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시작하며, J.S.밀은 “이 글의 주제는 (...) ‘시민의 자유, 즉 ’사회적 자유‘를 다룬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가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개인을 상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한계에 대한 것이다.”라고 시작한다. 이 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회 또는 국가의 개입, 통제는 어느 경계부터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사유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 J.S.밀은 ’사회효용의 극대화를 이루는 최대 행복원리를 도덕률 제 1원칙으로 하는 공리주의자‘ 라는 점에서 이 책, 『자유론(On liberty)』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효용(Utility)이 우선되는 자유‘에 대한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론』의 서술 구성이 진리와 효용 추구의 중대한 가치를 에둘러 말하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 그리고 ‘행복의 요소로서 꼭 필요한 개성에 관한 고찰’이라는 사회적 효용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점유하고 있는 이유이다.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개인의 자유가 타인과의 관계가 발생할 때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근거란 것이 사실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대체 누가 이 기준을 마련한단 말인가? 여기서 ‘효용론’이 그 힘을 발휘한다.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이나,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에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부나 행복을 감소시키는 행위가 될 경우 그 자유는 억압, 통제, 처벌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의 크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자유 지상적 견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밀은 자신만의 공리를 내세운다. 개인의 자유재량에 일임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익일 경우, 사회가 통제하면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해악이 발생할 경우, 사회가 단지 간접적 이해관계만을 갖는 경우의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간접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유는 왠지 개인의 절대적 자유로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행한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합(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자유 형태가 될 것이다.
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간접적 이해관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도덕적 감정이나 행위 등까지 온갖 통제의 손길을 미치던 전제 군주나 종교권위가 휩쓸던 암흑의 시대가 아닌 오늘날에 있어 인간 개인의 내적 영역인 의식을 구속하거나 하려는 것은 실로 가당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에는 이러한 내부 의식세계의 영역에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기호의 자유와 행복추구의 자유가 절대 불가침의 자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성은 없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와는 유사하지만 언론, 출판의 자유는 개인 일신상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공중을 향해 드러나는 자유이기에 의도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불특정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개인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에 절대 불가침의 권능을 부여하면 해악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밀의 논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의 의견도 ‘절대무오류’의 진리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맹목적 신뢰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으며, 시대라는 것도 개인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 일 수 있음을 차단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억압되는 의견이 설혹 잘못된 것일지라도 지배적 의견이란 항상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에 일부 진리를 포함할 수 있으며, 셋째는 이미 일반에 널리 인정된 진리가 있을지라도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대다수는 편견을 품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을 잃게 되며, 끝으로 참된 진실로 향하는 전제인 비판을 통한 완전한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인류의 인성과 행동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상실시켜 진리의 확신을 미완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고 억압된다면 개인들은 누구의 비위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결코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거나, 두려워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되고 이성이 겁에 질려 사상의 발전은커녕 획일화로 인한 편협한 세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별성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자유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 할 수 없으며, 이 다양성은 개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개성의 시대라고 부추기는 오늘은 자유의 기초위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오직 욕망과 충동으로 치달아 좋지 못한 행위로까지 비난받기도 한다.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개성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밀은 결코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양심이 허약해졌기 때문이지, 욕망의 열정은 무감각과 나태함보다 언제나 보다 많은 선(善)을 낳았으며, 독창성의 효용을 알지 못하는 자의 잘못된 이해라고 지적한다. 역시 공리주의자다운 쾌락중심의 주장이다. 그러나 같은 공리주의적 논리를 역설적으로 적용하였을 경우 그 개성이 대중에게 어떤 어리석고 저속하며 타락적인 해를 주는 것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권리, 싫은 것을 피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J.S.밀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도덕적 벌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단지 비호의적 판단인 악평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는 불편일 뿐인 만큼 감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혐오스런 개성일지라도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지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행복이 증진된 사람과 감소한 사람이 동일하다면 행복의 양이 변한 것이 없으니 사회가 간섭하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고착화되어 공동체의 의식을 저해하고 이기적 개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타락이란 오명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시대가 지나면서 과거의 진리가 새로운 시대의 진리에 부정되기도 한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으로 개인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임을 부정하게 된다. 즉 공동체의 ’연대의식’이라는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에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서 출발한 개성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욕망의 과잉으로 내 닫게 되면 우린 그것에 무언가 간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을 쾌락, 즉 전체의 행복의 도구로만 보는 그런 자유의 정의는 왠지 도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 어
근대적 시민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나선 이 책은 이와 같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개성이 자유의 필수 요소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적 권위의 경계와 한계, 시민적 자유의 공리적 권위를 지니는 원리의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라는 주제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층적 사례와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며 부딪치는 각양의 정의의 문제에는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본질적이며 인간사회 전반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의 기준에 대한 밀의 공리는 세상을 보다 신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토록 견인한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못과 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적 진리조차 치열한 공박과 싸움에서 비로소 참된 의미로 접근해왔다. 논쟁이 가라앉는 것은 의견의 통일이 될 수 있지만 의견의 다양성의 범위가 좁아져 진실과 진리의 방향을 상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리는 두 편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가 진리의 한 부분에 불과해서 반대의견을 통해 보충되고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J.S.밀의 표현의 자유와 그 실행의 자유에 대해 제시하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사안의 중대성”과 같이 직관적이고 지나친 융통성으로 계급이나, 국가의 권위에 의한 자의적 폭력의 발상이 의심되는 주장도 있다. 이념과 관습, 사회적 정서로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통제하여서는 사회적 행복을 감소시킨다고 하였다가 “‘사유재산 소유는 강도짓 같다’는 주장을 연설이나 현수막을 걸면 사안이 중대하여 (누가 중대하다고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벌하여야 한다.”고 하니 모순이며,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밀의 자유주의 기조가 지닌 사회효용의 비중이 부르주아 계급사회의 행복에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랄 수 있다.
