를 해독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무지한 상태에서 특권층의 도구로 전락되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종교인들이 일반인들을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모두 금지 시켰다. <금지된 지식>에서는 지식을 금지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수많은 부질없는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퀼른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켈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에 과학사학자로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해 콘스탄츠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가르쳤다. <만하이 포룸>의 발행인이며, 저서로 <인간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비롯해 70권의 책을 썼다.
지식이란 인간이 관찰 감각을 통해 모으고 시각적 인지를 통해 인식한 경험적 재료를 개념이나 생각과 연결한 다음, 이 연결을 자신의 관점으로 표현하여 외부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 <금지된 지식>에서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낙원에서 금지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 비밀을 다루는 법,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 등 앞부분에서는 주로 종교적으로 금지 시켰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봉인을 떼라 에서는 생물학 중에서 분자유전학에서 다루고 있는 DNA의 연구에 따른 문제를 짚어본다. 마지막으로 지식사회의 사생활과 비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창세기의 설명은 악이 이미 원죄 이전에, 심지어 낙원에도 있었다고 가정한다. 비록 아담은 홀로 선악과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담이 하느님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악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실제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행동이 나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p.32)” 신의 금지명령을 어긴 뒤 아담과 이브의 눈이 열렸을 때, 실제로 중요했던 건 성 또는 성과 관련된 욕망이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성서가 전해주는 바와 달리 나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즉, 다른 성을 본 것이 주제가 아니다. 다른 성을 봄으로써 당연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성적 욕망이 중요했고, 아담과 이브가 획득한 금지된 지식은 실제로는 금지된 사랑을 가리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에서는 처음으로 외국과 외국 지배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 진행되었다. 그밖에도 스파이 활동은 고대 중국이나 고대 인도와 같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있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금지된 정보의 수집 방법을 다룬 책도 등장하였는데 기원전 500년 경에 살았던 중국의 손무가 쓴 <손자병법>이 대표 사례다.(p.130)” 뉴턴은 자신의 지식이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한 지식인 무리에게만 접근을 허락했다는 말이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보통 ‘비밀’로 알고 있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비밀 직식들이 있다.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 장미십자회, 다양한 신비주의 분파들과 많은 비밀 조직들, 그리고 신지학 단체 등 각 조직과 사상마다 책 한 권씩은 필요할 것이다. 뉴턴은 자기 원고의 많은 부분을 비밀 언어로 작성했으며, 오늘날까지 누구도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 게놈에는 30억 개의 구성요소가 있다. 각각의 구성 요소는 알파벳 철자의 나열로 표기된다. 여기서 하나의 텍스트, 즉 유전자 언어로 만들어진 생명의 텍스트가 나온다. 인간은 이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없는데, 각각의 구성요소는 4개의 철자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A. T, G, C라는 4개의 글자가 DNA의 30억 개 사슬에서 서로 번갈아 나오며, 이 4개의 철자는 각각의 화학적 명칭 즉 아데닌, 티민, 구아닌, 사이토신의 첫 글자들이다.(p.237)” 자신의 게놈을 탐구한 사람은 수백 년 동안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크는 자기 탐구의 모험이 끝난 후 원했던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정보들로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다. 이 정보들은 수백만 년 동안 유기체 수백억 개를 거쳐 마침내 나에게 맡겨졌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다양성은 자연의 진화가 생산하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존중받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의 다양성을 신봉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꿈꾸는 미래의 전망이 완벽할수록 그곳에 살아가는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영리함도 서로서로 더욱 닮아갔다.(p.254)” 과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개인적 인간들만 주목받을 수 있다. 세포 분자생물학은 존재하지만, 사회분자생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전공학자들이 인간의 유전물질 개선책을 알고 싶을 때 마르크스주의나 다른 이상주의자로부터 배울 수는 없다.
“가톨릭의 전설의 금지 텍스트 목록인 ‘금서 목록’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줄여서 ‘인덱스’라고 부르는 이 금서 목록은 1559년에 처음 작성되었고, 그 후 수백 년에 걸쳐 6,000개의 제목이 수록되었다. 목록이 6,000개에 도달하던 1962년에 로마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6년에 책 읽는 신앙인, 혹은 신앙심 깊은 독서가들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감독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p.263)” 당연히 가톨릭교회는 이 금서 목록 때문에 큰 손해를 자초했고, 목록에 오른 책들은 큰 신뢰를 얻으면서 나중에는 세게 고전문학을로 상승하였다. 블레즈 파스칼, 장자크 루소, 하인리히 하니네, 그레이엄 그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 목록에 오른 작가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2천 년 전 타키투스도 생각했고 역사가 함께 증명해주듯이, 탄압은 박해받는 이들의 권위만 키울 뿐이다. 반면 탄압하는 지배자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검열관은 짧은 기간 동안만 성공한 것처럼 보이며, 긴 관점에서 보면 단지 우스운 인물로 남을 뿐이다.
