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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의 중화
“현대 중국의 정치사상가가 응답해야 하는 도전과 조건은 무엇인가? 지구촌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과 동학들은 국경 안에 국한되지 않고 갈수록 국경을 넘고 있다. 국경에 기반한 정치 형태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국경을 넘는 정치 행위의 중요성 또한 날로 커져가고 있다. 지구화 시대라는 이 역사의 새로운 단계는 정치 행위자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위협과 기회를 선사한다. 바야흐로 중국이 새로운 제국을 자임하면서 세계질서를 주도하려 드는 마당에,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국의 정치사상 전통을 소환하려 하는 작금에, 이른바 중국정치사상의 ‘역사적’ 이해는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755~757쪽)
중국정치사상사를 이해하려는 것은 중국인들이 어떻게 역사적인 도전에 응전을 하였고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려고 노력했느냐 하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냐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믿는다. 중국이 중화를 실질적인 개념으로 사용했던 아니면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이었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조에게는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개척했던 중요한 개념이었겠지만 이것이 중국 내에 본질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변화하는 외부 환경의 제약과 기회에 대한 일련의 창의적인 반응이 누적된” 것이 전통이라면 “전통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흥미로운 대상이다.” “사상이 현대의 문제에 대해 어떤 적실성을 띤 나머지 흥미롭다기보다는, 그 사상의 담지자들이 그 전통 ‘안’에서 계속 의미를 창조하고 실현하기에 흥미로운 것”이라며 저자는 창의적인 사상의 담지자들에게 흥미를 가진다.
중국의 정치사상이 이토록 흥미로울 정도라면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외부 환경의 제약과 기회에 대한 일련의 창의적인 반응은 더욱 흥미로울 텐데, 그런 것이 있긴 한가 의문과 함께 좌절감이 든다. 미국의 힘과 중국의 힘이 부딪히고,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를 꿈꾸는 우익세력들과 미국의 협조에 의해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으며, 북한은 정권의 생존전략을 핵무기에 의존하여 대화를 포기한 듯한 미국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발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와중에 남한과는 극한 대립을 보이는 양상이다. 우리 정부는 친미 친일의 선명한 외교노선만을 강조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며 그 결과 국민들을 어떤 상태로 밀어 넣을지 상상하기에도 끔찍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우크라이나다. 천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국경밖에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린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운명을 타국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해야만 하고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도 없는 것 같다. 대가는 국민들의 피다. 우리 국민이 피를 흘리지 않고, 근대사의 치욕과 굴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검사들이 나라의 좋은 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라 시끄러운 소식을 전하는 '신문쪼가리'나 '방송국놈들'의 소식에는 “창의적인 반응” 소식은 약에 쓰려고 해도 하나 없다. 지식인의 창의성은 본래 없었던가 아니면 언론이 숨기고 있는 것인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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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 청나라
“과거의 연구들은 청나라가 명나라의 표준적인 행태를 지속했다는 전제 아래 청나라를 독재적이고, 관료적이며, 잘 통합된 강력한 국가로 종종 이해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한 이해를 재고해야만 한다. 일단 17세기 후반까지 옛 명나라 장수 3인에게 분봉된 영지가 존재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이민족 통치는 만주 통치 엘리트와 한족 엘리트 간에 균열을 가져왔고, 그 균열은 갈수록 확산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일대에서 토지 몰수 및 분배를 시도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기존 소유권을 존중해 한족 지주들이 반란 과정에서 상실했던 소유권을 다시 찾도록 해주었다. 요컨대 통일제국 청나라의 정치질서는 다민족 간 타협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었고, 만약 그들이 배신한다면 청나라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백련교도의 난(1794~1804), 아편전쟁(1840~1842),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을 상대해야 했을 때, 그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벗어난 이후 제국은 한층 더 분권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는 일본 및 다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경쟁해야만 했고, 결국 계속되는 외국의 도전에 무력한 존재로 판명되었다. 청나라는 여러 조약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들에 치욕적인 양보를 했고, 결국에는 군벌들이 통치하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해되어갔다.(624~628쪽)
보다 넓은 맥락에서의 중국
