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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by 이산하)
"악의 평범성 (by 이산하)" 내용보기
사실 특정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글들은 대체로 피하는 편이다. 이 시집을 구입할지 여부를 한동안 고민했던 것도 같은 이유인데 이문재 시인의 발문을 보고 구입하게 됐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이 발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한라산』이란 시집을 낸 걸로 알고 있어서 제
"악의 평범성 (by 이산하)" 내용보기

사실 특정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글들은 대체로 피하는 편이다.
이 시집을 구입할지 여부를 한동안 고민했던 것도 같은 이유인데
이문재 시인의 발문을 보고 구입하게 됐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이 발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한라산』이란 시집을 낸 걸로 알고 있어서 제주 출신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고, 나이도 생각보단 많이 않다. (나는 황석영 정도의 나이를 예상했었다.)
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를 번역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프리모 레비의 시집과 체 게바라의 시집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한데, 이 지점에서도 이산하 시인의 지점이 명백히 보인다.

 

시들을 읽기 전에 차례에서 시들의 제목을 먼저 훑었다. 제목들만 봐도 대충은 어떤 내용의 시들이 담겨 있을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 엥겔스, 항소이유서, 아우슈비츠, 고무신, 노란 넥타이, 동백꽃, 추모, 유배지, 국가기밀 등이 눈에 띄었다.
참고로 이 시집의 표제작인 '악의 평범성'이라는 시는 3부에 총 세 편이 실렸다.
서시 없이 곧바로 시들로 들어가고, 대신 권말에 시인의 말이 실려 있다.

 

이 시집의 첫 시는 「지옥의 묵시록」.

첫 시에서는 발터 벤야민과 니체를 호명한다. 그들은 울고 있다. 시인은 그들을 호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

시집의 첫 시가 서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이 시집의 성격은 이렇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이문재 시인의 발문을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사용했던 '악의 평범성'이란 이 용어는 조금 과장하자면 이젠 삼척동자들도 다 알만큼 너무 흔한 말이 되어 버렸다.
이 용어를 대놓고 시에 그리고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 시집을 읽기가 망설여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흔해져서 원래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해야 할까. 이젠 실효성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사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인들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비난을 받고 욕을 먹었다. 그것도 아주 엄청. 시달릴 정도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맨 처음 한나 아렌트가 토로하는 부분도 이런 지점이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처럼, 우리는 종종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미 상정해두고, 마음껏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데, 사실 진영의 논리에 갇히면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고, 자기 반성이나 자기 성찰에는 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냉철한 인식, 한나 아렌트가 그랬던 것처럼 학자와 같은 냉정한 이성과 객관성으로 눈앞의 사건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요즘 진보연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역시 그런 부분이다.

 

그러나 시들을 읽다 보면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어 진다. 

이산하라는 시인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이라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다 보면 그의 전 생애를 알 수 있게 되는데, 20대에 쓴 시로 옥고를 치른 시인은(그 때 쓴 그의 시들이 워낙 과격(?)해서 진보쪽 문인들도 구명할 엄두를 못 냈단다. 그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애쓴 인물이 바로 수전 손택이라고.) 평생 '극좌'로 세상에서 유배되었었기 때문이다.
무려 30년 동안의 세월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시대와 평생 불화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시집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많은 생각들이 부유한 채 이 시집을 읽었다. 우리가 통과한 한 시대에 조문하는 마음이기도 했던 것 같다.

시인은 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데, 그가 살아온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그러했다는 의미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찍는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겠다는 결의가 도끼날만큼 생생하게 빛이 난다.

 

시인이여, 건필하시라.


 

s*****n 2021.05.22. 신고 공감 8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