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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말한다. ‘...사무치게 살자’ 그 말대로 시집에 실린 시는 사무친다. 사무쳐서 며칠 사이 세 번이나 연달아 읽었다. 공감하고 감탄하고. 시집을 모처럼 펴 들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시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시인의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게 아니라 동감하게 한다. 느닷없는 생채기에도 속으로 삭이며 불쾌한 낯을 감춰야 하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자존>, 특별한 강조점이 없어도 마음 한편 울리는 일의 내밀함을 사유하게 한다 <심금>. 간절함과 간신히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사람과의 관계에 비추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물오르는 봄>, 부재일 때도 치열한 목련나무 한그루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목련나무 그늘에 서면>. 시의 해설자는 물의 이미지와 매치시킨 시를 가리키며 슬픔을 내치기보다 포용하려는 시인의 태도에 집중하는데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감정을 강제로 없애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는 <눈물점>과 눈멀어 물을 본 적 없는 <물고기 자리>의 물고기는 슬픔의 극점에 이르면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울어야 한다고 에둘러 말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다음에 오는 슬픔이 점점 강도가 약해진다고 자신이 있는 곳이 물속인지도 모르고 덤덤하게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나름 해석해본다. 시인에게 슬픔은 눈물이고 눈물은 곧 ‘물’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한 줄기 빗물에 섞이면 눈물인지도 알 수 없는. 눈물이 슬퍼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감정들 사이사이에 상주해 있으므로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시인은 길게 말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 시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직설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슨 뜻인지 한참을 궁리할 필요도 없는 시집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시인의 전작도 읽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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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것이 왜 늦게 도착한다고 생각하는가? 눈물과 슬픔이 지긋지긋하게 싫다는, 눈은 눈물을 볼 수 없어 눈물을 알 수 없다는, 슬픔을 느껴본 사람만의 느낌들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속 슬픔에 까지 도달해 슬픔의 위무를 즐기게 한다. 온통 환희스럽고 벅찬 감동으로 마주해야 할 일상인지도 모른다. **네이버 카페 책을좋아하는사람의 서평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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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변화하는 계절, 떠나가는 소중한 사람들, 어느새 삶의 풍경이 바뀌고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도시. 시인의 시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같이 한 박자가 늦는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늦게 도착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이 늦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이 깨달았을 때 삶의 아름다운 빛은 이미 사라진 뒤다. 시인의 시가 슬프고 서늘한 이유다.
잊혀진 삶의 풍경들은 슬픔에 이웃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절망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눈물에 부옇게 흐려진 세상은 이미 번진 뒤다. 이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우리는 섬세한 감각으로 안간힘을 쓰듯이 세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정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맞을까? 슬픔과 절망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니, 도태되는 삶에 아름다움에 숨어 있다니, 저자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순수한지 모른다. 되려 그런 작가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작가의 삶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은 언제나 멋진 일이다. 이름까지도 시인 같은 류미야 시인의 시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의 문장들이 그렇다. 시인의 시 섬세하면서 서늘하다. 아름다운 것들은 항상 늦고, 흩날리는 꽃잎들은 겨울의 유서라고 표현하는 시. 삶이라는 아름다운 '매혹'과 죽음의 '탐미'가 경계를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하는 듯 보인다.
눈물이 싫어 눈물과 같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기로 선택한 삶. 이미 물이 가득 차 눈물을 범람할 수 없다. 어떤 슬픔의 풍랑에도 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는 이미 슬픔에 침잠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시를 들여다볼수록 생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차오른다. 물고기의 생을 택한 화자의 선택이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은 고해(苦海)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결국 슬픔에 잠기지 않으려 물고기가 된 시의 화자는 슬픔에 익사되지 않기 위해 자주 울었다 표현한다.
시인의 시는 하나같이 슬퍼야 하는지 모르겠다. 눈 아래 있는 눈물점 때문일까? 시인의 눈물점은, 운다는 행위는 삶의 냉담과 눈먼 증오를 애도하는 하나의 절차다.