“중국의 정치사를 관통하는 단일한 이데올로기를 찾는 데 열심인 사람은 그 이데올로기에 조응하는 단일한 통일 중국이 꾸준히 존재해왔다고 믿기 쉽다. 오랜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이 ‘전제국가’라 생각하고, 그 점에서 중국을 다른 세계 여러 나라와 대비하기를 즐기는 것은 중국 학자들만이 아니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나는 동질적으로 통일된, 단일한, 전제주의적 중국이라는 관념을 의문시하고, 중국정치사상을 그러한 중국을 꾸준히 지탱해온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본질주의적인 입장에 반대해왔다. 그러한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지탱하는 지리, 민족, 문화, 사상 간의 연결고리를 문제 삼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정치체 및 그 사상적 기초를 지탱해온 통일성이란 분절되고 갈등하는 다양한 요소 간의 깨지기 쉬운 복합적인 균형 상태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중국정치사상의 역사는 중국문화의 본질이 전개된 과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외부 환경의 제약과 기회에 대한 일련의 창의적인 반응이 누적된 전통이다. 전근대 제국에서 현대의 민족국가를 거쳐 현재의 중국 정치체에 이르기까지 변천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정치 행위자와 사상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 수많은 고려와 타협을 해야 했고, 중국은 자신보다 훨씬 큰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 분투했다. 다시 말해 중국 정체성은 여전히 근현대 중국정치사상을 탐구하는 이들이 다루어야만 하는 근본 질문에 해당한다. (707~709쪽) 이후 책은 중국의 중심성, 중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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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혹은 정체? : 왕양명의 지행합일론
“마음속 이기적 욕심을 제거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다는 점에서 왕양명의 입장은 일견 ‘내재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떤 근거에서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이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외부 세계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왕양명은 마음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취지로 들릴 정도로 외부 세계를 다시 정의하였다. 마음과 세계의 관계를 왕양명처럼 재구성하면, 마음과 세계는 동연(同 延, coextensive)의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마음과 외부 세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세계는 마음의 작용이 향하는 곳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592~600쪽) (부실한 요약으로 인한 독서의 욕구가 생기시지 않나요?)
“이러한 왕양명의 기본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그 유명한 지행합일론을 검토해 보자. 우리에게 친숙한 도덕적 앎과 행위에 대한 전통적 입장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한다. 첫째, 우리는 상응하는 행위 없이(혹은 상응하는 행위 이전에) 도덕적 문제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다. 둘째, 앎이 곧 그에 해당하는 행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양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 부정이 왕양면의 지행합일론의 핵심을 이룬다. 왕양명에 따르면 첫째, 우리는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획득할 수 있다. (도덕적) 앎은 관련된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기 위해 추위, 배고픔, 아픔 같은 경험에 도덕적 앎의 획득을 비유한다. 둘째, 앎이 멀쩡한데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즉 누군가 비도덕적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실천적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와 행을 합일하고자 시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와 행은 이미 합일되어 있으므로”(600~603쪽)
“왕양명의 지행합일론에서 말하는 ‘앎’이란 우리가 관습적으로 머리에 떠올리는 ‘지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앎’은 세계로부터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으로 처신/행동하는가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렇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으로 처신/행동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은 바로 우리를 왕양명의 독특한 철학적 인류학, 그중에서도 그의 유명한 ‘양지론’(良知論)으로 이끈다. 왕양명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적 행동에 대한 앎을 본디부터 가지고 있다. 그 앎을 바로 양지라고 부른다. 양지론은 왕양명이 도학의 기본 전제 중의 하나인 성선설을 극단까지 추구한 결과이다. 인간은 이미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 따르면 현실의 부도덕함은 인간의 도덕성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본래의 모습이 어떤 이질적인 요인(이기적 욕심)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언뜻 이상해 보이는 왕양명의 생각-우리는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획득할 수 있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앎의 본구성을 감안할 때, 앎의 ‘획득’에서 필요한 것은 그 앎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정보의 누적이나 추론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은 계기가 필요할 뿐이다. 왕양명에게 ‘행위’는 바로 그러한 방아쇠 역할을 한다.”(604~609쪽)
