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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_프랑수아 줄리앙 / 교유서가
‘벗어남의 철학’
“어떤 관념이 합치될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합치는 세계화, 전 지구적 시장, 미디어의 지배, 일반화된 연결망의 기둥 등으로 인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규탄하는 데 머무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규탄은 힘도 없고 의거할 토대도 없으며 사람들이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수의 지엽적인 ‘현장에서의’ 탈-합치들이 서로 마주치며 퍼져나갈 때, 따라서 안착된 합치들에 은미한 균열을 일으킬 때 합치의 은신처를 무너뜨릴 수 있다.”
‘탈-합치’라는 단어는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와 줄리앙이 만든 신조어다. 줄리앙은 40여 년간 중국사유와 서양사유를 맞대면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중국학의 차원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사유를 펼쳐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동서양 사유의 관계를 통찰한 40여 종의 단행본을 저술했고 최근에는 이와 같은 방대한 지적 자산을 토대로 독창적인 문화론과 실존의 윤리학을 정립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시한다. 인류 삶의 진화 자체에서 이탈을 통해 인간이 된 존재가 출현할 수 있었고 대자연과 간극을 벌리게 된 것은 무엇에 기인했는가? 또한 의식으로 불리는 것이 세계에 대한 탈착(脫着)을 통해 인정될 수 있고, 세계 안에서 자유로서 전개 될 것을 세계의 응집에 균열을 냄으로써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한 일차적인 답을 이렇게 설명한다. “삶의 외부에서 부과된 명령, 다른 질서에 의거하지 않는 윤리가 이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과 합치함으로써 안정화된 모든 적합성이 합치에서 생산력을 잃는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므로 동시에 합치로부터 탈결속하는 윤리다. 특정 자아에 매몰시키는 일치의 바깥, 특정 세계 안에 가둬버리는 적합성의 바깥에 서게 해주는 돌파나 탈주야말로 ‘실존’의 능력 그 자체가 아닌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탈-봉인(封印)’, ‘우발적인 것과 조정된 것’,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탈합치에서 의식이 비롯된다’ 등을 이야기하며 ‘근대성’으로 마무리한다.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封印)을 나는 탈-합치로 명명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는 무슨 뜻인가?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나와 세상과 단절이 없을 때 건강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영속을 위해 이전 상태를 연장하고 지속만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상태는 삶이 굳어지고 해체되어 죽음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 상태를 벗어나는 일이고 밀착 상태의 결속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상태로부터 새로운 것을 계속 나타나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현재’라고 칭해지는 상태에 이른, 따라서 그 상태의 고갈에 이른 적합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하는 것이다.”
줄리앙 교수의 탈-합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도전해볼 만한 과제이다. 이 책을 옮긴이 이근세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탈합치는 자유의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표현이다. 탈합치에는 지성과 통찰력, 특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탈합치의 실천은 어렵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라고 적었다. 탈합치는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나는 ‘벗어남의 철학’이라고 이름 붙인다.
#탈합치 #프랑수아줄리앙 #교유서가 #쎄인트의책이야기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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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든 사물이나 동물, 식물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는 것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형태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의 틀을 확장한다면 정체된 존재가 아닌 창조의 연속성 상태가 된다. 즉, 존재에서 실존의 형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 사회, 가정의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외부에서 규정된 질서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안정을 유지하고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질서에 균열을 낸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소유욕은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을 꽤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사상과 신체에 대한 인정도 포함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만델라의 인권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 등이 그렇다.
탈합치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형태의 그림을 창조하고, 균형 잡힌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실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진화론과 기술의 발전 또한 탈합치로 보았는데, 탈합치는 내적 만족에서 벗어나 외부로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책 내용의 난이도가 상당한데, 예술과 철학의 기존 틀을 벗아나 있기 때문이리라.
탈합치의 저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을 탈-합치로 정의하였다. 어긋남이란 사물들의 정합적인 결합, 요컨대 경첩으로부터 빠져나옴이다. 이런 문구들은 바로잡아야 할 시간의 퇴화가 아니라 미래의 생산력이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을 열어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과 실존은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철학자로 파리대학 교수이며 중국과 서양 철학을 연구하며 탈합치라는 독창적인 문화론과 실존의 윤리학을 정립하고 있다. 줄리앙의 작품은 강력한 생각의 단합과 명확한 진보가 있다. 철학의 길의 맨 끝에서 줄리앙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는 일반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편적이 존재합니까? 우리는 공통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단합과 차이 적합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탈합치한다는 사실, 즉 안착된 합치를 계속 해체한다는 사실로부터 삶의 현상 자체, 달리 말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에서의 삶의 현상 자체가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쇄신으로서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다는 것은 영속을 위해 이전 상태를 연장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전 상태가 계속 지속될 경우 삶은 굳어지고 해체되어 죽음을 향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 상태를 벗어나는 일이고 밀착 상태의 결속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는 일이며, 이는 그로부터 새로운 것이 계속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현재라고 칭해지는 상태에 이른, 따라서 그 상태의 고갈에 이른 적합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 하는 것이다.