당대의 시대성이나 계급적 이익을 벗어나지 못한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배적 여론이나 정서의 횡포,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념과 관습의 강요 등으로 인간의 개성을 정해놓은 형식에 맞추도록 강제하려드는 것, 달리 말해 사회적 불관용, 편협함에 의거한 무지한 대중 여론의 공격과 같은 지성과 진리를 소거하는 문화에 대한 통찰들은 점점 쪼그라드는 오늘의 우리네 정신의 세계에 경종을 울려준다.
이처럼 자유의 정의를 넘어 개방적이고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와 정의, 진리의 탐구는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라는 정치철학 그 이상의 엄숙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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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정 자유로운가? 이런 식상한 질문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물론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한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리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구호가 쉽게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인 진리'일까? 다수의 주장에 따르는 것이 '최선'일까? 우리는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진리에 더 가까우며 모두의 행복을 위한 최선이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주장'일지라도 따르지 않아야 할 때가 있고, '소수의 의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상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이 쓴 <자유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어야 하지만 사회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제한을 둘 수도 있으며, 국가를 위한다는 이유로, 또는 그 어떤 이유로도 개인의 자유를 함부로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거기다 밀은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를 '적대적인 시선과 위협적인 검열이 가득한 사회'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자유론>은 이런 곱지 않은 시선과 검열로 자유를 해치는 것이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내용이 담겼다. <자유론>이 쓰여진 지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과연 진정 자유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대한민국은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다. '국론통일'이란 허울 좋은 명분으로 허구헌날 다른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온 나라 사람들이 '한 가지' 사상을 가져야만 한단 말인가. 달리 말해서, 어떤 사상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강성한 우익집단은 '자유대한민국'이란 말에 목숨이라도 걸 자세인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에는 결코 자유가 없다. 그 대척점에 선 부류들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반공이니, 애국이니, 떠드는 반대쪽에선 친일이니, 적폐니, 하면서 '대결적인 자세'만 취할 뿐, 진정한 대화와 화합을 모색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타협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자유를 논할 수 있느냔 말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신분과 계급의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라고 할 수도 없다. 비록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없어지고, 남녀간의 심한 차별도 심하지 않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경제적인 부의 차이'가 새롭게 신분을 만들고 계급을 창출하고 말았다.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를 이르는 말이다. 이런 부의 불평등이 과거의 계급적 갈등을 재창출하는 사회현상이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만큼 빠르게 갈등의 골이 깊어진 나라도 드물지 않다는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려는 의지가 매우 미약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자유'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결코 '국론통일'이나 '부의 평등'을 위한 좁은 의미의 자유가 아님도 함께 깨달아야 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생각해야 할 때란 말이다.