“이제 ‘행위’에 대해 살펴본다. 왕양명은 도덕적 행위에 대해 무엇이 옳은 행위라고 인식한 뒤 그러한 행위를 하고자 의욕을 가진 다음에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대한 진정한 인지는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그와 관련된 행위로 전환된다고 생각하였다.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왕양명 이론에서 ‘행위’란 우리가 관습적으로 염두에 두는 유의 ‘행동’과 그 함의가 일치하지 않는다. 왕양명에게 ‘행위’란 주어진 상황에 ‘부딪혀 반응함 responses’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행위’는 상식적으로 ‘행동’이라고 분류되지 않는 ‘생각함’ 같은 것도 포함하게 된다. 다시 말해 만약 어떤 상황에 부딪혀 반응하는 것으로서 누군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왕양명이 물(物)을 사(事)로서 간주하고, 사를 뜻이 닿는 곳이라고 한 바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 속의 실제 세계는 경험된 세계로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세계는 휴지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텅 빈 어떤 것이 아니라, 활성화되고 깨어 있는 어떤 것이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왕양명의 이러한 독특한 견해를 바탕으로 하면, 앞에서 제기되었던 왕양명의 지행합일론의 비상식적 요소들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앎’은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행위’로 이어진다.” (609~614쪽)
“세계 전체와 만나고 있는 도덕적 주체”, "바로 이 점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왕양명은 송대 이래 많은 도학자의 열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도학은 사대부 개인의 도덕을 통해 세계의 구원을 꿈꾸는 사유체계이다. 끝으로 왕양명이 성공적인 장군이기도 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장군 왕양명은 중국 남쪽 지역에서 일어난 이민족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바 있다. 일견 도덕적 통치의 자기 충족성을 믿었던 왕양명이 국가의 강제력 행사에 일조했다는 것은 모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장한 반란 세력의 존재 사실과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사 정벌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모두 당시 국가가 지방의 갈등을 조정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한다. 왕양명은 정벌 이후 해당 지역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향약에 의존했다. 향약은 인간 본성, 자기 충족적 공동체 생활을 하라는 도덕적 권고 같은 이슈에 대한 왕양명 특유의 견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처럼 왕양명을 권위주의, 독재체제, 전제국가의 이데올로그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왕양명 사상의 배경을 이룬 것은 통치력을 지방까지 충분히 확장할 능력이 없었던,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 즉 16세기 이후의 명나라였다." (616~6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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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 명나라
“몽골 통치의 말년은 엄청난 혼란과 많은 반란으로 얼룩졌다. 주원장은 원래 반란군의 일개 병사에 불과했으나 점차 신분이 상승하여 1368년에는 명나라를 창건하는 데 이른다. 그는 1127년 북송이 망한 뒤 240년 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족 통치자였다. 주원장은 중화와 이적의 이분법에 따라 노골적으로 몽골을 비방하고,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였다. 민족 구성, 영토 크기,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명나라는 앞선 원나라와 상당히 달랐다. 첫째, 여러 민족 간의 정치적 구별에 기초했던 원나라의 다민족 정책을 명시적으로 포기하였다. 둘째, 명나라 통치자들은 외국과 교류를 금지함으로써 바다를 통한 위협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한족 중국문화와 유목민 문화의 차이를 강조해온 도학을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명나라의 창건 비전이 민족, 공간, 문화의 세 측면에서 모두 협소하게 정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정치 환경에서 명나라 창건자 주원장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하였고, 그 권력을 피치자들을 통치하는데 여지없이 휘둘렀다. 따라서 많은 학자가 명나라야 말로 독재의 전형이며, 독재 또한 중국 정치의 항구적인 특징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505~511쪽)
시민사회 혹은 정체? : 대안적 접근, 대학의 팔조목
“국가와 사회를 영원한 갈등 관계에 매여 있는 이분화된 존재로 간주하는 근본적으로 양극적인 방식으로는 후기 중국 제국의 정치체를 제대로 개념화하기 어렵다. 국가 관료제와 외부 결사체의 관계, 그리고 국가와 친족 조직의 관계는 갈등 관계보다는 협조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후기 중국 제국은 지방질서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기존 사회적 힘들에 의존하며 통치에 임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성장한 끝에 국가가 위축되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그러한 의존 현상은 국가 기능의 보강이자 유포 작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료제 외부의 매우 다양한 조직이 준국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서양의 담론 전통에서 발전된 시민사회 개념을 사용해서 중국 후기 제국 시기의 결사체를 서둘러 개념화하는 대신 대안적인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 갈등에 기초한 국가-사회 모델을 폐기하고 친족 관계를 공적인 통치의 중요한 일부로 고려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후기 중국 제국의 질서를 이해할 대안적인 접근법을 ‘대학’의 팔조목(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찾을 수 있다.”(575~576쪽)