단지 삶을 장식하기 위한 삶의 교훈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삶을 조각할 것이기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만큼 미적으로 만드는 것, 즉 삶의 예술은 유감스러운 개념이다. 이와 반대로 예술에 고유하며 근대성이 근원적으로 밝혀주는 탈함치의 요청은 실존에 고유한 능력을 감각의 차원에 기입함으로써 이 능력을 즉각 작동시킨다. 예술과 실존은 새로운 것, 곧 전대미문의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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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합치 프랑수아줄리앙 이근세 교유서가 . .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을 나는 탈합치로 명명할 것이다." (16쪽) 저자의 철학적 선언은 낯선 개념에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탈합치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합치에서 벗어나라"는 단순한 제언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긍정과 부정 어디에도 없는 개념이 낯선 이유는 당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위를 벗어난 기준점은 새로운 철학적 정의를 통해 진정한 자유에 접속하도록 이끌었다. . . "모든 정해지고 즉자적인 것으로부터 탈합치함으로써 또는 간극을 통해 실재적인 것이 실재로서 출현하며 눈에 띄기도 전에 활성화된다는 관념을 마주하는 것이다."(20쪽) 간극에는 미묘한 운동성이 있다. 사이의 긴장이 사유를 만든다. 긍정과 부정을 오고가는 인식의 진자는 그 운동을 통해 새로운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다. 탈합치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정적인 사유만이 아닌 간극에서 가능한 생명성을 떠올리고자 했다. 아마도 그 힘에서 고정관념을 전복시킬 수 있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 이 책은 동서 문화철학의 세계적 석학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 개념을 미술, 성서, 문학, 윤리 등에 가동시켜 내재된 탈합치의 개념을 확인토록한다. 책의 내용은 어려웠지만 저자의 개념을 통해 사유의 전복적 시도를 통해 지적 확장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예술과 인문학적 기반이 그리 깊지 않기에 내가 살아온 삶의 질문들과 대답들에 새로운 방점을 찍음으로써 조금은 자유로운 직업으로 읽어나갔다. 다음의 문장은 나의 시도에 큰 격려가 되었다. . . "탈합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존의 사명을 말해주는 개념이다. 만일 탈합치로 자아의 적합성, 한 세계에 대한 자기 적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자신에 의한 것이라면 그 의미는 바로 실존한다는 것이다."(24쪽) . . 정착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이탈로 상처를 남긴 젊음의 시간이 떠올랐다. "자기적응"을 안착 혹은 안주라고 생각했을 때야 비로서 탈합치라는 거대한 개념을 나의 삶으로 조금씩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실패한 도전의 시간들이 실존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의도는 존재의 위로는 결코 아니지만 나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 . 이 책의 전복적 사유는 자유를 선사한다. 저자의 공고한 철학적 기반에 근거하기에 놀라운 사고에 해방감을 느꼈다. 이를 테면 26쪽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지상낙원이 합치라면 그곳에 의심, 의문, 분란이 없으며 실존 또한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균열이 일어나고 간극이 만들어진다. 비로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실존의 가능성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저항은 실존을 근거하기에 저항심을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에서도 생동하는 에너지가 있을 것이다. . .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혼돈 역시 탈합치와 연관될 수 있을까. . . “탈합치는 탐험이다. 탈합치는 우발적인 것, 창조적인 것, 미리 예견되거나 내포되지 않은 것, 개시될 수도 있고 불발될 수도 있는 것을 향해 열려 있다.”(91쪽) . . 도서협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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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 내용에 대한 기시감이 아니라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기시감이다. 한병철 교수님 책(피로사회 등)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문장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고,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가고 "그래서, 내용이 뭔데?"라고 지인이 물어오면 대답을 하기엔 입을 열어 나오는 말들이 부끄럽다고 느껴지는 종류의 책. 그래서 좀 더 알고싶다, 더 알아겠단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 탈합치. 이거 혹시 '정반합'의 다른 의미인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다. 헤겔이 등장하고 그의 사상이 나오기는 하지만 좀 더 포괄적인 혹은 미시적인(?) 그래,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본질적인' 내용을 다룬다. 공부를 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점은 책의 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차례를 보면 한국어판 서문 부터 9. 근대성까지의 분량이 135페이지 정도된다. 이어지는 '역자 해제·탈합치의 정치', '역자 후기' 부분의 분량이 68페이지 정도. 저자가 아닌 역자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정도로 많을 정도의 책이라니. 보통 6페이저 정도, 혹은 많아야 20페이지를 넘지 않았던 듯 한데. 이 정도라면 역자가 책에 대해 품고 있는 감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해를 하려면 역자 정도의 애정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뷰어로서 챙피한 고백인데, 아직 내공이 이 책을 A4 용지 한 장 못되는 분량으로 축약할 엄두를 못내겠다. 이럴 경우는 보통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서 적기도 하는데, 사실 책에 줄을 그은 부분이 대부분이라 문장 고르는 것도 버겁다. 예전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읽었을 때가 떠오르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이 책의 대단함을 일부나마 기재하는 것으로 짧은 감상을 마친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이후로(그 책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문학작품의 내용을 빌려와서 예를 드는 경우가 많아진 듯 하다. 이 책에도 매 장마다 고전이 등장하고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무려 성경의 내용이 인용되기도 한다. 등장하는 작품들의 내용을 모름에도 아는 척 하고 싶게 만드니 지적 허영심을 너무 자극하는 부작용이 있다. 부디 이점 유의하시기를