울음이 하나의 절차라니, 시의 화자가 애도하는 냉담과 눈먼 증오는 대체 무엇일까. 차가워진 도시의 풍경, 떠나간 지인들, 세상에 무덤덤해진 나. 삶의 즐거움과 감동을 잃어버린 나를 대신해 누군가 울어준다니, 시인의 시가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제의에 가깝고 눈물을 통해 삶을 다시금 정화되는 느낌이다. 운다는 행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이 시는 편안한 문장과 아름다운 시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숨겨진 삶의 아름다움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말랑말랑한 인스타 감성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시가 품고 있는 근원, 시인이 보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애절한 노력은 눈길을 끈다. 취향이 맞는다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오래된 친구를 만난듯한 그리움을 전달해 줄 시집이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42788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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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왜인지 시가 싫었다. 그냥 마냥 싫기만 했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나온 뒤로 사람들은 감성적인 글을 멀리하게 되고 낯간지러워 했다. 나 또한 그랬으며 왠지 그럴듯해 보이려 하는, 시는 허세 같은 존재였다. 나이를 한 살씩 먹고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시의 진가를 알게 됐다. 시에 나오는 표현들이 아름답고 감격스러웠다. 평소엔 잘 쓰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단어와 문장들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내는 시가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그렇게 시에 스며들어 하나둘씩 시집들을 찾아 읽어보게 됐다. 오글거려 하고 낯설어 하던 내가 부끄러워 질만큼 세상엔 아름다운 시들이 많았다. 그중 서울셀렉션 시인선 001, 류미야님의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도서의 표지색상은 진한 파란색에 분홍빛 제목, 자칫 시리고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시집이었다. 두껍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어디서든 시 하나쯤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내가 허세라고 느껴지고 오글거린다고만 생각했던 시를 이젠 언제, 어디서든 읽어보려 한다. 문득 아무렇게나 펼친 책장에는 따뜻한 시 하나가 담겨있었다. 이로써 차가워 보였던 파란색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이 된 것 같았다.
<꽃과 책>
바람이 넘겨보는 꽃잎은 시간의 책장
생각이 넘겨 가는 책장은 시간의 꽃대
각자는 절로 꽃 피어 서로 닮아 있지요 책을 펼쳐들고 첫 장 시인의 말을 읽어내려갔다.
. . 사랑할 만한 것들은 언제나 곁에 있고, 있었다. 우리가 늘 잊고 또 잊었을 뿐 . . 그렇다, 우리가 사랑할 만한 것들은 언제나 옆에 있고 늘 곁에 있었다. 단지 잊었을 뿐.
그리고 책 제목이자 주제가 되는 시, < 그래서 늦는 것들 >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 .
시집을 읽으며 파랗기만 했던 표지와 달리 내 마음은 어느새 제목처럼 분홍빛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때론 깨닫게도 해주는 문장들이 담겨있어 두고두고 다시 읽고 필사를 하며 다양한 색깔들을 느껴보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곧받아 작성 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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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선가 ‘시는 사물의 원리와 본질을 쓰는 것’이라는 의미의 글을 읽을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시를 좋아하고, 즐겨 읽고 있지만, 그냥 시는 미사려구나 읽기에 편한 율조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시에 대한 핵심을 알고는 오히려 시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류미아 시인의 이 시들을 읽으며, 단어를 선택하는 마술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분은 고등학교 교사라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쉽지 않은 일상에서, 이토록 절제와 여백의 미와 원리와 본질에 충실한 시들이 눈부시도록 빛나기만 합니다.
책을 펼치니, 정성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먹물로 제 이름을 써서 증정해 주셨는데, 너무 따뜻한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집의 제목,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는 시인의 ‘그래서 늦는 것들’이라는 시의 첫 소절을 차용한 것입니다.
저자가 선생님이 되어서 걸어 온 길을 따라가 보면, 모두 바다가 있네요. 해남과 여수와 남해, 학교가 위치하는 곳은 다를지라도 황혼에 서는 붉은 빛은 모두 남쪽바다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어느 가곡의 가사처럼, ‘내 고향 남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사는 제게, 귀에 익은 파도소리, 눈에 선한 노을빛, 어스름 달빛이 ‘팔월, 소낙비’의 시어처럼, ‘불현듯, 벼락같은 그리움에 눈물 왈칵 쏟아’질 듯 합니다. 그곳에는 시인이 목련 나무 그늘에 서서 보았던, ‘땅속의 발가락까지 꼼지락대고 있을 한낮’을 나도 언젠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년 봄이 금년의 봄이 아니듯이, 시인이 본 목련 나무가 내가 본 목련 나무일리는 없지만, 그리움이란 항상 오지랖이 넓고, 우물처럼 깊어지는 속성이 있어서, 시인이 레 미제라블의 시에서 차용한, ‘날아 든 돌멩이가 뾰족할수록 말여, 맞은 놈 설움이자 갑절 더한 벱이제’와 같은 차진 남도 사투리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간질이네.
