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불리는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을 하는 까닭은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삶의 행복감을 높이려는 성찰적 노력일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 가치 있다고 사람들은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를테면 축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개를 키우고, 벗들과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도, 경제적 부를 늘려주는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들은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삶이란 특별한 ‘외적 목표’를 지니지 않는 것, 칸트가 예술의 본질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말한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목적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강제성 없는 자기실현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같이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일을 할 때, 즉 자발적 동기를 지닌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삶의 기술(art)’이 아닐까? 이 책 『만인의 인문학』 부제의 표현처럼 인문학을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이라 한 것 또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개미처럼 늘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의 수많은 다양성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우리는 여기에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물과 구별되는 그 차별성이 무엇인지,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자, 시인들로부터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마르크스,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에 이르는 현대의 무수한 이론과 문학작품, 담론들에 이르는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별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311쪽)” 인 이유이다. 바로 인문학은 근원적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살아갈 의미를 공급해 주는 원천이란 것이다.
책은 이러한 노력, 즉 인문학을 연결 기술로서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인간 이해의 경험 확장, 나아가 존재의 관용으로서 문학(시학)을 풀어가는 〈만인의 시학〉, 그리고 시각의 확대를 통한 무한 소유의 가능성을 대중화하는 현대 문명에서부터 이분법이라는 타자 불관용의 배제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이르는 〈만인의 인문학〉, 그리고 인간 욕망이란 특수한 역사적 현상임을 지적함으로써 인식 지평의 확장을 격려하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3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설명하고 있다.
연결의 능력, “인간에 불이 있듯, 나무에도 불이 있다. 비벼 보자.”(그러면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 저자는 이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만물과 그 현상들을 연결 짓는 능력을 변별성으로 지닌다고 이해한다. 이 연결성이 곧 서사(narrative; 라틴어로 이야기를 뜻하는 narrare), 이야기이고, “인생살이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자 하는 추구의 서사(31쪽)”라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이같이 이미 추상적 정신을 자극하는 연결의 기술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상상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기서 에둘러 말하는 의미의 간접화가 즐거움의 한 생산방식임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은유(metaphore)'일 것이다. ’사랑은 장미‘와 같은 문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장미‘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두 단어의 결합이 어째서 성립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이 관계없는 두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문학 작품, 특히 시(詩)의 문장들은 결코 수월치 않다. 왜 이런 독해 능력을 많은 이들이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능력의 고도화는 현실 인식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수단(60쪽)”임을 우리의 교육이 도외시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결국 인문학적 소양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교육 현실이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한 편협성, 다시 말해 알량하게 알고 있는 정해진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다 보니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혐오와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되는 현상에 도사린 본질의 하나일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 은폐성, 기만성을 꿰뚫는 인식의 수단으로서 역설이나, 모순되는 진술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진리의 순간을 포착하게 하는 아이러니 등 인간의 진실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을 지원할 도구인 인문학으로서의 시학(문학)을 이 사회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이야기’로 지탱되는 사회인가를 읽어내는 일(92쪽)”이라 했다. 문학에는 인간의 약함과 강함, 허영과 꿈과 욕망, 패배와 고통, 사랑과 배반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연결의 능력, 그 상상력은 곧 언어 능력의 고도화이며, 문학이고, 존재 관용의 윤리인 것이다.
‘J.S.밀’은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 『자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관점으로만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문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의 위치로 이동하는, 위치 교환, 관점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 또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상상력을 “삶의 영구 자본”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한계 조건인 유한성에 ‘오류 가능성’과 ‘유약성’을 더해 세 가지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삶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들을 화해시키고 결합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관용이 지배하는 팽팽한 갈등과 배척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몇 가지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의 ‘자기모순에 대한 신비로울 정도의 도덕 불감증’을 지닌 여주인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성공만이 최고의 도덕률이 된 오늘의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의 이야기라 하여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사기, 위장결혼, 절도를 서슴지 않는 ‘몰 플란더즈’는 거짓말과 복화술에 능수능란하다. 이것은 “소리와 의미를 철저히 분리”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배들이 하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네들이 뱉어 낸 소리에는 시민들이 아는 의미가 결코 담겨 있지 않다.
둘째는 언론 매체의 단순한 현상 표피적 진단이라는 선정성과 자기 탐욕적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사적 변동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도 하며 보지 않으려하는 지적 나태함(150쪽)”, 즉 무지라는 인문학적 통찰력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고작 거짓이나 의도적 악의로 그득한, 아무런 사회적 성찰도 없는 그래서 문제적 사회 현상을 보는 눈이 없는 매체를 보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 갈등의 촉발과 심화, 혐오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불의만 넘실댄다.