먼저, 남의 생각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특히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는 핑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다른 이의 생각은 겸허한 자세로 '경청'하면 된다. 그리고 존중해야 한다.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생각일지라도 끝까지 들어줄 교양을 쌓아야 할 것이다. 끝까지 들어준 뒤에 조목조목 '그와 다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 된다. 내가 남을 존중할 때 남도 나를 존중받는다는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진정 자유로운 사회일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부를 쌓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거나 유명 인사라는 등의 이유로 '자신들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특히, '대의정치'를 빌미로 지역주민들의 대표 행세를 하며 자기만의 고집스런 생각을 바탕으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들의 꼴값은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다. 고작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주민들, 나아가 국민들의 생각은 들어보지도 않고서 특정 정당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꼬락서니는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몇몇 대기업 회장들의 모임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시절도 더는 아니라는 말이다. 인기에 부합해서 '자신의 생각'이랍시고 숟가락만 얹으려 하거나, 유명인사의 목소리라면서 부적절한 여론을 형성하려는 '기레기들의 집합소(언론기관)'도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무엇에라도 자유로워야 한다. '나의 생각'으로 인해 위협받거나 억압받아서도 안 된다. 진정한 자유는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유'라면 나와 생각이 '같거나 다르거나' 아무런 편견없이 수용하고 날카로운 비판도 아끼지 않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왜냐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생각에는 '일부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조그마한 일부의 진리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다. 그러기 위해선 '거짓'을 가려내는 혜안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자유론>과 같은 인문철학을 교양으로 삼아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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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리뷰-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1. 자유론 주변만 두리번거리다. 고전읽기의 중요성과 가치를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위대한 분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굳이 내가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다만 내 스스로 고전읽기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지식과 경험이 쌓였고 예전보다는 덜 흔들리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정되고 화석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의 지식은 가족과 주변 지인들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이 알고 용어만 들어봤음을 의미할 뿐이지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만한 처지가 못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사상과 인물에 대해 듣게 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다. 나의 경험도 어떠한 일의 한 방향만을 의미하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방향에 대해선 무지하고 편견에 가득할 때가 더 많다. 나의 경험이 전부이고 옳다는 생각으로, 다른 경험과 의견에 대해서 닫혀 있을 때가 내 젊은 시절보다 더 많다. 반성적으로 나를 평가하자면 우아한 꼰대로 향하여 가는 흐르지 않는 고인 물이 될 거 같다. 요즘 공부하는 게 힘들지만 재미있다. 그리고 지금 공부할 수 있는 내 삶에 감사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머물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한다. 대학원 공부는 학부의 공부와는 조금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분야로 세분화되어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공부라는 차원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하고, 나 자신의 지적 만족에서 현시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문제 제기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학이 문학이라는 그릇에서만 머물고 흘러넘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생각했다. 나 자신의 개똥철학에서 머물지 않고 아직도 여전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나름의 해답이 없다는 결론에서 고전읽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처음 시작인데 이유가 너무 거창해서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 고전읽기의 책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선택한 것은 그냥 북 리뷰를 써야할 일이 생겨서 읽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업무와 과제로 밀리다보니 이글을 쓰고 있는 현재 40페이지정도 읽은 상태이다. 나는 책 내용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책표지, 저자의 생애, 직업, 가족 등 그 주변에 더 관심을 빼앗길 때가 더 많은 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한 19세기 영국 사상가이다. 벤담과 함께 양적 공리주의자인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서 엄격한 영재교육을 받았고 후에 밀은 쾌락 자체의 질에 따라 저급한 쾌락(만족content)과 고급한 쾌락(행복happiness)으로 나누어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라고 표현했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타고난 사회적 감정으로 행위 당사자의 행복뿐만 아니라 모든 관련 당사자의 행복까지 고려하는 존재로 인류 전제의 행복을 자기 행복을 동일시할 수 있다.(p14)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념과 사회가 그 개인의 자유를 어느 선까지 제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자유론’의 책표지는 점묘법의 화가로 유명한 ‘조르주 쉬라의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이 그림을 책표지를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사람이고 쉬라는 프랑스 사람이고 그림도 밀의 사망이후의 작품이다. 굳이 연결점을 찾자면 측면이나 정면을 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계급, 성별, 나이를 떠나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조화롭게 실현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랑 어울려서 선정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철학적 지식이나 사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일차 목표이고 거기에 아주 작은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다. 아무튼 끝까지 가봐야 많이 쌓여야 알 일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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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말이 요즘처럼 많이 언급된 적도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이후로 국가의 통제 범위가 넓고 깊어지면서 부터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는 사흘이 멀다하고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설 기사들이 많이 보인다. 