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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이름은 들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다. 러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망설이다가 이 책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택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철학보다 과학에 관한 책이 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서였다. 책을 읽고 난 지금에는 차라리 에세이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에세이마저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그저 마음으로 해보는 생각이다. 그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셀은 187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1970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화운동에 온 힘을 쏟은 사회정치활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그는 수학자, 철학자, 사회비평가로 활동했으며, 195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셀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끼쳤다고 알려진 이 책은, 1935년 처음 출간된 이래 스무 차례도 넘게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생전에는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일 게다.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늦게나마 읽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서 러셀이 강조한 것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고 이 책의 서문을 쓴 마이클 루스 교수는 이야기한다. 아니나 다를까 러셀은 먼저 세계를 이해하려는 두 가지 시도로 종교와 과학을 들고, 그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지적원천을 종교의 교리라고 말하는 그는, 과학적 이론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이론과 달리 영원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구현할 것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즉 과학이 관찰이라는 수단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개별적인 사실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법칙을 찾아내려는 시도라면, 종교는 도덕률뿐만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것들에 관한 주장들과 결부된 복잡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종교에 회의를 가졌다는 러셀은 중세의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을 권위와 관찰사이의 갈등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했다. 이를 두고 마이클 루스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입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러셀은 종교와 과학이 실재에 대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체계이고,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갈등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말한다.
진정 훌륭한 것은 근거 없는 믿음과 결부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러셀은, 이 책에서 종교가 어떻게 물리학과 생물학자들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작으로 의학, 영혼, 결정론과 자유의지, 신비주의, 우주적 목적, 과학과 윤리 같은 철학적 문제들로 논의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는 오늘날 우리가 태양계라 부르는 것의 중심이 지구인지 태양인지를 놓고 벌어진 천문학적 논쟁이었다고 한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모든 것이 창조주가 의도한 그대로 완벽하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단은,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새로운 우주관을 내놓을 때마다 이단으로 낙인찍을 근거를 찾기에 바빴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타격을 받은 신학은 고고학과 생물학에서 우리가 살아온 지구를 탐색하고 생명의 탄생을 추적하자 진보가 우주의 법칙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학은 ‘신이 본격적인 입법자로 등장해 세계를 창조했고 자신이 앞으로 전혀 개입할 필요 없이 모든 사건을 결정짓는 규칙을 만들어냈다’는 특유의 신앙으로 돌파하고자 했으나, 다윈주의는 종의 고정성을 비롯해 <창세기>가 주장하는 많은 창조행위를 버리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의학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의 개입은 학문을 넘어 정치적인 영역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산아제한이나 낙태와 같은 문제는 아직까지도 정치적 갈등으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과학으로서의 독립을 얻기 위해 의학이 벌인 전투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러셀은 이를 두고 ‘신학적 교리의 유용성을 믿는 사람들도, 과학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유익함에 필적할 만한 것을 교리에서 찾기는 힘들 것이다.’(122쪽)라고 말한다. 이처럼 러셀은 과학이 맹신에 질문을 던지면서 세상을 과학을 매개로 이해하려 도전해온 과학의 역사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종교적 권위를 처음에는 교회에서 찾았으나 이어 성경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개인의 영혼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제는 신, 영혼불멸, 자유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과학이 이것들을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지만, 과학이 아닌 다른 방법들 역시 마찬가지라며 ‘과학은 지각과 추론에 의존한다. 과학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관찰자라도 지각된 것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189쪽)고 못 박는다. 그리고 ‘나는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과학적 방법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에서 종교가 생겨나는 그러한 경험의 가치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경험은 잘못된 믿음과 결합되어 선뿐만 아니라 많은 악을 낳는다. 이런 결합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오직 선한 것만이 남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199쪽)라고 종교의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한다. 그는 또 우주가 존재하는데 어떤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신학은 세계가 지금까지와 같은 방향으로 계속 진화할 것이고, 이미 일어난 일은 우주의 선한 의도가 표현된 것이라 주장하며 인간이 우주적 목적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냉소한다. 또한 윤리학의 모든 체계는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구체화 하지만, 그런 사실은 가려져 있다고 말한다. 과학이 가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지라도, 윤리학에 과학이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진리가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치의 문제들은 지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진위의 영역 바깥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결정할 수 없지만, 모든 지식은 과학을 통해서만 얻어져야 하고, 과학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셀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우려를 표한다. 과학정신보다 과학기술이 더 영향력을 미치고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해왔고 인류가 일궈낸 가장 큰 성과물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새로운 진리는 때로는 불편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물든 기나긴 역사 속에서 지적이고 총명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우리 인류가 일궈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262쪽)라고 말하며 책을 맺는다.