셋째는 문화적 지연, 즉 변화의 속도와 관성 사이의 현저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행태들이다. 아마 한국사회의 관념적 계급 사회에 대한 명저로 꼽히는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양반(兩班)』에서 지적한 “한국사회의 수구화된 지역과 집단의 특성”으로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망상이 횡행하는 것은 가열된 학력 경쟁, 혈연과 연고주의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폐해의 근인”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이들 집단 구성원은 “집단주의, 혈연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권력 추수주의, 배타성, 권위주의...등으로 표출되어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공영역적 문제들 앞에서 놀랄 정도로 무관심과 냉담, 마비증세(156쪽)”를 보인다고 토로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것에만 열심히 머리를 파묻는,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맴도는 이러한 편협성이란 ‘문화의 비판적 자기성찰이 부재(15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된 일면의 지적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질투의 감정이 뿜어내는 공연한 갈등(고통)의 야기, 감동 죽이기 연습을 강요하는 감동 포기 종용의 사회 양상, “사람 밑에 사람 있고, 돈 밑에 사람 있고, 권력 밑에 사람 있는” ‘인식의 부패’와 이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의 부패’가 만연한 환대 윤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오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기도 하다. 끊임없이 경비원에 대한 갑질 폭언과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부패라 자성해야 함을 확인케 하고 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실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한다. 명백한 것에 질문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내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시학(詩學)(책머리, 5쪽)”이라 정의한다.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 총합으로서의 인문학으로, 우리들이 의미의 위기를 겪을 때 의미 공급원을 만들어 내는 귀중한 지혜의 보고가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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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식을 줄을 모른다. 퇴근길 인문학 등 책 제목에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붙은 다양한 인문학 관련 도서가 계속 나오고 있다. 어쩌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는 많은 부분 우리 삶을 변화시켰고 앞으로의 삶의 문제를 인문학 관점에서 찾으려는 이들이 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정일 저자는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카드 뉴스에 소개된 ‘은유’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호기심으로 읽게 되었다. 저자는 인문학은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문학 전공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그런 취지에서 ‘만인’에게 전하려는 의도로 쓴 책이라 한다. 도정일 저자는 우리 시대의 ‘공적 지식인’으로 불리고 있으며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을 설립하였고 어린이 전문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을 전국 14개 도시에 건립하였으며 저서로 『보이지 않는 가위손』,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등 다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1부 만인의 시학 2부 만인의 인문학 3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우리의 삶을 시학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작가이며 창조자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연습이 없는 실전이다. 누구나 삶에서 무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고자 노력한다. 각자가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가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시학의 눈’을 갖고 삶을 살아갈 때 ‘이야기를 쓰듯 인생을 살기로 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함부로 운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고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알려주고 싶다면, 아마도 한시를 허투루 살지는 않을 것이다. 기초가 튼튼한 집을 짓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나아가 이야기를 쓰듯 인생을 살기로 할 때 세상의 모든 존재물과 이야기로 연결되고 대화하고 정을 통하고 서로 대접하며 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의 확장’이며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의 확장’이며 삶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신화 읽기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신화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에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과연 유익할까 싶은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한 상황이 되었을 때 마술처럼 펼쳐지는 신화의 세계에서 대리만족을 느낀 적 있지 않은가. 바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신화 읽기의 혜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현실원칙’을 들이대며 비교하지 말고 환상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즐기는 태도야말로 신화 읽기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신화가 현대 우리 삶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은 ‘정의가 있는 세계를 선택하고자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 신화 읽기라니 격세지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화는 우리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신화는 결국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화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두 번 읽었는데 2부 만인의 인문학에서 또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가 황제가 되고 난 후 한 사람의 노예를 두고 하루에 몇 번씩 “폐하, 폐하는 인간이십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는 유명한 일화에 다시 감동했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인생의 유한성, 유약성, 오류 가능성이라는 인간 한계조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과학, 문학, 예술, 신화 등 다양한 주제로 풀어나가는 인문학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번 인문학은 우리 삶과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내가 예전에 아주 어렵게 겨우 읽어냈던 『작은 사건들』의 작가 로망롤랑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읽은 후로는 로망롤랑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정희진 작가 덕분에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긴 이때, 그가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 있다.”는 멋진 말을 했다니,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선악, 백흑, 남녀, 이성/감성, 아(我)/타(朶) 등 인간이 만들어낸 이분법 말이다. 그래서 다시 로망롤랑의 작품을 만나고 싶어졌다. 이처럼 이 책을 읽은 소득이라면 선입견을 갖고 있던 작가나,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싶어졌다는 점이다. 그 책은 바로 ≪코스모스≫다. 제2의 칼 세이건이라고 불릴 만큼 천문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가 된 닐 타이슨에게 ‘미래의 과학자에게’라고 서명해 준 책 한 권과 “오늘 밤 눈 때문에 버스가 못 가면 그냥 우리 집으로 와서 자게”라고 따뜻한 말을 건넸다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최근에 쓴 글이 아니라 다양한 지면에 실린-20년이 훨씬 넘은 글도 많다-원고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어서 현시점과 맞물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주었기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인문학적인 통찰을 얻고 싶은 독자라면 좋은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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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문학인가? 내 삶이 좋은 삶이라 생각될 때, 그것이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서도 좋은 삶일 때,좋은 삶이 어떤 삶인가에 대한 사람들 사이의 인정과 가치판단이 공유될 때, 개인과 집단의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이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인문학은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이 인문학의 '위대한 실용'이다.-p 189