자유 민주주의가 먼저 싹튼 곳이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국가의 보건 정책을 사생활 간섭으로 여기는 집회가 끊이지 않는다. 밀이 지금 이 코로나 시국을 보면 뭐라고 논평을 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서도 작년에 집회 관련하여 몇몇 논객이 밀의 <자유론>을 언급하면서 새삼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한동안 잊고 있던 명저를, 며칠 전 예스24 리뷰어클럽이 제공하는 서평 이벤트에 응모하여 당첨자가 되어 이제야 읽게 되었다. 자유론의 핵심은 '개인은 자기 행동이 자신을 제외한 타인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경우에는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지만, 타인의 이해관계에 해가 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 존재하는게 원칙이지만 공동체의 안정과 발전에 저해되는 자유는 용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만 자유는 적용된다. 또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권한도 없다'고 못박는다. 왜냐면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며 저마다 개별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론, 관습, 통념이라는 잣대로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내 생각이 절대 옳다는 무오류의 자만에 빠지는 순간 권력자라는 이유로 또 부모라는 이유로 우리는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성향이 있다. 그럼 불완전한 인간이 개인의 자유를 지키면서 동시에 공동체 이익을 위해 가장 중시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밀은 '자유로운 토론'이라고 설파한다. 토론에서 오가는 반대 의견들이 서로 수렴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서로 동화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이 주장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토크빌의 사상을 차용한다.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폭정에서 벗어난 듯 보이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시민은 국가와 사회라는 또 다른 통제 속에서 주류 다수의 관습에 순응하며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 다양성은 사라지며 욕망 결핍과 내적 검열이란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인해 개인의 기호, 성향, 개성이 죽어가는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따라서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사회에서 개인이 해야 할 책무는 자신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자기 수정 능력을 토론이라는 공론화된 장소에서 함양하는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사유하는 내적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니 암묵적으로 추종하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타인이 듣기 싫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촉구한다. 여론, 관습,통념이 지배한 사회는 나다운 삶이 파괴된다. 위협적인 검열이 여전히 존재하는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은 내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며 비슷한 경제 수준으로 살아가는 타인이 무엇을 하는지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더 높은 경제적 수준으로 살아가는 타인이 즐겨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성격과 기질에 맞는 것을 고민하고 타고난 자질을 어떻게 발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책 맨 마지막에 소개된 밀의 명언을 음미해보자. "인간은 그 본성상 어떤 모델을 따라 만들어져 미리 정해진 일을 하도록 설계된 기계가 아니다. 일종의 나무와 같아서 내면의 힘이 지닌 성향에 따라 온 사방으로 자라나면서 발전할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길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찾아가고 있는지 밀은 묻고있다. 자신이 주권자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가? 코로나로 신음하는 세계를 보며 밀은 어떤 조언을 할까? '논쟁이 되는 주제에 대해 시민이 결론을 찾을 때 편견을 주입하려는 국가의 모든 시도는 해악'이라고 본 자유론의 저자는 아마도 이럴 때 일수록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놓고 다수가 다투기보다는 한 명의 바이러스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에 따르며 합당한 의견과 근거를 가진 자유로운 토론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할 지 모르겠다. 전대미문의 사태에서 큰 국가가 등장한 것은 시민의 일시적인 양보일 뿐 사태가 안정되면 작은 국가로 돌아가고, 개인은 인격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더 힘써야 한다. 개인이 자신에게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의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향후 자유가 침해받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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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더클래식 서양고전 002번 흔히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를 자유에 관한 '경전'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자유론》이 막연히 벽돌 뚜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벽돌처럼 두껍지는 않았다. (두께는 사진 참조.) 더클래식 서양고전시리즈 《자유론》에는 '《자유론》을 읽기 전에 먼저 알아두면 좋은 키워드' 챕터(11p~20p)가 있는데 이 챕터를 꼼꼼히 읽으면 본문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질적 공리주의, 사회적 감정(사회성), 자유의 원칙, 사회와 국가와 개인, 개별성, 진리의 불확실성과 토론이 이 챕터에 있는 《자유론》의 키워드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19세기 질적 공리주의자이자 자유사회주의 정치철학자이다. 19세기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정착하면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 성장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정치적 방임, 산업자본가와 노동자계급 사이의 극심한 빈부 격차(불균형한 소득분배)에 따른 대립과 반목, 실업과 공해 등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던 시대였다.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수정적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고 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자유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쓰여졌다. 밀은 1) 내면적인 영역의 자유 2)취향과 추구의 자유 3)자유로부터 결사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고유한 영역으로 설정하고 이것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어떤 정치 형태라 할지라도 자유가 없다고 보았다. 논리는 정말 간단해 보이지만, 이 매커니즘이 깨졌을 때 사람이 당면해야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전시 상황, 독재 정권 등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상당히 제약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정보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론 #존스튜어트밀 #더클래식 #서양고전 #더클래식서양고전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된 글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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