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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이 책은
이 책 『사유의 악보』는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이란 부제가 있다.
저자는 최정우, <철학자, 작곡가, 비평가, 미학자, 기타리스트.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에로티슴 문학과 유물론적 철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비평으로 등단한 후, 오랫동안 ‘누더기 넋’이라는 뜻의 ‘람혼(襤魂)’을 필명으로 사용하면서, 문학평론과 미술평론, 시론과 연극론, 미학과 사회의 관계, 음악론과 철학적 에세이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비평들을 집필했다.>
이 책의 내용은
이 책은 저자가 연주하는 곡이 13개의 악장으로, 또한 그 사이 사이에 8개의 변주곡으로 펼쳐지고 또한 서곡과 종곡이 있으니 모두 23개의 악보로 사유가 연주된다. 화려하고 찬란하다.
그러나 이책, 읽기 쉽지 않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새삼 저자의 힘에 놀란다. 글을 이어가는, 생각을 이어가는, 사유를 끈질기게 파고 들어, 그걸 원고지에 옮기는 그 힘, 능력에 놀란다.
해서 이 책은 그야말로 나에겐 ‘경이로운 책’이다. 저자가 펼치는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거니와 또한 따라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끌어들여, 글과 한 판 씨름을 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글과 씨름한다’는 말, 빈 말이 아니다. 이런 글 읽어보자.
대체 저자의 서술 범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한꺼번에 풀어놓는 사유의 근거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칸트, 사드, 슬라보예 지젝, 라캉도 모자라서 라캉적. 또한 칸트적,
또한 바타유, 벤야민 그리고 희랍적이면서 유대적인 ......
음악에 대하여는, 무지를 고백당하는 기분, 이해하실지 이런 글 읽으면서 무지, 그 무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 책은
이 책은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한다.
그러니, 번개 같이 속독으로는 읽어서는 안된다. 마치 교향악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정말 악보를 읽으면서 교향악을 듣는 심정으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읽어야 한다.
특별히 저자의 문체에 대하여는, 저자의 이런 발언 생각하며 읽어보도록 하자.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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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 아니, 이 책이 왜 나에게 왔을까. 나는 제목에 끌렸던 것인데 <사유의 악보>에서 방점은 '악보'에 있었다. 제목에 걸맞게 서곡, 13개의 악장, 그리고 종곡, 그 사이에 8개의 변주곡까지, 이런 식의 차례 구성이다. 비평가면서 작곡가인 저자의 글이 어떻게 이곳저곳을 횡단하는지 보고 싶었다. 왠지 자유로운 비행을 할 것 같은 문장을 예감했다. 음악 같은 회화를 꿈꾸었다는 칸딘스키처럼, 머릿속에 어떤 형태가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적 선율이 흐르는 사유의 세계를 보여줄 것만 같은 저자를 통해, 뭔가 새로운 글을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예상은 맞았다. 그런데 529쪽의 방대한 분량은 둘째치고 난감함을 처음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 느꼈다. 한자의 이중, 삼중 병기, 길게 부연설명된 각주, 여러 의미를 압축하고 있는 한 문장 등이 그렇다.
이 책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다양한 지면을 통해 썼던 저자의 글을 모은 것인데, 초판본이 2011년이다. 2쇄 발행이 2021년 2월인 책이다. 이 책을 하나의 악보라고 소개하는 '서곡'에서, 저자는 "나는 나의 이 책이 하나의 전염병이 되기를, 역병처럼 창궐하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또한 그렇게 믿는 대로 쓴다."(11쪽)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나는 코로나19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기 글의 영향력을 말하면서 왜 굳이 전염병, 역병에 비유할까.)
국가폭력은 정당한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저자는 '근대적' 법치 체제의 가장 '야만적'인 성격을 목격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들(당시 이명박 정권 때의 촛불집회, 용산사태 등)을 언급한다. '법치'로 상징되는 법 자체의 불가침성을 문제 삼는 사유 두 가지가 있다. 폭력을 가장 먼 곳으로 밀고 나가 사유하고 동시에 가장 가깝게 끌어안아 사유하는 것이다. 한쪽에는 바타유의 사유, 다른 한쪽에는 벤야민의 사유가 있다. 저자는 두 사람의 '폭력'에 대한 논의를 설파한 후, 우리가 어떤 폭력을 사유하고 행사하며 제한/제안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비폭력의 '미학'보다는 반폭력의 '정치'를, 비폭력의 '윤리'보다는 반폭력의 '불가능성'을 깊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전제되어 있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고 내세웠지만 '정의롭지' 못했던 폭력의 시대가 멀지 않은 과거다. 이에, 우리는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이라는 무응답이나 동문서답이 아니라, 반폭력이라는 응답성/책임성으로 답하는 일이 시급하다.
