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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조선은 일본에 사행을 파견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이라는 점에서 전쟁직후 사신을 보낸 것이 마냥 의아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에 이 시기에 사신을 보냈던 것인지, 그것도 단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 더 확대된 사절단을 보내게 된 것일까.
조선은 1607년 이후 1811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열두 차례의 사신이자 문화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들을 조선통신사라고 하는데, 조선으로서도 사신 파견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노예로 팔려가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조선정부로서는 이들의 귀환을 위해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일종의 유화책이었던 셈이다. 일본 쪽에선 전쟁후 수립된 바쿠후 정권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 조선 통신사 초청이 필요했으니,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 조선통신사에 대해 알고나서 놀라게 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 일행의 규모가 470명선이었다니 일정도 거의 1년에 걸쳤고, 장도도 해로, 강, 육지로 에도(요즘의 도쿄)까지 만리에 이르렀다고 하니, 한마디로 규모로나 일정으로나 대규모의 사절이었다. 하지만 중국행 사절과는 달리 조선 통신사는 사대부들이 기피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삼사(三使-정사,부사, 종사관)에 안 뽑히려고 기를 썼고, 선발돼오 안갈 궁리만 했다고 하니, 해외 교류가 드물어 외국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던 시절인데도 해로로 일본을 가야 한다는 점에서나 일정이 1년가까이 된다는 점에서 환영받지 못할 법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3D에 속하는 사절단인 셈이었다. 반면에 중인이나 서얼쪽에서는 입장이 달랐다. 통신사는 문화사절단 성격을 띄고 있어서,문사 뿐 아니라 음악, 미술, 잡기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역인물들이 포함됐다.그들은 통신사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자 했던 인물도 많았다.
일행도 많고, 일정도 길고, 여정은 멀고,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뱃멀미에 시달리는 가하면 풍랑에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에 빠지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 숙소나 이동수단을 두고 각축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불편함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중인,서얼,역관, 위원 화원 등 사대부 이하 계급간의 신경전이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일정동안 명절이나 생일 등을 지내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동료애를 다지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우선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것만해도 그 지역에서는 대단한 볼거리였고, 일본의 유생이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남긴 조선 문사들의 글이나 그림은 일본에선 서로 수집하려 할만큼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통신사 파견 초기에는 조선의 입장에선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고,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일방적인 시혜자의 시각을 견지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원래 조선의 책을 일본에 팔거나 유입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연구로서 조선 책을 밀수입해 출판하고 있었다. 이런 조선의 책이나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됐던 강항의 영향으로 일본에 주자학이 싹을 틔웠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조선 통신사들도 점점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들의 문화와 학문에 대해 열린 시각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또 조선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도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연구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게 됐다. 일본의 문화역시 조선문화에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특히 출판문화는 조선통신사들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빠르게 간행되고 팔리는 책을 보면서 일본의 출판문화에 대해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또 통신사를 통해 들어온 일본 책을 통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문인이나 학문에 대한 관심이 일기도 했으니, 조선 통신사는 조-일 간의 문화교류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조선 통신사는 1811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지만 문화사절단으로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일방적 교류에서 점진적으로 상호 교류의 성격으로 나아갔고, 특히나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을 오랑캐로 대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타국의 실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 또한 조선 통신사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보면 조선 통신사는 실패가 아닌가 하고 토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파견 목적인 포로귀환이나 조-일간의 평화에 대해서는 훗날 일본의 침탈을 당했으니 평화로 이어지지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교류에 대해서는 평가를 하게 된다. 조선은 조선의 시각으로 일본을 평가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18세기 중반 쯤에는 일본의 주체성을 이해하고 열린 시각으로 그들의 문화에 접근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조선 통신사의 장기간에 걸친 문화교류가 있었다. 이런 변화는 또한 일본인들을 직접 만나고, 눈으로 보고 접했던 경험, 장기간에 걸친 문화교류가 가진 장점이자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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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열두 차례에 걸쳐 수천 조선인이 일본 사행길에 올랐다. 470여명이 1년 가까이 1만 리 여행길에서 벌이는 갈등과 화해, 웃음과 눈물의 파노라마' 조선통신사가 남긴 기록을 통해서 그때의 멀고 기나긴 여행길을 추적해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글쓴이는 그 고된 흔적을 잘 보여주지도 않고 소박하게 그림을 그렸다. 확실히 이때가 '최초의 한류'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거친 풍랑이 휩쓸고 난 뒤에 문화 교류를 통해 교화를 시키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있었으니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물거품으로 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럼에도 기록은 남아있고 그 역사의 시대에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있었으니 그저 '조선통신사'라는 단어 하나로 압축을 시켜 기억을 한다는 건 잊혀진 이들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 애잔함이 글쓴이를 이끌어 이런 책이 탄생한 건 아니었을까.