우리는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지만, 뭔가 유행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이 들려오고 누구나가 인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식상하기도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문학의 실용을 이야기한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인문학의 필요성, 중요성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있다고 하는 것도. 1. 만인의 시학 인간이 가진 인간 특유의 재주이고 능력은 모든 것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인생이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문학의 세계라면 인생과 문학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만인의 시학'이라는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시학은 문학에 대한 담론이지만,삶이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구조로 짜여지고 진행되는 한 그 삶은 동시에 시학의 대상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시학을 우리는 '삶의 시학'이라 부를 수 있다. -p 29
시학의 눈으로 보았을때 얻는 소득을 읽고나니 개념이 더 정확하게 다가왔다. 인간은 자기 삶의 작가이고, 창조자다. 인생살이는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자 하는 이야기, 곧 추구서사다. 시학의 눈으로 인생을 보고 삶을 살아갈 때 이야기 쓰듯 인생을 살기로 한 사람은 자기 삶을 함부로 운영하지 않을 것이고,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물과 이야기로 연결되고 대화하고 정을 통하고 서로 대접하며 살수 있게 된다했다. 이러한 모든 소득은 기쁨에 연결되고, 그 기쁨은 삶의 아름다움, 산다는 것의 예술이라는 저자의 말은 큰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신화를 처음 읽었을때는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왜 오랫동안 전해져오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시도 마찬가지였다. 뜬구름 잡는 것같은 시를 왜 읽어야하는지, 그리고 읽어도 읽어도 어렵기만 했다. 소설은 또 어떤가? 왜 실제의 일도 아닌 허구에 감정 소모를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화의 표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품고 있는 의미 , 시가 전하고자 하는 것,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비로서 무릇 인간이 어떻게 살아나가야하는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인의 시학'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같았다.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가진 '반전'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모든 상징 행위가 인간의 연상 능력에서 출발하기에 연상능력의 극대화를 기도하는 예술과 예술교육이 인간에게 왜 중요한가도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관계 맺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2부 만인의 인문학
(전략)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진화해온 것과 이들 예술적,상징적 행위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림의 기원 동기에 대한 질문은 바로 이런 대목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근원적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고, 이 질문의 다른 표현법이 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근원적이다.-p 123
통섭이란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대학에서도 다른 분야의 교차 수업을 진행하는등 많은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중요성을 알게된 부분이 있다. 현대 유전학이 유전자 연구를 통해 현생 인류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 1987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유전학자 앨런 윌슨에 의한 인류의 일원 발생설인데, 이것에 의하면 인류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지역 진화설에 따라 백인이 흑인보다 '우수한'인종이라 하며 적대시하고 자신들의 침탈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던 것들이 논리를 잃게되는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아직 더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과학적 발견이 인류의 도덕성이나 문화적 지도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은 과학, 예술은 예술, 문학은 문학 이렇게 벽을 두기보다는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등 많은 분야들의 통섭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예는 충분히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고정관념으로 가득차 있던 생각이 많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인간, 사회,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인문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라고 알려져있는 도정일 작가를 처음 만났다. [ 만인의 인문학 ] 이라는 제목에서 어려움이 뿜어져 나와서 긴장을 했는데,<나는 시를 어떻게 읽는가>라는 첫 글부터 재미있게 읽혀져서 의외였다. 이 책은 매체에 투고했던 총 48개의 칼럼으로 이루어져있었다. 30여년 전의 글도 있어 과학적인 사실들은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사람 사는 기본적인 도리는 그다지 변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시기에 따른 불편함은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도리는 잃지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감동할 일이 너무도 없지 않은가"라고 어떤 이는 반문할지 모른다.이것은 틀린 얘기이다. 감종적 사건, 감동적 경험은 요란스레 나팔을 불며 오는 것이 아니라 낙조처럼 소리 없이, 여름 숲의 향내처럼 은은하게 온다. 그것은 스타카토로 오지 않고 왈츠처럼, 혹은 브람스의 교향곡처럼 잔잔히 물결치며 온다. 그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가야금 현의 떨림이다. 몽둥이를 기다리는 사람들, 쇼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미세하고 잔잔한 떨림이 포착되지 않는다. 감동의 능력을 되찿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것들에서 큰 감동의 원천을 발견하는 일이다.-p143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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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다산북스/2021.3.15.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삶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p.4)”고 <만인의 인문학> 책머리에서 말하고 있다. 이처럼 삶 속의 인문학을 ‘만인의 시학, 만인의 인문학,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3부로 살펴본다. 그러므로 삶 속의 인문학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저자 도정일은 문학평론가 이며, 전 경희대학교 영문과교수였으며, 문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보이지 않는 가위손>,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만인의 인문학>,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시장 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등 다수가 있다.