"환대의 주제를 '국민 화합'이라는 역겨운 언어로 포장된 무차별적 화해나 용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윤리라는 문제의식을 도덕적 편견들을 확인(사살)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를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63쪽)
저자가 말하는 응답, 책임이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양립'하게 하는 폭력의 양가적 아포리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어떤 사유의 불가능성과 연관된다. 국가폭력에 대한 사유, 특히 환대의 윤리를 손쉽게 적용하는 부분에 대한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폭력/비폭력을 비롯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팽배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사유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세계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자체의 근대적이면서도 탈근대적인 물음에 대한 사유, 야구 이야기를 내세우면서 문학적 분류법을 말하는 방식, 현악사중주를 구조 삼아 칸트, 마르크스, 벤야민, 랑시에르의 논의를 풀어가는 방식, 박상륭의 <뙤약볕> 연작 독해, 랑시에르의 번역에 대한 견해, 문학적 철학의 유형으로 소개하는 푸코의 문학론과 마슈레의 문학론, 소설을 권유하는 김언의 시와 시를 전유하는 박상의 소설에 대한 비평, 인문학 서평을 위한 강령들, 후기 혹은 말년의 양식에 대한 글 등을 만날 수 있다. 종곡은 특이한 구성으로 마무리되는데, '각주들로만 이루어진 부고와 유서의 결어들'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자잘한 글씨의 각주 형태로 썼다.
작곡가면서 비평가의 정체성을, 저자는 이 책에서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 명명한 '사유의 불협화음'이 산출한 씨앗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만개하기를 바란다. 현재 문학비평의 흐름은 어떠한가. 어떤 사유가 논의, 확장되고 있을까.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쓰여지는 문학비평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자가 문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상기하며 이 글을 마무리해본다. 문체가 곧 사유라는 말에 공감하면서.
"악보란 그 자체로는 음악이 아니며, 일종의 표기법, 문자/글쓰기의 한 형태이다. 내 글의 문체는 말하자면 나의 작곡 어법이며, 작곡된 하나의 악보가 그 음악 어법과 분리될 수 없듯이, 이러한 어법이 나의 언어 혹은 사유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략) 나의 문체는 내 사유의 일부 혹은 전체이다."(15쪽)
[YES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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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읽어 내기에 힘겨운(?) 책도 오랜만입니다, 그리하여 되도록이면 천천히 오래 곱씹어 봐야 할 평론집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래전 한창 글쓰기에 고민이 많았을때 우연히 읽게 된 책 중에서 '재즈적 글쓰기'라는 스타일의 책이 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 책의 글쓰기가 떠올랐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음악 쟝르의 재즈처럼 즉흥적 글쓰기(즉흥 연주처럼)와 함께 전체 뉘앙스가 재즈 연주를 듣는 느낌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 같았었는데 역시 읽어 내기에 난해한 점이 많았었드랬습니다,
이 평론집 [사유의 악보] 역시 작가가 비평가 이면서 작곡가, 기타리스트, 그룹 보컬 등의 음악가로서 음악적 재능과 감각을 평론 문학에 적용해보는 하이브리드(융합)적 새로운 시도의 글쓰기 구성 스타일로 보여지며 또한 그렇게 읽혔습니다,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이라고 책 전면에 표방을 한 것처럼 말 그대로 다양한 철학, 예술 분야와 함께 때론 주요 현대 시사를 접목, 다의적 언어의 유희를 즐기면서 기형과 잡종의 글쓰기를 시도하여 마침내 '사유의 악보'를 독자들 앞에 짜잔 제시합니다,
책의 서두 차례만 살펴도 짐작이 가겠지만 각 악장 사이에 변주를 넣어 전체적 책읽기에 흥미를 더한 노력들이 새롭게 읽힙니다, 특히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서평인 관계로 변주의 마지막 후미 '변주8'의 '인문학 서평을 위한 몇개의 강령들'이 흥미롭게 읽혔었는데 대략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책은 생각의 집합이기 이전에 하나의 물질이다, 책이라는 물질의 냄새를 맡고 책이라는 물질의 흔적을 따라가라, 동물적 감각을 활용하라! 킁킁~~ (냄새맡는 소리^^) 요즘같이 디지털북, 즉 e- book 사용이 늘어만 가는 시대에 엉뚱하게도 코를 대고 냄새 맡는 시늉의 독자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는 군요,,,
작가는 이러한 감각의 논리를 따라서 이 도착증(?)을 충분히 즐기고 오히려 증폭시켜라 고 응원합니다, 또한 그 도착적 욕망에는 입이 없으므로 귀를 기울여라며 그에 따라 책을 스스로 발견 하라고 합니다, 도착의 논리는 어떤 대화의 논리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답을 구하려 하지말고 오히려 질문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질문을 확장 시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서평을 쓸때 그 책에 대해 섣불리 동의를 표하지 말고 의문시하며 질문하고 끝끝내 답을 얻어내라고 일갈하지요,