“이전 세대는 개인 생활과 여기서 느끼는 감정을 일기장에 털어놓고 일기 작성자는 여기서 자신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었던 반면, 오늘날 세대는 인터넷을 발견했으며, 여기서는 사적인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버린다. 쇼셜네트워크인 페이스북에서는 이를 ‘공유’라고 부른다.(p.347)”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때에만 혼자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혼자 있을 권리에 따른 의무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스마트폰 세대에게 이 지식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느냐이다. 아마도 이 세대는 다음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더는 어떤 방에도 혼자 앉아 있지 않고 그 방에서 환상을 펼치지도 못한다. 대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새장에 갇혀 있다. 그 새장은 자유의지를 더는 허락하지 않으며 우리를 감시하고 조작한다. 이 현실을 모르게 하는 일이 금지되어야 한다. p.356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 이 주장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인상적인 사례는 페이스북과 생물 유전학이다.(p.364)” 페이스북을 먼저 살펴보자. 첫 번째, 우선 페이스북의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이 가져오는 정보들은 예전에는 자신을 위해 간직하며 외부의 (거의) 모든 시선에서 차단되어 있었던 정보들이다. 두 번째, 사용자들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기계 앞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이용자들은 금지된 어떤 일을 한다는 데 엄청나게 매력을 느낀다. 다음으로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많은 관찰자들은 오늘날 생의학에 질문을 제기한다. 최근에 시작된 유전물질에 대한 방대한 연구 덕분에 언젠가는 인간에게 공급할 수 있는 완전한 유전자의 형태를 알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은 어떤가? 유전학의 제자들은 지혜를 몰래 빼낼 수 있는 스승은 없지만, 어느 날 유출된 시디롬 혹은 디스켓을 얻는다. 그 안에는 실제 금지된 지식에 속하는 인간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p.365 아마도 오늘날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유전자 편집’을 지시했을 것이다. 비록 최근에 처음으로 경고 알림들도 나왔고 게놈을 과도하게 수정하면 암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기술적으로 니체의 바람은 실현 가능해 보인다. 이 인간 실험에서는 지식에 대한 타고난 인간적 욕구가 없는 유기체가 생성될 것이다. 이런 존재는 더는 인간적인 삶을 꾸려가지 못한 채 누군가 자신을 끌어주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지식은 계속해서 더 많은 기쁨을 주며, 그 즐거움은 그곳에서 금지된 것과 함께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권력도 지식을 금지시켜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듯싶다. 많은 사람이 함께 읽어 진정한 지식의 자유를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스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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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던가 옷장에 걸려있던 넥타이를 몽땅 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신혼 때 매던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넥타이의 유행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면서 돌고 돌더라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최근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언젠가 사라졌던 적폐가 슬며시 돌아와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적폐를 몰아내겠다는 분들이 새로운 적폐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듯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집살이 모질게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되면 새 며느리에게 더하더라는 우리네 옛말도 있습니다.
‘금지하다’라는 부정적인 단어는 ‘소수의 특정 집단만이 앎을 공유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한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금지하는 것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여 시간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듯하다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과학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쓴 <금지된 지식>은 앎을 금지하던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았습니다. 『논어』의 「학이」편은 학이시습지 불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로 시작합니다. ‘배우고 그것을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새깁니다. 사람이라면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앎을 금지한다는 것은 앎을 독점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일 터이니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에서는 앎을 금지한 첫 번째 주체가 바로 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금단의 사과를 먹지 말라는 영을 아담과 이브에게 내렸던 것입니다. 먹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으니 금단의 사과에 대한 앎을 독점한 셈입니다. 신의 이런 독특한 점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특히 교리에 어긋나는 사실 혹은 앎은 철저하게 감추려 노력했습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금단의 영역을 개방한 삼인방으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찰스 다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들었습니다. 지식사의 큰 흐름에서 격랑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나 다윈은 분명 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프로이트가 그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인가에 대하여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듯합니다. 다만 젝 관심을 두고 있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해석에서 도움이 될만한 관점을 챙기는 정도에 만족하려 합니다.
저자는 지식이 주는 기쁨에 대하여 논어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언급합니다. 신으로부터 지식을 금하는 법을 배웠던 인간들이 개화되어가면서 앎을 나누는 범위가 확대되어오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앎을 봉인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을 깨우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은 낙원에서 금지된 것,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 비밀을 다루는 법,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 과감하게 봉인을 떼다, 지식사회이 사생활과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이어 설명합니다. 종교계에서 금지해야만 했던 앎은 무엇이었고, 왜 그랬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과학이 발전해옴에 따라서 사람들의 앎의 폭은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알리고 싶지 않은 대목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국가적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인간이 신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저자는 과학과 신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금지된 지식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정리해냈습니다. 혹자는 과학의 발전이 무서울 정도의 지경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제동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물의 원리를 깨우쳐온 과학이 넘어서서는 안되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적절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