“불의 사용 능력은 현대적 의미로 풀면 문명과 기술을 대표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불을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는, 특히 지금처럼 ‘기술인간’이 인간의 절정이라 여겨지는 시대에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재주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p.25)” 이 관점에서 말하면 ‘테크네(기술)’는 인간의 아레테가 될 수 있고, 그 기술 아레테는 불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불을 ‘훔쳤다’는 신화는 나무속에 숨겨진 불을 인간이 ‘꺼내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화는 과학이 아니지만, 과학보다 더 깊은 진실과 통찰을 담을 때가 많다. 연결의 능력이 기술을 선행한 것이라면, 그 연결시키기의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인간 특유의 재주이고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실로 모든 것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그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다. 그런데 이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든 것을 연결시킨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인간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을 연결시키고, 모든 현상을 연결시킨다. 인간은 그냥 단순히 ‘말하는’동물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는 연결의 형식이고 연결 그 자체이다. 신화를 보라. 신화는 전설, 민담 등과 함께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다. 거기서는 하늘과 땅이, 신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조상과 후손이, 인간과 동식물이,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결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친숙한 설화이다. 그러나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은 한국의 자생 설화가 아니라 고대 중동의 리디아 왕국 설화이다. 리디아의 왕 미다스/마이다스가 아폴론의 미움을 사 당나귀 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중동 설화와 그리스 신화의 혼합이다.(p.69)”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의 이야기가 고대 왕국 신라에 들어와 토착설화가 되고 신라왕의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도 이야기의 전승과 활용의 한 사례이다. 토착화는 그 자체로 ‘변형’을 수반한 ‘활용’의 한 형태다. ‘아바타’라는 말은 오늘날 세계의 일상어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창조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주인공 라마는 비쉬누 신의 아바타이다. 이 아바타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것으로는 신이 악마 라마나를 처치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대목과, 신이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는 것은 오로지 유일한 인간만이 악마 라마나를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재능 있는 문화 생산자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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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다산북스/2021.3.15. sanbaram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삶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p.4)”고 <만인의 인문학> 책머리에서 말하고 있다. 이처럼 삶 속의 인문학을 ‘만인의 시학, 만인의 인문학,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3부로 살펴본다. 그러므로 삶 속의 인문학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저자 도정일은 문학평론가 이며, 전 경희대학교 영문과교수였으며, 문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보이지 않는 가위손>,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만인의 인문학>,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시장 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등 다수가 있다.
“불의 사용 능력은 현대적 의미로 풀면 문명과 기술을 대표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불을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는, 특히 지금처럼 ‘기술인간’이 인간의 절정이라 여겨지는 시대에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재주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p.25)” 이 관점에서 말하면 ‘테크네(기술)’는 인간의 아레테가 될 수 있고, 그 기술 아레테는 불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불을 ‘훔쳤다’는 신화는 나무속에 숨겨진 불을 인간이 ‘꺼내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화는 과학이 아니지만, 과학보다 더 깊은 진실과 통찰을 담을 때가 많다. 연결의 능력이 기술을 선행한 것이라면, 그 연결시키기의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인간 특유의 재주이고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실로 모든 것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그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다. 그런데 이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든 것을 연결시킨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인간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을 연결시키고, 모든 현상을 연결시킨다. 인간은 그냥 단순히 ‘말하는’동물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는 연결의 형식이고 연결 그 자체이다. 신화를 보라. 신화는 전설, 민담 등과 함께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다. 거기서는 하늘과 땅이, 신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조상과 후손이, 인간과 동식물이,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결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친숙한 설화이다. 그러나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은 한국의 자생 설화가 아니라 고대 중동의 리디아 왕국 설화이다. 리디아의 왕 미다스/마이다스가 아폴론의 미움을 사 당나귀 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중동 설화와 그리스 신화의 혼합이다.(p.69)”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의 이야기가 고대 왕국 신라에 들어와 토착설화가 되고 신라왕의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도 이야기의 전승과 활용의 한 사례이다. 토착화는 그 자체로 ‘변형’을 수반한 ‘활용’의 한 형태다. ‘아바타’라는 말은 오늘날 세계의 일상어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창조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주인공 라마는 비쉬누 신의 아바타이다. 이 아바타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것으로는 신이 악마 라마나를 처치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대목과, 신이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는 것은 오로지 유일한 인간만이 악마 라마나를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재능 있는 문화 생산자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데, 마음은 먹으면 죽는 수가 있다니 기이하지 않는가. 