“그런데 팔조목의 정확한 성격은 그다지 명백하지 않다. 도식으로서의 팔조목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인간의 ‘자아 수양’과 그보다 훨씬 더 큰 사안인 ‘통치’ 사이에 연속성을 설정했다. 둘째, 팔조목은 독특한 총괄형 비전이다. 셋째, 팔조목은 천하를 모든 것이 포괄되는 조화로운 협동 구조로 본다. 요컨대 팔조목은 제국을 도덕적 유기체로 상상하는데 적절한 언어다. 팔조목이 일종의 정치 언어인 한, 정치 행위자들은 그 언어를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전유할 수 있다. 첫째, 군주를 위한 귀감서로서 하향식 유기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중국 황제에게 정체란 사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고립된 조각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통치술의 핵심은 구성원들을 조화와 믿음에 기초한 신뢰 공동체에 통합하는 것이다. 둘째, 보통 사람을 위한 귀감서라는 제목으로 왕양명의 정치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도학의 입장을 왕양명은 그 논리적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왕양명의 비전에서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다 성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성인인 이유는 사람이라면 모두 타고난 도덕 감각과 의지력을 통해 즉각적으로 자신을 윤리적인 인간으로 변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전 공부마저도 필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현실과 이상의 긴장에 근거를 둔 인간 세계의 규범성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 않았다. 마음의 본체와 ‘인심’(이기심에 의해 어두워진 나머지 원래 가지고 있는 도덕적 역량을 실현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간의 유일한 차이는 마음이 이기심에 의해 흐려져 있느냐 여부이다.”(576~5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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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천하 : 원 제국
“중국 역사에서 중화질서가 현실적으로 구현된 시간은 절반에 지나지 않으며, 특히 당나라의 쇠락 이후 명나라가 완전히 성립하기까지 약 500년간 중화질서는 환상에 불과하다. 우선, 당나라가 쇠망한 뒤 송나라가 성립하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이른바 5대10국이라 불리는 분열기가 존재했다. 분열기를 종식하고 성립한 송나라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 정치질서는 이전과 매우 다르다. 북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거란에 송은 매년 재물을 제공하였고, 남송은 여진에 신하의 예를 취하였다. 이렇게 볼 때 원나라가 성립하기까지 동아시아에는 다극체제가 존재하였거나, 혹은 매우 유동적인 힘의 균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원 왕조 시기에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중화사상이 기초하고 있던 문화적 탁월성과 지배력의 결합이라는 사고는 재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466~467쪽)
“야율초재는 과거 시험과 세금 수취를 제시하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몽골 통치자들은 문치체제를 수립하였다.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이와 같은 변화가 곧 야만적인 몽골족이 우월한 한족 문화에 압도된 결과라고 설명하곤 하지만, 몽골족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극대화하려 했다는 합리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몽골의 원나라는 유목민 종족 집단에서 정주형 관료 제국으로 변화를 겪었다. 무력에 의존한 지도자들은 그간 자신들의 정복 방식으로는 이미 정복된 제국 전체를 감독할 수 없다.”(467~468쪽)
“몽골족의 정복에 대해 두 가지 대조되는 송나라 황족의 반응이 있다. 조창운의 반응과 조맹부의 반응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체험에 바탕하여 독특한 예술품을 창작하였다. 조창운은 철두철미한 은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좌절을 표시하였다. 예술 말고는 딱히 관심을 보인 영역도 없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정치 환경에서 조창운이 취할 수 있었던 나름의 대응 방식이었다. 그의 작품은 ‘유신완조입천태산도’(한나라 때 유신과 완조가 천태산에 약초를 캐러 입산한 후의 전설을 묘사한 작품)이다. 또 한 명의 송나라 황족인 조맹부는 조창운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 1286년 조맹부가 몽골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기로 결정하자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다. 이에 조맹부는 공적인 실천과 개인적인 실존 사이에 낀 상황을 묘사하는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이양도’이다(二羊은 한나라 때 활동한 두 장군 소무와 이릉에 대한 일화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소무는 흉노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양치기로 살아간 반면, 이릉은 흉노의 신하로 봉사했다. 이양도에 그려진 양은 소무를, 염소는 이릉을 상징한다) 양은 조맹부가 관직을 맡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상징하고, 염소는 몽골족의 신하로 일할 때의 모습을 상징한다.”