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에 일어난 대화 몇 마디를 구별해서 라벨을 붙여놓는다. 가벼운 무게로 나를 급하게 스쳐갔지만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호사스러운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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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의 괜찮은 모습은 찍히지 않는다. 당황할 때, 슬플 때, 기쁠 때, 크고 작은 사건에 부딪힐 때…… 내 모습이 투영된 무언가 앞에 서 있지 않는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흘러갈 뿐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삶의 자리에 머물면 된다. 그것만으로 유별나고 궁금한 여자가 된다. 어쩌면 타인이 바라보는 눈빛, 찍히는 시선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이 일상을 영화로 만드는건지도 모른다. 제대로 '내'가 되는 것. 그것만이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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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나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본다. 그들이 채운 공간에는 배경음악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분위기를 타는 것은 여행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바쁜 일과의 전선을 잘라낸 날들은 이런 사치스러운 분위기에 맘껏 노출되어 있으라고 격려한다. 유혹에 지지 않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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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먹고, 푹 쉬는 여유를 가져도 마음 한구석 낌새가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멍석 깔린 기념일에 쓰임새가 없는 사람이다. 흥겨움에 보탬이 되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특별함이 강요되는 날은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숙제가 잔뜩 쌓인 기분이 된다. 숙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다음 날, 특별함을 씻어낸 개운한 아침이다. '그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많은 날 중의 하나.
-p, 165
초등학교 일기에는 하필 시험기간 주번이었던 내가 있고
중학교 일기에는 짝사랑하는 남자아이가 몰라줬던 내가 있고
고등학교 일기에는 수학 성적이 외면했던 내가 있고
성인의 일기에는 가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내가 있다.
적힌 고민들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골치 아픈 기억만이 영원할 것 같았던 때.
그때의 고민들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간절했으나 이루고 났더니 별 것 아닌 일이 있고,
만만하게 여겼으나 무엇보다 눈부셨던 일이 있다.
인연인 줄 알았으나 금세 서먹해진 사람과
미운 첫인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써놓은, 다소 허무맹랑한 일들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누군가의 비웃음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 조금씩 의심했던 일들.
아주 반짝거리는 형태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나이에 맞는 고민을 통해
알맞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돌아봤을 때 재미있는 굴곡들로 모든 시절을 기억하면서,
더 괜찮은 내가 되어가면서,
지금도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를 새로운 고민을 만들고 있다.
-p, 179
그날의 일기에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스스로 첫날을 지킨 것에 의미를 두었다. '정확하게 여행한다'는 말은 근거 없는 억지다. 수학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정확한 여행'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적어도 여행을 정확하게 출발하는 법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혼자 시작'하는 것이다. 도시의 뉘앙스를 말없이 보고 느끼는 시간이 하루쯤 보장되어야 숨통이 트인다. 말의 왕래를 등지지 않는다면 지지 않는 낮과 카페 모서리 자리, 전시된 무명 아티스트의 그림이 건네는 말에 대답할 기회는 없다. 꿈꿔온 거리에 그런 푸대접을 할 수는 없다. 혼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할 일이라고는 기쁜 고함을 지르는 것이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는 일뿐이어도 고독하지 않다. 흡족한 혼자만의 시간으로 확실한 시작을 두드렸으니 후회 없이 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p, 263
택시 기본요금이 조금만 초과해도 벌벌거리고 커피 한 잔에 행복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야단스럽게 돈을 아끼는 만큼 작은 것에 격하게 반응하던 날들. 여유가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을 소비에 사소한 이유가 붙었던 날들. '가끔'이어서 좋았던 것들 앞에 이제 '자주'라는 말이 붙었지만 비싼 가능성만 늘어났을 뿐, 다채로운 감정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아주 가끔 이렇게 변하곤 했다. 종종 감격은 한도 초과된 카드처럼 쓸모없어졌다. 좋은 장소에서 큰 몫을 지불하기 위해 마음을 내밀지만 소모된 억지만이 긁혔다.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했다. 좋은 것을 봐도 허무함으로 답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넉넉해진 여행에 자꾸만 값비싼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자극을 탐하려 드는 것은, 익숙한 것을 보고 더이상 동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이 아닐가?
여행이란, 애초에 정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횟수를 더할수록 조금씩 나아진다고 믿지만, 첫 여행이 얼마나 초라했느냐에 상관없이 늘 최고점이다. 매 순간에 매혹당하고, 이색적인 풍경에 좌지우지되고, 흥분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처음의 순간. 우리는 순백의 도화지 같아서 모든 경험에 저항하지 않고 색칠을 당한다. 감정의 기류에 기꺼이 휩쓸린다. 매운탕 가격과 바닷모래에 발이 쑥 들어가는 느낌, 여인숙의 이불 무늬까지 때론 정확하게 기억한다. 때문에 첫 여행은 대체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안타깝게도 처음이 주는 환희는 다시 살 수 없다. 젊음이 주는 기분 좋은 구차함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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