이것은 밥 먹기와 마음먹기의 결정적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밥을 먹는 것은 생물학적 기능에 속하고, 마음을 먹는 것은 대부분 목적적 행위범주에 속한다.(p.81)” 마찬가지로 밥 먹기의 고의적 거부는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죽음을 마다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목적적 행위이다. 입으로 들지 않고 밥통에 담기지 않는 마음을 밥, 떡, 술, 과일처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한국어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어법의 하나다. 언어 관습은 어떤 합리적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쓰다 보니까 쓰이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인의 ‘마음먹다’도 그런 관습적 표현의 하나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신화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중력, 시간, 논리 같은 것들에 꼼짝없이 지배당하는 세계로부터 그것들이 한순간 정지되거나 맥을 못 추는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세계로 신명 나게 여행하는 일이다.(p.90)” 신화 읽기가 즐거운 것은 이처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쁨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집단신화 속에 태어나 그 집단의 이야기에 맞추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임무’를 부여받으며 그 이야기 속의 한 ‘주인공’이 되어서 산다. 어떤 집단의 이야기가 싫을 때는 어떡하는가? 그럴 때도 그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거나 찾아내어 집단서사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하고, 감방에 가기도 하고 맞아 죽기도 하면서 개인사를 전개한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인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이야기’속에서 살고 있다. 신화와 현실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이야기를 바꾸는’ 일이다.
“보기의 형식에는 보기의 주체와 보기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개입한다. 주체는 봄으로써 객체 대상을 알고, 앎으로서 장악하고, 장악함으로써 점유한다. 보기는 그러므로 지식 확장과 권력 확대의 일반 형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보기의 형식에서 지식은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p.117)” 프로이트의 담론 체계가 눈과 남근을 연결하고, 남근과 권력을 연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경우처럼 눈(시각)의 상실은 곧 남근 상실과 권력 상실을 의미한다. 해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몇몇 장님왕들의 얘기가 예외 없이 정치적 권력 상실의 서사문맥 속에 있다는 것은 그 이야기들의 이상한 일반성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고 저자는 말한다.
“엿보기의 유혹은 이 은밀한 시선이 대상의 공적 소유 아닌 사적 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라는 데 있다. 엿보기의 주체가 추구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존재,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은밀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p.119)” 그 공간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고 그의 시선은 들키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배제는 그 공간을 특권화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은밀한 시선으로 대상을 점유할 때만 그는 그 대상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유행이 없는 나라이다. 사람들은 모두 모양이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두발, 구두 할 것 없이 모양새가 동일하다. 그 나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기호의 차이, 스타일의 차이, 취향의 차이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p.166)” 기독교 상상력이 그려낸 ‘천국’도 패션 디자이너들이 갈 곳은 아니다. 모피 옷 차림의 천사, 가죽옷을 입은 천사를 우리는 본 적이 없다. 미니스커트, 핫팬츠, 청바지, 힙합의 천사를 우리는 본 적이 없고, 핑크머리 천사도 본 일이 없다. 천국에는 다양한 형식, 색깔, 모양이 필요하지 않다. 천사들은 바느질 흔적도 천을 이어붙인 흔적도 없는 희고 얇은 무봉의 날개옷 하나만 걸치고 다닌다. 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계절이 없고, 날씨 변화도 없고, 먼지도 없다. 땀 흘리며 뛰어다닐 일도 없고 낚시, 등산, 캠핑을 가거나 데이트하고 연해할 일도 없으므로 옷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패션은 지상에만, 그것도 인간의 세계에만 있다. 그것은 인간세계를 특징짓는 몇 안 되는 현세적 영광 가운데 하나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의 역사- 그 인문학적 질문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서양의 경우 ‘학문’은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먼저 발원하고, 이것이 서양 ‘과학’의 시초를 이룬다.(p.254)” 이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 세계이며, 이때 의미 있는 질문은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같은 것이다. 틀린 것을 틀리다 말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과학정신의 요체다. 근대 과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진리 또는 진실을 향한 이런 정신자세와 지적 정직성이며, 기존의 설명방식에 회의, 반론, 비판을 제기할 수 있었던 ‘비판적 사고’이다. 이 비판적 사고는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며, 합리적 사회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국의 이익을 넘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일과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신화의 이 기술영웅들은 신들과의 경쟁에서 모두 패배한다. 하지만 신화의 숨겨진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그들은 기술이 모자라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세계의 질서 때문에 패퇴한다.(p.300)” ‘그들은 이겼으나 상대가 신이었기 때문에 지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이 그 알짜 메시지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 담긴 ‘인간의 영광’이다. 하나의 환경에 완벽히 적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인간은 판다나 코알라와는 달리 대나무 숲이 없어지고 유칼립투스가 없어지는 것 같은 환경변화가 발생해도 거뜬히 살아남는다. 인간은 기술이 만들어온 존재이며, 기술로 자기를 진화시켜온 동물이다. 그 ‘기술인간’은 인간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예스24 리뷰어클럽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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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철학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유행이 없는 나라이다. 사람들은 모두 모양이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두발, 구두 할 것 없이 모양새가 동일하다. 그 나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기호의 차이, 스타일의 차이, 취향의 차이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p.166 기독교 상상력이 그려낸 ‘천국’도 패션 디자이너들이 갈 곳은 아니다. 모피옷 차림의 천사, 가죽옷을 입은 천사를 우리는 본 적이 없다. 미니스커트, 핫팬츠, 청바지, 힙합의 천사를 우리는 본 적이 없고, 핑크머리 천사도 본 일이 없다. 천국에는 다양한 형식, 색깔, 모양이 필요하지 않다. 천사들은 바느질 흔적도 천을 이어붙인 흔적도 없는 희고 얇은 무봉의 날개옷 하나만 걸치고 다닌다. 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계절이 없고, 날씨 변화도 없고, 먼지도 없다. 땀 흘리며 뛰어다닐 일도 없고 낚시, 등산, 캠핑을 가거나 데이트하고 연해할 일도 없으므로 옷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p.167 패션은 지상에만, 그것도 인간의 세계에만 있다. 그것은 인간세계를 특징짓는 몇 안 되는 현세적 영광 가운데 하나이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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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저/ 사무사책방 2021년 3월 15일 "삶과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통한 사유"