코로나로 마스크로 입을 봉하고 사는 시절, 시인의 시어처럼, ‘미리 입어 본 수의(壽衣)’처럼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꼴사납지만, 삶이란 이렇게 궁상맞으면서도 살아가야 할 숙제이기에, 오늘도 시인의 ‘죽음을 살아 보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깊은 철학의 사유를 함께 공유해 봅니다.
시인의 시들은 반전이 탁월합니다. 이는 2019년 올해의 시조집상과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 이력이 말해 주듯이 시인의 뿌리는 시조라서 유독 절제의 미가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듯이 생활도 답답한 때에 귀한 시를 읽으며, 잠시라도 힐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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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류시화 시인 겸 번역가의 책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인생의 풍파를 두루 겪으면, 젊었을 때에는 채 알지 못하던 삶의 지혜가 어느덧 정신의 한 구석에 살포시 내려와 자리를 잡습니다. 파우스트는 늙어서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젊음에 대한 미련과 회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소중한 영혼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건 왜 늦게 도착하곤 할까요? 음... 반대로,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왜 절정의 아름다움을, 아무것도 모를 인생의 초반기에만 신은 허용하는 것인가?"라며 한탄한 적 있습니다(공교롭게도 p78에는 "레미제라블"이란 제목의 시가 나오네요). 이런 경우는 아름다운 게 지나치게 일찍 도착했다가 일찍 떠나서 문제겠습니다만, 여튼 우리들에겐 "이 좋은 게, 좀 내 곁에 일찍 나타나 주었더라면..."라는 아쉬움이 언제나, 그것도 좀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무료하고 무의미했습니다만(?), 이 류미야 시인의 시집에 실린 열아홉번째 시 <몽상가 류보 씨의 일일>은 고독하고도 번잡하며, 답답하지만 치열한 분위기입니다. 몽상가들은 대개 집 밖을 안 나가는 게 보통입니다만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저 어디 건대입구 정도는 붐비는 어떤 대로를 걷는 듯합니다. 아니면 그 근방 어느 원룸 창을 통해 구경을 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제 몸 사라지는 꿈을 뜬눈으로 꾸면서 대로를 질주하는 닳아지는 살들이 백주의 교차로에서 연신 긋는 십자 성호(p32)"
보통 이런 풍경에 누가 참여하는 게 아니라 뭐 진짜 엿보기라도 하는 중이라면 대체로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늦은 밤이기 쉬운데 여튼 또 "백주"라고 시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닳아지는 살들"은 고 이호철 소설가의 작품 제목이라고 각주에 설명도 나옵니다. 만약 밤이었으면 욕망의 지침을 따라 부나비처럼 배회하는가 보다 여길 수도 있는데 낮이라고 하니 이는 각자의 사업에 골몰하여 어디로 부지런히 다니는 중이겠습니다. 그런데 성호를 연신 긋는다... 그게 진짜 사업이라고 해도 우리는 운수와 우연에 그 성패를 맡기는 경우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냉혹한 계산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시나리오를 그려도, 마음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 게 우리들입니다. 이러니 나중에는 "불면의 밤이 올(p33)" 수밖에요. 밤에 대한 멋진 시상은 저 뒤 p76 <그들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뭐가 과연 더 아름다운지는 예전 가수 코나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매력점은 빼지 않고 없는 걸 일부러 붙이고도 다닌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눈물점"은 여러 가지로 애매합니다. "누구는 빼라 하고 누구는 오른쪽 왼쪽 뜻도 다르다 한다"는데, 같은 사람에게서도 누구는 천치를 보고 누구는 죄인을 본다 하지만, 시인은 눈물을 예비해야 참된 생이라 여기는지 그대로 두려 합니다. 모반(母斑)은, 억지로 없애러 들면 그게 이미 모반(謀反)이 됩니다. 한 번 사는 생, 지상에 작은 기여라도 남기고 떠날 생각은 못할망정 순리, 천리에 대한 역심(p26)을 품어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또, 눈물은 갈증에 대한 (정당한) 반역(같은 페이지)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머리를 매일 감죠. 더 긴 머리를 관리해야 하는 여성들의 경우 이는 "새벽의 의식(儀式.p13"이라 할 만합니다. "시리다"는 게 새벽이 시린 건지, 아니면 물을 끼얹고 때를 빼고 헹구는 그 과정이 시린 건지, 그도 아니면 가끔 눈에 들어가곤 하는 샴푸가 눈에 시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행간 걸림?).