*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개인적인 느낌과 주관적인 의견을 적은 글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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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A교수님께 들은 경험담이 도움이 될 것 같다. A교수님이 처음 교수로 임용되었을 당시, 스스로를 매우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던 노교수님이 계셨다고 한다. 당신이 젊었을 적에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관행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신경써서 행동하셨는데, 문제는 그 행동들이 그 예전에는 진보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지언정 A교수님 세대에서는 더 이상 진보적인 행동으로 평가하기엔 이미 구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스스로는 그 변화에 적응해가는 것 같아도 여전히 뒤쳐짐을 피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현재 상태가 사회 규범이라든지 타자와의 관계,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합치하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은 두 가지를 간과했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바로 “현재의 순간은 그 흐름에서 포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소개한 이야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현재에 합치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동시성은 결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다. 마치 현재 발을 담근 강물이 이미 저만치 흘러간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살아 있다는 것에는 합치가 아닌 ‘탈합치’의 원리가 끊임없이 작동한다. 만일 이전의 상태가 지속될 경우(합치),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삶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죽음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탈합치는 현재 느끼는 상태와의 합치 불가능성으로 인해 스스로를 ‘도약 상태’ 속에 유지하는 것이며, 삶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을 ‘합치에서 이탈함’으로 이해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탈합치적인 사례들을 예술과 실존, 성경, 동서양의 철학 등에서 찾는다. 피카소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그림과 캔버스가 합치하지 않고 어긋나 있는 작품이다. 형태와 비율, 원근법, 단일한 관점, 재현 등을 해체하려 했던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탈합치적 방법론을 찾는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합치하는 삶을 살던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기 시작한 데에서 탈합치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실존하다(exister)’란 ‘바깥에 서다(ex-sistere)’라는 뜻으로,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적응의 바깥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밖에 실천 영역에서 탈합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역자는 해제를 통해 정치 영역에서의 탈합치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는 어떨까. 처음 소개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 현재에 합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탈합치 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사회규범들, 이를테면 인권이나 젠더 의식에 스스로가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탈합치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하물며 스스로 합치 상태에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들, 마치 물과 공기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참고로 저자는 ‘정신’과 ‘의식’을 분리하여 대립시키는데, 이 점도 주의깊게 볼 부분이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거리와 가능성을 안겨주는 책이다.
탈합치라는 개념의 번역 과정에도 재미난 점이 있다. 저자는 중국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거상합(去相合)’을 제안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서로 합쳐진 상태를 떠나다/벗어나다’ 정도의 의미인데, 역자는 우리말 용법에서는 너무 벗어난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직관적으로도 ‘탈합치’가 의미내용을 담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도 학문이지만, 책 제목을 거상합으로 지어 출간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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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삶에서 합치가 불가능하다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절망해야 하는가? 혹은 산다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항상 탈합치하려는 역량이 아니겠는가?[p.39] - 탈합치는 탐험이다. 탈합치는 우발적인 것, 창조적인 것, 미리 예견되거나 내포되지 않은 것, 개시될 수도 있고 불발될 수도 있는 것을 향해 열려 있다.[p.90]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읽는 게 쉽지 않다. 저자는 철학을 바탕으로 종교,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끌어와 탈합치를 설명한다. ’합치는 죽음’이라는 얘기에서 어렴풋이 헤겔이 떠오른다. 다만 저자는 동서양의 비교철학 연구를 해서 그런지, 동양적 삶의 태도들이 느껴지는 듯했다. 틀에 가둘 수 없는 삶의 태도 같은 것들, 흐르는 것에 몸을 맡기는 것, 어쩌면 순응 같은 것. 삶의 모든 것들은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데, 인간은 처음 발 담근 그때만 기억하는 편이다. 삶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합치와 맞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합치로부터 계속해서 벗어날 때 비로소 실존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말하듯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낙원으로의 추방, 즉 비로소 실존에 진입한 것과 같이, 합치 상태로부터 벗어나 주체적 삶을 살라는 이야기들. 예술이 왜 예술인가, 무엇이 예술인가, 에 대한 한 가지 근원적인 답변들이다. 일탈, 저항, 탈합치. 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습성을 이해하되 실존하라, 이야기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