그리고 언론이나 전문가를 믿지 말고 오히려 그들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일부러라도(일부러 라구요??) 그들에 반대하고 그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서평을 써라고 강권합니다, 따라서 인문학 서적을 선택하고 읽어내며 다시 그것에 대해 말하는 서평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복을 꿈꾸는 것이며 또한 꿈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독자에게 감각을 활용하고 그 감각을 정치화 하라고 역설합니다, (오오~~ 후덜덜 정치화(?)라니요,,, ?)
음악가이면서 비평가인 저자의 이 책은 오래전 이런 저런 잡지에 발표했었거나 미발표 원고를 모아서 새롭게 편집한 비평 작품집인데 이미 십년전에 초판 발행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작가의 프로필 사진 혹은 캐리커쳐는 왜 없는 걸까요?
저자의 최근 다른 저작 작품 속 글을 인용하여 읽으면서 평론, 비평 작가의 글쓰기를 새삼 곰곰 되새겨 사유해 봅니다,
--- 나의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지되었다, 지고의 미학은 드물고 고귀한 것, 정치는 헤프고 남루한 것일지 모른다, 그 둘은 만난다 그리고 고귀한 것은 남루한 것을 통과할 때에만 비로소 그 자신이 된다, 지고한 것은 지상의 나락으로 쳐박힌다, 드문 것은 남루한 것 안에 있고 헤픈 것 안에서 고귀한 것이 등장한다, (작가 최정우)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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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라지만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의 글이다. 꽤 두툼한 책인데 중간에 번역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 자신이라면 이렇게 하겠다라고 쓴 글을 보면 분명 명확하고 말끔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굳이 데리다나 들뢰즈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덕분에 글은 말장난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구분되지 않도록 난잡하게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산된 분열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를 통해 의미를 종잡기가 쉽지 않다. 작가를 서문에서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의 단상이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생각의 단초가 되길 바란다고 했지만 무슨 의도인지 알겠는데, 사실 난잡스러운 것들을 걷어내 보면 알맹이 혹은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이라는게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난삽하고 길게 양을 늘려가며 글을 쓰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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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참으로 말이 어렵다.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구분 경계 영역이 뚜렷한 패러다임을 분석틀을 깨고 이들을 섞어서 새로운 뭔가를 일으키겠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을 다뤄보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른바 잡종(혼혈, 혼합), 하이브리드적 접근이라 해두겠다. 지은이의 이 책 "사유의 악보"는 총 13악장으로 이뤄진 불협화음의 협주곡이다. 그는 서곡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간의 사유와 그 도덕적인 당위의 무조건성에 대한 저 굳센 믿음과 헛된 약속의 말들 속에는 끔찍한 두 개의 상투어가 숨어있다. 이 '우리의 시대'라고 하는, 저 근거가 희박한 시대 의식 또는 세대 의식, 그리고 이 '새로운 사유'라고 하는 저 '오래된'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혼란스럽다. 좀더 들어보자. "이 판에 박힌 미륵불 또는 메시아의 예언을 여기서 다시금 되뇌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묻는 것은 여기에 함께 묶인 글들이 이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사유를 건설하려는 게 아니다. 이 글들은 탈 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지은이는 이글을 사유의 조각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했던 이유라고 밝힌다. 내가 관심을 갖고 읽었던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백승대 옮김, 2007, 인간사랑) 서론의 정밀 독해다. 자크 랑시에르의 이 책은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2011, 인간사랑)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국립 동양학 대학의 허경교수가 번역했다. 