"너에게 세례를 주노니 (아아 그러나) 잘 더럽히는 나여(같은 페이지)"
매일처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날 태어나게 하는 건 거창하게 메시아를 초빙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이, 보람이 참 쉽게도 사라지죠. (내가 날) 잘 더렵혀서요.
누구는 "강철 같은 무지개"를 논했지만,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작 여리여리한 날개만 부여 받은 게 우리들입니다. "강철 돛을 매달기(p19)"란 언감생심입니다.
"사랑 속에 죽겠네, 이것은 나의 방식
마지막에서 두번째의 행 "죄 다"는 부사 "죄다"인지, 아니면 "죄(罪)(를) 다(entirely)"인지 모르겠습니다(띄어쓰기는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행의 "아니듯" 뒤에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찍혀 있는데 저는 처음에 눈이 침침해서, 혹은 저의 잠이 덜 깨서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이 시집에는 사실 마침표가 하나도 안 나오고, 아주 간혹 저렇게 쉼표가 보일 뿐입니다. 여튼 이 역시 감상자에겐 호접지몽의 경지(...라기엔 풋)
"불가촉의 기억 속으로 떠나버린
여기서 기억은 뭐 불가촉이라곤 했어도 그저 멀어서 아득해서 (문자 그대로) 터치가 안 된다는 거지 보통 그 뒤에 살벌하게 따라붙는 "천민"의 뉘앙스와는 아무 관계 없을 겁니다(제 생각에는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주 먹는 품종의 사과에다가 이웃 열도의 후지산 이름을 착각하여 갖다붙이곤 하는 걸까요? 괜히 입맛 찜찜해지게 말입니다. 후지사과와 부사산은 그야말로 전생에 아무 연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막줄에서 "혁명은 어려웠다"고 내뱉는 양말의 말에서 대단한 오기와 허세가 느껴집니다. 정말 얘만큼 "잘 뒤집는, 뒤집히는" 팔자를 갖기도 어려운데, 그저 뒤집는(revolution) 게 혁명이라면 레닌이고 체 게바라고 간에 얘 앞에서 감히 발냄새도 풍길 수 없겠습니다.
"너를 말하기로는 이것이 좋겠네
이 시를 읽고 저는 걸그룹 마마무가 떠올랐습니다. 뭐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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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슬픔. 눈물. 고뇌를 품은 고백서
류미아 시인의 시집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보는 것 같다. 옛날에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했던가. 나이가 들면 시 쓰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이다. 빗대어 생각했을 때 나이가 들면 시 읽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해야 맞는 것이 되는 걸까. 아. 다시 생각해도 뼈아픈 농담이다. 문득 시가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십대 청춘기에는 가을에 특히 더 그랬지만 지금은 계절과 무관하게, 그냥 내 삶에 대해 질문이 늘어질 때가 그 때인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잘라먹을 꼬리도 없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장마가 가버리고 간밤에 폭염이 기승이더니, 한낮에 묘하게 바람이 선물처럼 불어오는 중이다.
밝은 남색일까. 파란 바탕의 표지에 흰 글씨체가 가녀리게 걸렸다는 인상을 받는다. 몇 개의 글자들이 아래로 모여있는 것 같은 디자인이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글씨들이 바닥으로 내려앉은 그런 느낌이랄까. 바닥으로 내려온 글씨에서는 어쩐지 평온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시인은 익숙하지 않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시집을 보았더라, 생각해보면 시인이 익숙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말이다. 문득 시대가 바뀌고, 흐름이 달라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시집이 계속 출간되고, 시인들이 새롭게 세상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이 멈춰선 나를 발견한다. 아마도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는 혼자만의 의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시집을 보면서 품었던 처음 생각은 ‘왜 시인은 이토록 슬퍼해야만 할까’, 라는 생각이었다. 슬픔. 상처 그리고 눈물이 사방에서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데 문득 나는 원래 그 슬픔과 상처 그리고 눈물 가득한 시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라는 생각에 머리가 흔들린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조금씩 비겁해져 뒷걸음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을 갖고 싶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류미아 시집을 통해 시인의 세계에서 위로와 쉼, 희망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고 적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시집이 그렇듯 이번에도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인을 따라가다 보니 공감할 수 있는 곳 어느 지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기도 하다. 사실 끝 간 데 없이 계속 우울과 눈물 속에서 그녀가 걸어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은 개인적인 기우였나보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고통과 슬픔, 눈물을 이야기하면서도 늘 어딘가에서 다가올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내가 좋아하는 시와 소설이 거의 그러했던가 보다. 사실주의 문학을 대변하는 시나, 이미지 중심의 시나 다 종결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어떤 대상이라든지 혹은 어떤 거대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경험하게 되는 여정 안에는, 슬픔과 고뇌에 침잠해야 하는 요소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통 없이 불쑥 찾아오는 희망은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런 까닭에 지금도 변함이 없이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희망을 위해서, 내일을 위해서, 오늘 감수해야 할 것들 앞에 불편함을 감추고 기여이 마주서야 한다는 조건은 어찌보면 지나치게 잔인하다. 피하고 싶으면 피하고 싶은 것 역시 인간의 심리이기에.