1. 들어가며
"인간은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들과 별반 다르지 읺다. 우리는 태어나고 인생을 살고 나이가 들어서 죽는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전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 가축처럼 일만 죽도록 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 개처럼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이런 '차이' 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총체(p.186)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인간이 밥을 먹고 살면서도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보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유의 출발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왔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상실해버렸다.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마라톤에서 방향을 상실하고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멈추어 서버린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이 시대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저자 도정일은 삶과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의 시선으로 우리를 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 책 속에서 저자는 인문학적 원리가 아닌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 일상들, 문학들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과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기존 지식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사물과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삶과 예술로서의 인문학, 만인을 위한 인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생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유하고 성찰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된다.
2. 책 속으로
1. 만인의 시학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꾼이다. 삶은 이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왜 인문학이 우리게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인문학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삶의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저자는 특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나가는 인간, 자기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시학이다. 시학은 문학에 대한 담론이지만, 삶이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구조로 짜여져 있고 그렇게 삶이 진행되는 한 그것은 바로 시학의 대상이 된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시학을 우리는 삶의 시학(poetics of living)이라 부를 수 있다. (p.15) 삶의 시학은 '산다는 것의 예술'에 주목한다. 산다는 것의 예술은 삶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학의 눈으로 인간을 보고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이 가진 예술적, 시적 차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르스(예술)' 의 존재일 때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p.15)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진 특유의 재능은 무엇일까? 즉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유의 재주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연결시키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연결시키기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인간 특유의 재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그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모든 것을 연결시킨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연결시키고,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을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모든 현상들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이야기가 연결의 방식이자 형식이며 연결, 그차제인 것이다.
시학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우라 삶을 우리 스스로 기획하고 짜나갈 수 있다. 시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자기 삶의 작가이고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작가가 필요 없고 작가가 이야기를 자듯이 자기 인생의 계획을 짜고, 기획해나간다. 즉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자, 작가이며 창조자인 것이다.
또한 시학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인생살이는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즉 추구서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 속에는 주인공이 있고, 주인공이 추구하는 목표와 대상이 있고 주인공을 가로막는 악당, 반대세력, 훼방꾼도 있다. 물론 주인공을 도와주는 친구, 지원자. 조력자도 있다.
그리고 시학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 쓰듯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삶을 헛되이 낭비하거나 함부로 우리 삶을 망치지 않으려고 한다. 삶의 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오직 돈으로만 소득을 계산하지 않고 세상의 흔한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반추해보고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학은 어느 특정한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만인의 시학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꾼이며 삶은 이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철들어 세상에 혼자 나서는 날까지는 계속 '뜻깊었다' 고 말할 수 있는 세상, 그가 혼자 골목을 돌며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우리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만들어야 하겠다.