러셀을 처음 읽으면서 나는 과학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한 책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러셀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과학사라 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도 종교와 과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에, 과학이 종교적 맹신과 편견을 하나씩 하나씩 부숴나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것 같다. 러셀에 대해 알아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읽은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각대로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러셀의 다음 책을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어느 책을 먼저 읽을지 생각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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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를 빠르게 올리게 되는 책이네요. 막내가 한 살 더 먹으면서 주말 시간도 오롯이 책에 빠져있기 눈치 보입니다. 잠을 줄인 새벽 시간 외엔 책 놀이와 블롴 놀이에 맘 편히 할 수 없네요. 읽고픈 욕심 때문에 언제나 독후기는 다음이고 우선 책 한 권을 마치고 나면 얼른 다른 책을 손에 쥡니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친지 이 틀 만에 독후기를 쓸 요량으로 이렇게 앉았습니다. 그만큼 제게 강렬했던 책일까요.
우선, 1935년에 러셀이 쓴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여차례 재판되는 책입니다. 수많은 저작 활동을 했던 러셀이었고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러셀이었습니다. 실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이해가 되는데 말이죠. 그의 많은 책 중에서 노벨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책이 이 책이라고 평가하네요. 이런 배경이 제게 한몫을 차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마친 지금의 느낌은 한마디로 '대단'입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지만 전혀 낡은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새롭습니다. 대단합니다. 이 책은.
책에서 과학의 과거와 현재의 발전상, 나아가 미래의 통찰을 러셀은 담았습니다. 과거니깐 당연히 종교와의 대립이 있겠죠. 맞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 1.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아야 했고, 일식과 월식 해성은 신의 징표여야 했던 천문학, 악마와 마법으로 환자를 고문했던 의학,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어야 했던 지질학, 인간을 비롯한 각종 생물은 신이 작품이어야 했던 생물학. 검증과 증거로 확인된 과학적 진리들. 종교에 갇히고 그리고 그 탄압을 겪으면서도 한 단계 한 단계 나갔던 과학을 러셀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2. 영혼, 육체, 예외, 신비주의, 우주, 법칙 등 조금은 철학적인 문장들로 러셀은 과학의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책의 끝에 3. 러셀은 과학의 윤리와 이뤄낸 성과, 그리고 나아갈 미래를 담았습니다.