(474~483쪽)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왕소군은 “한서의 흉노열전, 금조, 서경잡기, 후한서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마치유는 ‘한궁추’에서 국제 관계가 사안의 핵심이 되게끔 왕소군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마치원은 왕소군이 조국을 떠나야 하는 것도 흉노와의 외교 관계 때문이며, 그 외교 문제를 해소하는 것도 다름 아닌 왕소군의 죽음 덕분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한궁추’에서는 한나라의 국력이 쇠약하여 왕소군이 불가피하게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나라와 흉노의 역학 관계는 한나라의 국력이 흉노보다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했던 실제 역사, 그리고 ‘한서’의 기록과 다르다. 게다가 그 왕소군이 양갓집 처녀에서 천민으로 바뀌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마치원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요약을 위해 술어를 추가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이 되면 이민족도 도덕적이 될 것이라는 중화질서의 관념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질서의 주체만 기존 지배층에서 피지배층으로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기존 국제 정치사상을 절묘하게 재전유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도덕적인 지배층 대 도덕적인 피지배층의 대조를 한껏 도드라지게 한 것이고 이민족은 지배층이 아니라 도덕적인 피지배층에 의해 교화된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화질서의 면면은 아주 다양하다. 중화질서가 전제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실체의 내용도 다양하고, 그 중화질서가 역사 속에서 각 주체들에 의해 변용되어온 모습 또한 다양하다. 때로 중화질서는 존재하는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지배의 정당성을 제고하는 데 불가결한 요건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한족의 우월적 위치가 상실된 정복 왕조 시기에도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자신의 지배 정당성을 보증한 논리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한족은 한족대로 저항의 논리로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488~50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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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공화국 : 남송
“1127년 남송의 성립은 새로운 왕조 창건보다 더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함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적어도 후한 시기부터 남쪽으로 계속 확장해왔지만 이 남송 시기야말로 중국이 남쪽으로 확장해온 역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한다. 이제 북쪽의 중원지역은 중국문화의 전형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남송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한번 엘리트 성분상 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남송 엘리트들은 거주지 및 혼인동맹이라는 점에서 볼 때 지방에서 활동한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방 활동으로의 전회의 중요한 배경은 재능 있는 개인의 수와 관직의 수 간의 불균형이었다. 관리 후보군과 관직 사이의 불균형은 남송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엘리트의 다수가 지방에서 활로를 찾는 현상은 왕조가 바뀌어도 꾸준히 이어졌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권위와는 상당히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며,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데올로기적 정당성과 정치적 권위를 창출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396~405쪽)
“중국 지성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당.송의 지적 변천은 그 무엇보다도 일단 불교의 쇠퇴, 그리고 지배적인 정치사상 조류로서 도학의 등장이다. 북송 때만 해도 생경하던 사고체계인 도학은 남송대에 이르자 엘리트들 사이에서 튼튼하게 뿌리내렸다. 이론상 도학은 왕안석이 제시한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정치적 주체성을 제시하였다. 모든 사상은 새로운 이론적 문제들을 배태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책임을 일견 좁아 보이는 자아의 제한된 영역 안으로 밀어넣고 나자 도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적 문제에 봉착하였다. 즉, 개인 도덕에 몰두하는 일이 어떻게 보다 넓은 세계를 포기하는 일이나 자아에 탐닉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될 수 있는가? 도학 특유의 통일성 관념이 이 이론적 과제를 담당하였다. 핵심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 전체를 전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아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인간 본성)를 실현한다는 것은 곧 세계의 천리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세계 전체를 변혁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서 재정의된 것이다. 그리하여 도학자들은 일견 제한되어 보이는 개별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 보다 큰 세계에 대해 주장할 수 있었다.”(408~419쪽) 부디 부실한 요약으로 인하여 책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래서 자세한 설명은 어떤 다른 철인이 있어 설명을 부가하여 주길 기대한다.