인간은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야기' 속에 살고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로 자신을 만들어간다. 즉 인간은 '서사적 동물'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사회는 이야기로 짜여있고 이야기로 지탱받는 이야기의 우주인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승되는 옛 신화들 속에는 인간 존재의 한계조건, 삶의 딜레마,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암시, 인간 욕망의 모습에 대한 깊은 통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읽기를 통해 신화는 단순한 옛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즉 읽기가 신화를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p.93)
2. 만인의 인문학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동굴 속 구석기 시대의 벽화를 보고 "인간은 도대체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가?" 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 그림들은 왜 그려진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려진 것일까?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 진화해온 것과 인간의 예술적, 상징적 행위 사이에는무슨 관계가 있을까? 잠들기 전 잠시, 애인과 데이트하다가 잠시, 한 달에 한두 번, 1년에 한 번쯤이라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근원적 질문을 잊어버린 개인과 사회는 불행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철학적 반성의 순간은 놓쳐서는 안된다.
제 16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많은 독자를 가진 세계문학고전 [명상록]의 저자이다. 마르쿠스가 19년 재위 기간 중 마지막 10년 동안 전쟁터에서 쓴 것이 바로 이 명상록이다. 젊은 시절 그 황제는 정치보다는 철학을 하고 싶어 했다. 황제가 되고 난 후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데 그것은 바로 황제 집무실에 특별 임무를 띤 노예 한 명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노예는 하루 몇 번씩 황제를 향해 "폐하, 폐하는 인간이십니다." (p.137) 라고 말하며 인간임을 '환기' 시키게 했다는 것이다. 마르쿠스의 이 인간 환기는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는 '인간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한계성을 가지는가? 우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인간은 생명이 유한하고, 능력이 유한다고 쓸 수 있는 자원도 유한하다. 즉 육체를 갖고 태어난 인간의 유한성이 그 한계이다. 또한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유약하고 나약하며 취약하다. 그래서 인간은 유약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곧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지식, 판단, 예측, 기획에서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억하고 인정해야 하는 존재이다. 즉 이런 오류 가능성의 인정 여부, 이것이 겸손과 오만을 갈라놓는 경계선이 된다. 따라서 유한성, 유약성, 오류 가능성은 인간의 한계조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성의 조건이자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 존재의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약함으로 인해 공유하고 있는 고통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의무는 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애정은 부족함의 표시이다. 우리의 약함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난다." -루소 [에밀]-
"인간 아닌 동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어쩌면 이 질문이 황당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내가 나 아닌 것의 입장이 되어 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사건에 반응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인간은 자기 아닌 것의 위치로 자리를 이동시캬 생각할 줄 알고, 그 위치전환이 안기는 인지적 모험과 고난을 감당할 줄 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입장에 서본다는 것,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능하다. 그것은 내가 나를 키워 내 존재를 '확장' 하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훈련은 인간, 사회, 자연을 이해해기 위한 인문학적 훈련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133)
또한 저자는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와 같은 근원적 질문에 대한 사색도 하지만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현실과 문제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저자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그런 현상들을 새롭게 분석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겨레21>, <서울경제신문> , <중앙일보>, <경향신문>, < <한국일보> 등의 언론 매체에 칼럼에 실제로 쓰였다. 그 칼럼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다.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들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몰 플란더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인 몰 플란더즈는 도둑, 날치기, 사기꾼이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남자를 갈아치우는 여자이다. 사기꾼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녀의 말은 거짓말과 복화술의 언어이다. 이 소설이 큰 주목을 끄는 것은 자기모순에 대한 여자 주인공의 신비한 불감증과 그 불감증의 현대적 편만 때문이다. 도둑이면서 청교도이고, 사기꾼이면서 스스로 하느님의 착한 딸이라 믿는 여자, 그녀는 이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갈등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불감증이 가능한 것인가? 지금 우리는 개인주의와 성공의 문화가 지배적 규범이 되는 사회, 인간의 다른 어떤 성취보다도 경제적 성취가 유일한 가치로 강조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의 기술'일 것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몰 플란더즈가 사기를 쳐서 쉽게 돈을 벌면서 성공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마찬가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성공만이 최고의 도덕률이며, 그 밖의 것들은 논외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반인륜 범죄, 도덕 불감증 등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이 아니라 문제를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으로 함께 보는 시각인 것이다.(p.150) 그 시각이 있을 때만 문제적 사회를 보는 눈이 생기고, 그 사회를 교정하기 위한 노력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문화는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체의 양식과 체계들이 망라된다 (p.155) 따락서 문화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는 방식, 사람을 길들이는 방식, 죽음을 길들이는 방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적 지연은 빠르개 변하는 사회 변화와 느리게 움직이는 문화적 관성 사이에 현저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현대 한국인에게서 지적되는 많은 부정적인 형태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문화적 지연에 의해서 발생한다. 산업은 근대화되고 사회는 민주주의체제로 바뀌었으나 근대 이전에 형성된 관습과 태도, 행동방식은 좀체로 변하지 않았다. 집단주의, 혈연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권력추수주의, 배타주의, 권위주의 등은 사회환경의 근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리성의 문화가 배양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인의 부정적 행태들은 불변, 부동의 민족성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비판적 자기성찰의 부재, 곧 합리적 시민문화와 비판적 시민교육의 부재와 관계된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거울이다, 문화여, 거울 앞에 서라. (p.158)