총균쇠,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코스모스, 사피엔스로 대표되는 과학 분야의 인류사를 다룬 책들을 나름 읽었던 저는, 솔직히 이 작은 책이 오히려 더 깊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첫 장 「종교와 과학」도 정말 좋았지만, 제일 마지막 러셀의 결론이 이 책의 백미였습니다. 외국은 다르지만, 한국의 지식계가 러셀의 철학과 사상을 더 높여보지 않음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살면서 뒤늦게 러셀을 알게 된 저부터요. 책의 마지막 중 일부를 올리고 노트북을 덮겠습니다. 독후기에 제 생각을 많이 넣지만, 딱히 더 넣을 게 없습니다. 참, 이 책으로 혹시나 개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조심하라고 서문을 쓴 사람이 말하네요.^^ 어느 책에서 러셀은 죽어서 신이 있어 신 앞에 선다면 이렇게 말했다지요. " 신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하겠다" (이제 독후기는 높임말로 써야겠습니다. 훨씬 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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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정도 되었을 무렵에 대학을 다니던 사촌 형과 종교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나와 누나가 한 편이 되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예비하심에 대해서 떠들어 댔고, 무신론자였던 형은 반대편에서 나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며, 여러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답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기독교가 없던 시절의 역사적 위인이었던 유관순이나 이순신은 죽어서 천국에 갔느냐고 물었다. 종교인으로서의 모범 답안은 지옥에 갔다는 게 정답이었고, 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오른 편 자리는 현세의 삶과 상관없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 인간은 그저 주님을 믿고 찬양해야 한다.
좀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답변이 있는데, 그건 바로 '하나님만이 아신다.'였다. '왜 나쁜 사람들이 벌받지 않는가?, 하나님은 왜 가난하게 굶어죽는 어린아이를 구제하지 않는가?, 왜 전쟁과 학살은 끊이지 않는가?'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내 머릿속에 있을 리 없었다.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배웠다.
종교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처럼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이다. 그때 나는 종교적으로 매우 신실했다. 제대로 사촌 형을 논쟁에서 이겨내지 못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억울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믿고 따랐던 교회 전도사님이었다면 사촌 형의 억지 주장을 한방에 꺾어주리라고 믿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에 다녔던 교회 전도사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버트런드 러셀은 종교와 과학의 4백 년이 넘는 싸움에서 대부분의 논쟁에서는 과학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관찰과 증명에 의해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어릴 적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종교적 영향력에서 평생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온전한 이성과 합리적 판단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빼앗긴 채 자라나는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간해서 그 관점을 되돌리기 쉽지 않다. 중세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를 핍박하고 브루노를 화형에까지 처했던 자들이 그랬다. 과학적 사고는 내가 반드시 옳지는 않으며,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항상 열려있는 태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진실은 여러 다른 의견이 부딪히고 깎여가는 과정을 통해서 더 단단해진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이 과거의 거짓 믿음을 몰아낸다. 인간은 과거의 것을 고수하려는 본능이 있다. 기존에 가져왔던 생각은 경험과 학습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으며 진화적으로도 훨씬 생존에 유리하다. 새로운 것은 불편하고 감내할게 많다. 특히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기득권에게는 그렇다.
본능과 환경이 힘을 발휘하는 '결정적 시기'에 이미 한 사람의 대략적 인생행로가 정해지지만, 이상하게도 인간에게는 그게 다가 아니다. 어느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엎고 전복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인간은 과학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진실을 탐구한다. 그래서 때로는 인생의 어느 순간 종교나, 신념이나 오래된 믿음도 바뀌고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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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적거리다가 이전에 <종교과 과학>이 새로 개정되었다는걸 알게됐습니다. 보자마자 샀어요. 이전 책은 번역이 엉망이라 개정판이 정말 반가웠습니다. 러셀옹의 알게하고자하는 섬세한 마음씀씀이가 느껴지는 저서고요 다양한 역사의 사례를 함께 접하며 논거를 따라갈 수 있어서 쉽고 재미있습니다. 뒤적거리다가 이전에 <종교과 과학>이 새로 개정되었다는걸 알게됐습니다. 보자마자 샀어요. 이전 책은 번역이 엉망이라 개정판이 정말 반가웠습니다. 러셀옹의 알게하고자하는 섬세한 마음씀씀이가 느껴지는 저서고요 다양한 역사의 사례를 함께 접하며 논거를 따라갈 수 있어서 쉽고 재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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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단 도서로 읽는 책과 내 의지로 마감을 정해서 읽는 책의 차이는? 서평단 책이 좋을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재미있게, 고맙게 읽고 즐거운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마감일에 쫓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꾸역꾸역 좋은 말만 쓰려니 고역이다. 내돈내산인 경우는 두 가지다. 마감일이 없기 때문에 읽는 순서에서 밀리는 경우와 마감일이나 토론 같은 조건이 있어서 그에 맞춰 읽는 경우다.