“후기 중국 제국의 엘리트 상당수는 두 층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정치적 삶을 영위했던 복합적인 정치적 동물로 보인다. 먼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정치질서(이른바 현상 세계)가 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행정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층위로는 형이상학적 세계가 있다. 도학의 이념을 받아들여 자아 수양이 잘된 사람들은 세계의 심층까지 본다. 그들은 사물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지탱되는지를 볼 수 있다. 도학은 관직을 보유하고 있든 없든 간에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됨으로써 형이상학적 영역에 접속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형이상학적 영역의 관점에서 볼 때, 도학자들이 몰두한 지방활동의 의미는 반드시 ‘지방적’이지 않다. 형이상학 공화국 비전은 당나라 귀족 사회 비전과는 뚜렷이 다르다. 관건은 이러한 복합적 세계관이 과연 실제 정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 시대에 비해 진일보한 준시민의식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왜 후기 중국 제국 엘리트들은 쟁의적이고(그리고 대의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는가? 왜 엘리트들은 군주와 심각한 긴장을 빚거나 갈등을 유발하는 지점으로 감히 나아가지 않았는가? 왜 중국 제국은 근대 민주 공화국을 발전시킨 유럽 부르주아와 유사한, 정치적으로 충분히 능동적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지 않았는가?”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유혹을 저자는 가진다. (434~440쪽)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중국의 영토는 광대했다. 엘리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는 지방이라는 광대한 미답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다른 곳(지방사회)에서 배출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국가에 대해 급진적인 비판자가 될 최대치의 인센티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있었다. 바로 지방사회라는 옵션이 있었던 것이다. 급진적인 항의가 초래할 혼란보다는 지방사회에 가서 엘리트 노릇을 하기를 선호한 이러한 형세는 후기 중국 제국 전 시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제국은 광대한 거버넌스 체제 안에서 엘리트에게 건설적인 반대자의 역할을 부여한 셈이었다. 건설적인 반대자가 된다는 것은 급진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을 사전에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정치 시스템 전체를 재구조화하겠다는 시도 같은 것은 배제되고, 대신 협동적인 게임을 수행하게끔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하는 가장 흥미로운 귀결 중의 하나는, 중앙정부와 급진적인 긴장을 불사할 수 있는 대의제도 개념의 부재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후기 중국 제국의 정치체제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개인성에 따라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폴리스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442~44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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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공화국 :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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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10세기의 관습적인 중국사 : 당나라 정치질서의 붕괴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안녹산(이민족인 튀르크족과 소그드 계통의 사람이다)의 반란을 계기로 당나라가 쇠퇴 단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이 귀족 가문에는 좀 더 파괴적이었다. 당나라는 이러한 궤멸적 반란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당나라 질서의 근간이 무너져갔다. 군사를 지휘하는 절도사는 원래 정규 관료제 외부에 존재하는 특별 파견 담당관에 불과하였다. 8세기에 조정의 행정적 통제 기능이 약화되자, 조정은 국경 방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절도사를 공식적으로 제도화하였다. 한편, 국경에 군사적 기반을 가진 적수가 중앙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막고자 이임보(683~753)는 오직 비중국계 전문 군인만 절도사가 될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한족과 비한족의 공생, 중앙과 지방의 공생이 해체되고 만 것이다. 조정은 군사적 기반이 없는 한족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는 반면, 국경의 절도사들은 점점 더 많은 독립적 군사 권력을 누리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지방 통치자가 되었다. 다른 한편, 중앙 정부는 환관들이 좌지우지하게 되었다,”(320~321쪽)
“의미 심장한 변화는 세금 수취에 관한 정부의 직접적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안녹산의 난 이전에는 중앙정부가 균전제를 통해 그럭저럭 세금을 수취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안녹산의 난을 이 시스템을 파괴하였다. 중앙정부의 세수 기반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이제 세금을 걷는 일을 지역의 절도사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힘을 키운 절도사들은 결국 거둔 세금을 중앙정부에 넘겨주기를 거부하였다. 중앙정부가 지속적으로 권력을 잃어가던 907년, 절도사인 주전충(852~912)이 당나라 마지막 황제를 살해한다.”(320~324)