여기 류미아 시인의 이야기에서 시인이 어떻게 고통과 눈물을 마주하고 또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를 느껴볼 수 있을까.
-물고기자리
나는 눈물이 싫어 물고기가 되었네/폐부를 찌른들 범람할 수 없으니 / 슬픔의 거친 풍랑도 날 삼키지 못하리// 달빛이/은화처럼 잘랑대는 가을밤/몸에 별이 돋아 날아오르는 물고기/ 거꾸로 박힌 비늘도 노 되어 젓는//
숨이 되는 물방울……/숨어 울기 좋은 방……/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그래야 흐를 수 있지/그렇게 날 수 있지//
생은 고해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물고기자리 전문-p14
-별
어느 밤/동굴처럼 캄캄해져/울고 있는데//
터진 눈 반짝이며/그들이 내게 말했다.//
여기 봐, 날 좀 보라고, 별거 아냐 부서지는 거.// -별 전문-p44
-냉정과 열정 사이.(부분 인용)
온 힘으로 무너지는 꽃들을 한번 보아/ 그 어느 잎 하나 슬픔을 생각하겠니/ 그래서 꽃 피는 거야/ 다음 봄이 오는 거야// -냉정과 열정 사이-p85
숨어 울기 좋은 방, 생은 고해와 고뇌로 가득찼는데, 그 순간 슬픔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울어야 했다는 시인의 고백이 한없이 무겁게 다가온다. 한순간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보지 않은 이가 과연 정상에서의 희열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까. 부서지고 넘어지고 떨어지는 순간순간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은, 정면으로 대응하고 순응하는 일이다. 넘어지고 떨어지고 깨지고 그렇게 좌절하면서도 스스로 일어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의 소견은, 이쯤에서 어쩐지 어색한 비극적 페이소스를 연상하게 하는가도 싶다.
거대한 물의 흐름을 한 귀퉁이에서 잠시 막는다고 그 힘을 다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온전한 한 권의 시집을 읽고 몇 글자 되지 않는 글로 표현하는 일 또한 온전한 일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어리석은 일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읽고 여전히 감상에 젖어 끄적이는 나는 또 무슨 염치없는 인간인지 모르겠다.
시집을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나이를 운운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졌듯이 내게 찾아와 말 걸어주는 시상도, 시어도 예전 같지는 않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희, 노, 애, 락’을 함께 풀어내고 공유하는 시인의 열정과 애잔함은 외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인과 독자의 자리에서 함께 감정의 정화를 나눌 수 있다는 즐거움은 변함 없이 이어지는 희열이다. 이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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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의 색이 주는 분위기부터 오묘하고 감성적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처음에는 무심하게 제목을 떠올려보았다가 작품들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저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감성과 제목의 결이 어떤 느낌이었겠구나'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100여 페이지가 살짝 넘어가는 얇고 가벼운 분량 거기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느낌을 중심으로 하여 감성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작품들의 비중도 꽤 있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요즘의 독자들이 되도록이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은 다양한 느낌을 받으면서 읽었다. 옛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시대성이 현재라서 그런건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심심할 수 있을 작품에 눈길을 끌 수 있는 변주를 주어 ( ex. 심금, 봄) 눈길을 끌게 만드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특히 감성적이게 되는 무더위 새벽,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은 시간, 생각이 많아지는 언젠가, 인간 관계에 헛헛함을 느꼈을 때 등 감정이 복잡미묘해지는 어느 순간순간에 한 두 작품씩 문득문득 읽는다면, 어쩐지 나와 비슷하다거나 의미가 더 와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시집이다.
시를 읽는 다는 것, 시집을 펼친다는게 어딘가 낯설고 사치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시집을 출간하고 이야기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 아름다운 것들은 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시 또한 사람들에게 늦게라도 도착하길.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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