버트런드 러셀의 <과학이란 무엇인가>는 내돈내산 두 번째 경우다. 김민영 작가의 블로그에서 줌 독서토론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신청했다. 예전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쉽사리 시작하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그를 만나고 싶었다. 독후 토론이니까 꼼꼼하게 읽을 것 같았고 토론일이 지정되어 있으니 타율적 자발성으로 이끌 거라 생각했다. 일명 쪼이는 맛이랄까.
과학분야의 책을 거의 안 읽었기에 어려울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260여 쪽이면 내 읽기 속도로는 한 나절만에도 다 읽어낸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럴 수 없었다. 한 페이지, 아니 한 문단 읽고 소화하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한글인데 이해가 안 된다! 이러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래서야 토론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 그것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잡생각을 이렇게 많이 하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읽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였다.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앗,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있는 거다. 그러기를 얼마나 자주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 읽어냈다!!
오늘 밤 9시 반이 토론 시간인데 오후 5시쯤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멀미 증상이 나타났다. 음식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토론 참여의 부담감이 몸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기에 이래서는 참여가 어렵겠다 싶어 불참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블로그 신청 글에 들어가 줌링크 댓글을 보니, 이건 아니잖아... 처음에 이 책을 읽겠다는 의지는 어디다 팔아 넘긴거니? 이런 식으로 회피하면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고 9시 반이 되길 기다렸다.
모임은 정시에 시작되었고 참여자는 4명이었다. 책의 별점과 인상깊었던 부분을 이야기 하고나서 김민영 작가가 같이 얘기 나누고 싶다며 읽어주는 내용을 들으며 놀랐다. ‘의지’라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p.175
의지라는 개념이 모호하다? 나는 강박적으로 미리 순서를 정하고 그대로 행동하려 노력하며 의지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래서 오늘 모임에 참여한 건데? 러셀의 정의에 의하면 나는 정신병자인가... 러셀은, 자신은 의지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정신 현상이 생겨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 철학자는 어떤 태도로 연구를 하고 그토록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의지 없이 가능하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여러 과학 분야의 이론을 정리해주어 오래전에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분야를 넘나드는 지적 향연이 내 수준에는 과부하였지만 뿌듯함은 있었다. 또 평생 당연하게 여겼던 내 생각에 러셀은 커다란 돌을 던졌다. 러셀의 사고는 나 같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고른 인상깊었던 내용은 이 부분이다.
p.174
애들이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했던 질문이, “왜 그랬어?”였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며, 이유가 없을 리 없다고! 그런데 러셀은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단다. 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에 원인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앞으로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고 상대도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모르겠다, 없다, 라고 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보아야겠다.
러셀은 이 책에서 사제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오류를 하나하나 깨나가는데 그것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어려웠지만 쉬운 부분도 있다. 종교의 주장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로 모였다. 사제들의 기득권 지키기와 나아가 돈 때문이라는 것!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억지 논리도 불사하고 성서의 내용을 멋대로 해석한다. 가장 기막힌 건 의학에서 마취에 대한 내용이었다.
p.119
자신들은 절대 겪어볼 일 없는 고통에 대해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니 어떤 페미니스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남자들이 출산을 했다면 고통스럽게 출산하지 않는 방법이 진즉에 나왔을 거라던 말!
이 책을 읽으며 또 놀란 건 전혀 시간차를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935년에 출간된 책인데도 말이다. 당시 러셀이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것이 놀랍다. 이 책을 읽는 간 어려웠지만 뿌듯함은 크다. 러셀의 저작 읽기에 발을 들였으니 다음 책으로 얼른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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