3. 나가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나가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개 하는 것이 시학이다. (책머리 5쪽)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새로운 인생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써 온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글쓰기에서 퇴고가 중요하듯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의 방향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성찰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인 것이다. 인문학은 거창하고 어려운 학문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문학은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모든 것들이 인문학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인문학이 인문학 전공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씌어진 것이다." -책머리에 4쪽- 그러니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고쳐야 할 때이다. 최고의 멋진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도록 인문학적 질문과 사유를 통해 우리 주변 일상과 사물을 날카롭고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의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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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읽는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의 역사- 그 인문학적 질문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서양의 경우 ‘학문’은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먼저 발원하도, 이것이 서양 ‘과학’의 시초를 이룬다. 이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 세계이며, 이때 의미 있는 질문은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같은 것이다. p.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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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를 대상으로 그 본질과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자신의 성찰을 통해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살아갈 자세를 함양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인문학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적지 않은 인문학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 각종 단체와 언론들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그럼에도 과연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개인들의 성찰과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살아갈 자세에 얼만큼 기여했는가를 따져본다면, 회의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근본 원인은 '인문학'이 하나의 트렌드로서 전개되었을 뿐, 지식이 아닌 진지한 자기 성찰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여전히 가상화폐에 몰두하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분위기는 인문학적 성찰과 거리가 먼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추종자로서의 모습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거대 언론사들의 여론조작에 가까운 기사의 양은 인문학의 본질을 실천하려는 이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듯하다. 저자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서 들고 나온 것이 <만인의 인문학>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책 머리에'라는 글에서 저자는 '인문학이 인문학 전공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을 대상으로 하는 '삶의 인문학'을 주창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가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저자의 입장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며, 독자들은 그러한 덕목을 각자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만인의 시학'이라는 첫 번째 항목에서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의 본질을 설파한다. 어린아이의 에둘러 말하는 화법과 시장에서 좌판을 하는 아낙네들의 언어에서 은유와 비유의 실질을 발견하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 적절한 예시의 하나로 영화 <일 포스티노>에 등장하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예를 들어서 시라는 것이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의 교류를 통해서 이야기가 전파되고, 고대 동굴벽화를 통해서 인류는 왜 그림(예술)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자문하기도 한다. 신화의 본질은 거대한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이기에, 그 내용이 아닌 상징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상 인문학적 질문은 정확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서 깊이 고민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에 잇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만인의 시학'을 각자의 입장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하기이며, 그에 대한 해답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인문학을 삶을 대상으로 하는 삶의 인문학이며, 그것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인의 인문학'이란 제목의 두 번째 항목은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특정 키워드를 중심으로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 덧붙여져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키워드를 몇 가지만 들면 '엿보기', '질문', '자기애', '부끄러움' 등 30개에 달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저자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독자들에게 그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당연히 이에 대한 해답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저자는 단지 그러한 키워드에 대한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만약 저자가 이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여 제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지식'으로서의 진술일 뿐이라고 하겠다.
저자가 각각의 키워드로 삼은 주제들에 대한 논거들은 대체로 서구의 사상이나 지식인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아마도 영문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적 토양이 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인물이나 지식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독자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그러한 키워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2부에서 다양한 키워드를 제사하면서 독자들의 생각을 이끌어냈다면, 3부에서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인문학이 단지 질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축적된 지식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요긴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통섭'이라고 한다면, 저자가 '인간'을 탐구하는데 긴요한 분야오 끌어들인 것은 바로 생물학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전자를 분석하여 인간의 과학적 실체를 밝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쉽게 마련되지 못하겠지만, 결국 사람들이 남들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중에 거론된 사례들이 비교적 시일이 지난 사건일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말미에 수록된 발표 지면들을 보니 대체로 1995년부터 2016년까지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었다. 비록 쓰여진 때로부터 시일이 상당히 경과한 글들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인문학에서 제기하는 질문들은 유행이나 시효가 정해지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더라도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공감할 수 있었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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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행복론 <국부론>에서 시장이 돌아가는 것은 상인들의 관용이나 인류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 덕분이라 말한 대목은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부문이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플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거래할 때 우리는 그드의 인간애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이런 대목으로 판단하면, 혹은 잘목 읽으면, 스미스는 영락없는 자기애주의자 같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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