“당나라 정치체는 성층화된 피라미드였다. 최정상에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황제가 자리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은 그의 신민으로서 서로 다른 법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통합된 전체로서 정치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이 차지할 위치, 그리고 부분들이 서로 간에 맺을 외적인 관계를 정의하였다. 각 행위자는 엄격한 사회적 규칙에 맞추어 행동해야만 했다. 따라서 사회적 순응성은 자발적이고 선제적이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존재하는 규칙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사회의 장애물은 인간의 욕망, 열정, 유혹들이었다. 사회적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고급문화(귀족들의 唐詩)에 접근할 수 있는 집단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는 농촌 마을의 분절된 문화 속에서 사는 뭇 대중이 있었다. 이 두 층을 연결하는 접착제는 불교(그리고 도교)였다.”(324~338쪽)
“당나라 시기에는 대체로 ‘사람’이라는 범주가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도덕적.내적 실체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에 존재하는 기준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윤리적 행위란 내적인 도덕 기준을 준수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외적인 코드에 맞춰 행동하는 일이었다. 이는 외부로 드러난 행위가 자신의 사회적 배경을 나타내게끔 되는 당나라 문화와 잘 들어맞는다. 이에 비해 도학은 당나라 귀족 문화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도학은 ‘사람’이 아니라 자아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내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내성의 목표는 자기 안에 있는 도덕적 자아를 판별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이 도학이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설명하는 정치 이론으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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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10세기의 관습적인 중국사 : 당나라의 정치질서
“관습적인 중국사 서술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220~589), 수(581~618), 당(618~907), 5대10국시대(907~960)가 한나라 멸망에서 송(960~1279)의 창건 사이에 펼쳐져 있다. 3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많은 정치체가 공존하고 또 빠르게 명멸했기 때문에 내전과 정치적 혼란으로 점철된 시기라고 여겨져 왔다. 사회적으로는 귀족 사회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대승불교와 도교가 번창했다. 문화적으로는 시가 문학의 가장 찬란한 형식으로 떠올랐고, 학문적으로는 협의의 철학이 쇠퇴했다.”(306쪽)
“이 시기의 정치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고민해야 할 질문들이 있다. 이 시기의 특징들을 어떻게 연결한 것인가?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질서를 상상하고, 어떤 담론 실천을 통해 정치질서를 구성해나갔는가? 그 과정에서 종교와 문화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306~307쪽)
“3세기에 흉노 제국이 와해된 이후 많은 비한족계 사람들이 중원으로 이주하면서 정주민과 유목민의 정치적 구분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시대적 특징으로는 강력한 힘을 지닌 가문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한때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권력 가문들은 당나라 시대에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조정의 핵심 정치 행위자로 재등장하게 된다. 당나라 통치자들은 튀르크족(돌궐족) 같은 비한족계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하위 계층과 귀족 엘리트를 통섭할 수 있는 포괄적인 시스템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러한 작업에는 많은 사상적.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누가 이 복잡한 당나라 정치 세계의 유대를 가능케 하고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론상 그것은 황제였다. 당나라 황제는 한족의 천자인 동시에 유목민의 영수(텡그리 카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흉노족의 리더라는 뜻)였으니 그 이전 황제들보다 더 큰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307~311쪽)
“당나라는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에는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동방정교회,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사원들이 있었다.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 당나라 관료제의 중추에 접근하기는 어려웠지만 오늘날 보기에 별나다고 느낄 정도로 외국인들에게 열려 있었다. 간단히 말해 국가 관료제 역시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혼합된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수도 이외의 지역에까지 행정적 통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권세 있는 가문들의 개인 네트워크가 필요했고, 귀족들은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지 않고 귀족 계층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해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이 필요했다.”(313~3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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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진나라와 한나라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반응으로서 당시 정치사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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