이 번역본을 둘러싸고 역자와 그 비판자들 간의 법정 다툼(지은이를 비롯 여러명이 피고소인이 됐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에 관한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 문제를 어떤 하나의 지적 유행이 매번 우리네 이론적 지평을 휩쓸 때마다 으레 한 번 이상씩 겪게 되는 지식 수입 '오퍼상'들의 날치가 번역이 다시금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된 익숙한 경우로 봤다. 이어서 이 다툼을 번역자가 자신의 오역을 비난하는 '민주주의적' 비판자들의 불만과 비난에 대해 법적인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했던 하나의 특수한 사례라고 말한다. 이런 법적 다툼은 별론으로 하고, 여기서 지은이는 위 책의 불어본과 국역본에 대한 정밀 독해만을 주제로 삼는다고 말하고자하는 주제와 내용, 범위를 명확히 한정지웠다. 아무튼 지은이의 의도는 번역자의 오역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번역의 내용을 정밀하게 독해하는 데 목적을 둔다. 해독(解?,解毒=풀어읽어나 잘못된 즉 독을 풀겠다는 뜻)을 시도해보겠다는 말이다. 내용은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긴다. 내 관심사는 지은이가 말하는 "번역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내용을 상상에 맡긴다는 의미는 어느 부분이 오역이며, 이렇게 풀이하고 번역했어야 맞다고 하는 내용들이기에 그렇다. 이는 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기에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지은이의 문제제기는 번역물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우리나라의 도서츨판계의 현실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여서다. 아래와 같은 류의 지적은 이미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박홍규선생이 번역서 서문에 장장 90여쪽에 이르는 장문의 고함 '번역의 제2의 창작'이다. 함부로 없수이 여기지말라, 당해 국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단지 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이라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전문적인 지식은 물론 저자가 그 책을 왜 썼는지, 그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저 낱말 이어붙이기를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주고 이를 묶어서 자신의 번역인양하는 태도 또한 없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제기하는 말들이 모두 옳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대로 읽어볼 만 한 것이어서 옮긴다. "번역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독자들을 단지 법적으로 고소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과 논쟁과 토론과 대화를 하면서 함께 문제점 들을 풀어가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저자/역자가 독자들과 함께 하나의 온전한 책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러한 몽상에 최대한 가깝게 근접해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합리적인 행동방식이 아닐까"(369쪽) 지은이는 자신이 번역한 내용을 적고 있다. 바로 이 대목이 불협화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니 오역을 했던, 어쨌던 불편하면 안 보면 그만이요. 그렇지 않다면, 새로이 번역하면 될 일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불협화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는 내가 번역한 내용을 검증할 거야, 반드시 보고있을 거야 내 번역에 한치의 잘못도 없는 것인가 라는 번역자의 자기검열을 강화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내 번역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아는 것 만큼 보이는 법이니 그러하다. 최근 어느 번역서의 머리말에 "맨 처음 번역할 때는 그 단어의 의미의 깊이를 몰랐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개정판을 번역하려고 원전과 대조해서 읽어보니, 내가 쓴 단어가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적절치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자기 고백과 아울러 개정판에는 어떻게 번역에 임했는 지를 적고 있었다. 이 책의 9장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들이 제대로 된 표현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나, 아무튼 '참신하다' 학문을 하는 자이건 교양을 쌓은 사람이든 이 책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혹은 번역을 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하는가 일 것이다. 이 9악장은 2009년에 내놓은 글이다. 지은이가 지적한 대목이 이후, 랑시에르의 책이 새로이 번역된 과정에서 어떻게 표현이 됐는지를 확인해보고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겠다.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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