"조선통신사는 조선 후기,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신이자 문화사절단을 뜻한다. 1607년~1811년 모두 열두 번의 사행이 있었다. 참여한 인원은 각 사행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해도 대략 470명가량이었다. 기간은 평균 1년 정도 걸렸다.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행을 다녀온 것이다. 외국과의 교류가 드물던 시절,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행길에 올라 1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면서 외국을 경험했다." (13)
여행, 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이 있다.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곳,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 먹어본 적 없는 낯선 음식과 살갗에 와닿는 낯선 기후를 접하면서 갖게 되는 그 묘한 울림. 당시 조선에게 있어 일본이란 나라는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었고 그 낮은 나라에게 침입을 당하고 깊은 설움을 갖게 되었을 텐데 '문화 교류'라는 명목하 방문을 하였으니 확실히 좋은 마음은 아니었을 테다. 가능하면 조선통신사의 기나긴 여행길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게 당연지사다. 배를 타고 하루이틀만에 갈 수 있는 여정도 아니었기에 목숨을 잃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우리 것을 알려주고 그들의 본연지사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싶은 호기심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문화 교류에 목적은 있었으나 그 호기심도 감히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책은 조선통신사의 처소- 이국에서 맞는 생일과 명절 - 조선통신사, 시를 주고받다 -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 여성 - 조선 후기 한, 일 두 나라의 서적 교류 , 총 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중간중간 도판이 있어 그림을 보며 눈을 쉬게 하는 묘미도 있었다. 다만 역사서를 읽은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형편 없기에 한자를 보면 울렁거리는 울렁증과 도표와 연표를 보면 지루해서 개인의 한계를 느끼며 곤혹스럽게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다. 하여 관심이 갔던 4장.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 여성, 위주로 독후감을 작성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이방인들이 만나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면서 차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상대방, 다시 말해 나와는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에 대한 이해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조선통신사 연구는 문화교류를 잘 담아냈다. 하지만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조선통신사와 일본 남성의 문화교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동시대를 산 일본 여성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몹시 아쉬운 부분이다." (232)
글쓴이가 여성이었기에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다보니 나도 여자로 태어나서 자꾸 여성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시대를 살았던 언니들은 살면서 얼마나 고달팠을까, 지금도 이렇게나 고달픈데, 인상을 찡그리게 된다. 쨌건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록이 거의 없었음에도 아주 소중한 기록이 조금이라도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지만 그 기록의 과정을 살피면 역시 남성이 쓴 이야기인지라 당시 조선 남성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일단 조선 남성에게 있어 일본 여성은 머나먼 산을 바라보듯 그 외모로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화려하게 꾸민 일본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원중거는 일본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놀라기도 했지만 일본 귀족 여인들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품위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답게 보이고자 치장을 하는 일본의 여인들이 원중거(일반 조선 남성)에게는 탐탁치 않았나보다.
"원중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조선 여성들은 '모습을 다스리는 것'에 힘쓰는 데 비해 일본 여성들은 '용모를 꾸미는 것'에 힘쓴 것이다. 그가 일본 여성들이 지분을 심하게 바르는 것을 비판한 기저에는, 조선에서는 기녀들이나 하는 치장을 일본에서는 모든 여성이 하는 데 대한 경계가 있었던 것이다." (249)
꾸미는 일에는 서투르지만 나이가 들고보니 어여쁘게 치장을 한 여성을 보면 나이를 막론하고 그 아름다움에 기분이 좋던데 어째서 원중거는 저리 보았을까. 조선 시대 마음대로 치장을 하는 이들은 유일하게 기생이었다하니 일반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하다 관두게 된다. 당시 일본이 조선의 눈에는 후진국이었다고 하나 일본 여성들이 쓴 시를 조선통신사 사람들에게 갖고 와 읽고 글을 써달라, 했으니 유생이나 문인 가문의 일본 여성들이 어떤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의 폐쇄성은 익히 유명한데 그건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조선 여성들에 대한 닫힌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조선 여성들이 많았던가. 그러나 거의 재능을 펼치지도 못하고 숨막힌 보통 여성들의 삶을 강요받다가 간 경우가 많은가. 그런 닫힌 조선 남성들의 눈에 그런 광경은 얼마나 큰 놀라움을 줬을까. 가능하면 사양을 하고 거절을 했다고 하나 '행동으로 자신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여성의 글을 갖고 와 자랑스럽게 내밀며 평을 구했다고 하니 당시 일본 남성의 개방적인 면모가 보이는듯 하다. 한편 한 일본 어민들의 일상사를 기록하면서 아름답고 즐거워보인다고 원중거는 썼으나 현대 여성인 글쓴이 또한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원중거는 이들에게 오히려 즐거운 빛이 있었으니 이는 대마도의 생리라고 했다. 어부와 그 아내가 힘든 생활에도 삶에 찌든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즐거운 빛'이었을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순박함 아니었을까?" (269)
전반적으로 지리적인 영향과 기후도 고려를 하여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드러났을 것이다. 오랜 시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을 알리며 일본의 곳곳을 살피는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가 행한 업적이 작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사이 사이, 닫힌 태도를 좀 달리 했다면 어땠을까. 가령 일본 남성들과 여성들의 일상을 살피면서 그 세세함을 돌아와 알렸더라면. 물론 마땅히 알아야 하는 이들은 알았겠지만 그 앎의 범위가 좀 더 넓었더라면 조선 시대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런 아쉬움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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