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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인물이 나서, 무엇을 하다가, 언제 죽었다 하는 자료를 수집해서 펼쳐놓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전은 책을 쓴 저자의 의도가 다분히 묻어있기 마련이다. 저자가 어떻게 그 인물을 보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인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평전이란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쓴 '신병주' 교수는 이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그러니깐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인데, 기록과 평가 사이에서 행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미래를 전망하는, 그래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강이라고도 했다. 그 때문에 뜻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료를 수집하는 단계에서부터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것마저 저자의 재량인데 객관성 갖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평전은 어렵다.
<사화의 시대, 성리학적 이상을 꿈꾼 개혁가의 비상과 추락>이라는 소제목을 곁들였다. 순서대로 책은 전개가 된다. 조광조 궤적에서 사화는 뺄 수 없는 키워드이다. 조광조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의 연산군 폭정의 시대를 겪었으며 본인 또한 '기묘사화'의 대표적 희생자가 된 인물이다. 저자는 '사화'에 대한 설명을 첫 시작 페이지로 담았는데 이것이 이 책의 중심줄기인 듯하다. 사화 즉,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조선 전기 보수 훈구파는 가해자이며 새로운 진보 세력인 사림파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깔려있으며, 이것은 조선 정치 세력이 권력 투쟁만 일삼았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일제 식민사관의 과장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이 있다. 최근에는 용어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로써 이 책이 중심이 잡혀있다. 즉, 보수 훈구파와 진보 사림파 사이 정치 권력의 암투의 희생자로 조광조를 평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견해가 보이는 부분이었다.
중종이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했고 조광조 역시 중종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꿨다.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낸 훈구대신들에게 굽신거리기까지 했던 중종은 강한 왕권을 세워야 했다. 이런 그의 눈에 든 인물이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조광조였다. 초고속 승진으로 조광조를 파격 기용을 하며 점점 훈구대신의 그늘에서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던 중, 이제 이 조광조 아니 성리학의 이념이 왕권을 위협한다는 생각에 이른 중종이었다. 반면 조광조는 어떤 인물인가. 철저히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된 도덕적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성리학의 천재에 주변에 타협하지 않는 대쪽같은 인물.
조광조는 군주 독재의 위험성을 알았기에 성리학적 이념으로 국가를 세워 군주 또한 이 이념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성리학적 이념. 그는 도덕적으로도, 이치에서도 선명성을 가진 완벽한 군주의 주도하에 이 이념이 백성들의 삶에 뿌리내린 이상사회를 꿈꿨다. 국왕과 신하와의 경연, 소격서 혁파, 현량과 설치, 짝퉁 정국공신 개정 등을 추진했던 조광조의 뜻은 성리학적 이념 아래에 왕과 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간 훈구대신들에게 휘둘렸던 중종은 조광조에게만큼은 나약한 왕이 되지 않았다. 중종은 개정 정국공신 발표 4일 만에 전격적으로 반대 세력을 이용해 조광조를 기습하기에 이른다.
조광조의 궤적을 따라가는 책이지만, '기묘사화'에서 책은 멈추지 않고 다시 조광조를 기리는 역사와 그를 따르는 인물까지 이어진다. 그의 복권과 분묘 종사, 그리고 여러 서원. 후대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이 사림파의 정통이라고 하면서도 아직 학문이 무르익지 않았던 그와 나라의 환경에 너무 급진한 개혁의 시도였음을 평가하였다. 여기까지 저자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광조를 보여주고 있다. '중종과의 불편한 동거'를, 그리고 중종의 두얼굴을.
성리학의 이념, 성리학의 이상사회가 도대체 무엇일까. 책을 마치고 마음이 조금은 불편하였다. 구분과 바른 이치.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대국과 오랑캐, 양반과 양민, 그리고 상위개념과 하위개념, 그리고 자기 수양. 조광조는 스스로가 이치에 곧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하였기에, 또 이런 사림파의 주도하에 모든 백성이 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꿨을지 모른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본격적인 사림파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부터 후기 조선 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보급했던 향약과 소학은 더 강화된 위계질서와 반상의 구분이 되어 지배이념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그를 비롯한 성인들을 기리고 지방 교육을 담당했던 전국의 서원들이 급기야 탈세와 수탈의 본거지가 되었다. 성리학적 도덕은 사라지고 성리학적 질서과 지배가 날로 더해져 백성은 더욱 힘이든 조선 사회가 되었다.
조광조는 당시에 개혁가였다. 그러나 그와 그들만의 개혁이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백성이 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을지는 몰라도 사림이 정권을 잡은 이후, 조선 백성은 더 피폐해졌다는 것.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이다"(237쪽 마지막 줄) 라며 끝을 맺었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은 결국 변화와 개혁은 아래로부터, 백성으로부터, 민중으로부터 나지 않는 개혁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까운 역사다.
한겨레출판사는 조광조를 비롯한 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였다 한다. 다른 인물들도 시리즈로 나오나 보다. 연구소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한다. 이런 옛 인물들을 평한 평전은 시대마다 계속 쓰여야 한다고 본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쓰이는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여기저기 이것도 저것도 개혁이 마구 쏟아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조광조의 궤적을 다시 헤아려봐야 하는 이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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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의 시대였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의 기치를 들고 건국됐지만, 계유정난이 보여주듯 실제로는 성리학의 이상이 작동하지 않았다.폭군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고,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 시대적 요구로 떠오른 상황에서 조광조가 역사 속에 등장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을 두려워했던 훈구파와 중종은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했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