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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는 16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그려낸 이상적(또는 디스토피아적) 국가에 대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간략히 해석을 곁들인다. 소개된 책은 16세기 <유토피아>, 17세기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와 베이컨의<새로운 아틀란티스 >, 18세기 볼테르의 <캉디드>, 19세기에는 벨러미의 <뒤를 돌아보며>,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마지막으로 현대에 와서는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과 필립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작품까지 등장한다.
<유토피아>는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어 다시 찾아보니 14년 전에 읽고 남긴 독후감이 있었다. 저자인 토머스 모어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작품에 대해 간략한 내용을 적어두었는데, 그때는 내가 작품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세상은 얼핏 사회주의와 흡사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음식을 먹고, 동일한 옷을 입으며, 누구도 예외 없이 하루 6시간 동안 일하는 세상이다. 16세기 당시의 시민들의 열악한 삶을 떠올리면 작가의 심정이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꿈꿀 수도 있으니까.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의 부족한 부분을 과도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유토피아>를 처음 읽을 때 가졌던 생각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상상 속에 그려지는 국가의 이상향에만 집중해서였는지, 저자가 그와 반대되는 관점을 여러 곳에 심어놓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소설 속에는 일종의 반전이 있는데, 등장인물을 통해서 <유토피아>의 이상주의 국가론에 반대하는 저자의 생각 일부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말을 빌면,
"내 생각에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람이 잘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하겠습니까?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큰 반감을 가진 점은 전체 체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경제였다."
유토피아를 경험한 항해자 히슬로디의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그리는 말에 반대하며, 마치 근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패퇴하게 되는 그 지점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이 짚어내고 있다.
토머스 모어는 "극단적 정의는 부정의"라고 소설 속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국가도 개인의 자발적인 동력을 끌어낼 수 없고, 극한의 경쟁 사회는 빈부의 격차로 발생하는 다수의 궁핍을 구제하기 어렵다. 이 두 극단의 중간 어디쯤 답이 있을 텐데,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어떤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지 토론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대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우리 나리에도 도입되면 좋겠다고 염원할 만한 요소가 많다고 본다."
"우리가 나중에 시간을 내서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의견을 나누고 조금 더 자세한 사실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볼테르. 프랑스 혁명과 근대의 시민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 그가 쓴 책은 본 적이 없는데, <캉디드>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조금 엿볼 수는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서 인간은 원래 사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세상이 지옥 같다. 서로 죽이고, 괴롭히고, 간사한데다가 도둑질하는 인간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볼테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꿈꿀 것이 아니라 이 혹독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고쳐서 살아보자라고 제안한다. 현실에 발 딛고 있는 그곳을 우리가 직접 더 나은 세상으로 일구면 그게 바로 유토피아라고 말이다.
또 다른 작품을 쓴 윌리엄 모리스의 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인간이 사악하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인 인간은 없다. 물론, 극소수의 돌연변이로 비롯된 사이코패스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환경에 기대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좀 더 정교하게 말해보자면 제도에 의해서 인간은 이기적이 되기도 하고 범죄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며, 반대로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공공의 이익에 헌신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사회주의는 개인의 욕심을 부추기지는 않지만, 반대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꺾는다. 얼마 전 읽었던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에서 예를 들었던 유람선 승객의 사례에서 깨닫는 바가 있다. 1등석과 일반석에 동일하게 충분한 먹을 것이 준비되었으나, 1등석 승객에게는 정해진 자리와 질서 있는 배식을 해서 전체에게 고르게 식사가 돌아가리라는 믿음을 준다. 이와는 달리 일반석에는 음식을 쌓아놓고 아무나 순서 없이 알아서 먹게 한다. 여유 있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1등석 식사칸과는 달리 일반석의 식사칸은 아수라장이 되고 결국 먹을 것이 금방 동나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인류는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배워왔다. 갓 태어난 아이도 성인쯤이 되면, 인류가 축적한 거대한 지식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사고실험과 열린 토론을 통해 좀 더 바람직한 답에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다만, 그 본성의 씨앗을 어떻게 키워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세상이 어떻게 되리라는 고정된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지혜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데 긍정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진보라고 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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