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앤 디디온의 책을 처음 읽어보았습니다. 매우 유명하고 화려하게 인생을 산거 같지만 실은 그녀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견실하게 글을 쓰며 삶을 마주한 좋은 작가의 책을 앞으로도 계속 읽고 누구에게나 힘든 인생을 함께 의지하고 살고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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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uching Towards Bethlehem
조앤 디디온 Joan Didion. 그녀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참으로 많다. 원조 쿨걸이자 영원한 쿨걸, 미국 에세이의 살아 있는 전설 등. 시대를 앞선 스타일로, 영미권에서 '통찰력 있는 에세이스트'를 넘어 신화가 되었다.
1968년 출간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그녀가 취재한 기사와 에세이를 엮은 첫 논픽션으로, '지난 60년간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에세이 선집'이자 소설처럼 읽히는 뉴저널리즘의 고전으로 꼽힌다고 한다. 디디온 스타일의 원형과 정수가 담겼다고도 평가되는 이 책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보그 Vogue,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Saturday Evening Post, 홀리데이 Holiday, 아메리칸 스칼러 The American Scholar 등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총 20편의 글이 실려 있다.
책을 펼치면, 서문에 앞서 예이츠의 시 전문과 디디온의 30대 시절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실려 있는 글이기도 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Slouching Towards Bethlehem>는 아일랜드 시인 W.B Yates의 [The Second Coming]이라는 시에서 따왔다. '글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라는 유명한 문장이 적혀있는 서문부터 강렬하고도 솔직한 문장의 스타일에 사로 잡혔다. 발췌하여 기억하고 싶은 글귀 또한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만큼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이 책의 제목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인 이유는 앞에 실은 예이츠의 시가 외과수술로 이식한 것처럼 몇 년째 내 귓속에서 웅웅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넓어지는 회오리, 매잡이의 소리를 듣지 않는 매, 태양처럼 무표정하고 무자비한 시선, 이 시 구절들이 내 준거점이었고 오로지 이 이미지들에 대비할 때에만 내가 보고 듣고 사유하는 것들이 패턴으로 정렬되는 느낌이었다. p10 이 책에 실린 글이 모두 주제 면에서 보편적인 붕괴와 만물의 해체를 다루는 건 아니다. 그런 건 거창하고 주제넘은 개념이며 이 책에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글도 많다. 다만 나는 카메라의 눈도 아니고 내게 흥미롭지 않는 글을 쓰는 데 취미도 없어서 내가 쓰는 글은 무조건, 간혹 불필요하리만큼, 내가 느끼는 바를 반영한다. p12 이 글들에 대해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른 것보다 더 쓰기 좋았던 기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글이 쓰기 어려웠고 아마도 글의 가치에 비해 너무 오랜기간을 쏟았을 거라는 말은 할 수 있다. 잘못된 서두가 적힌 종이들로 말 그대로 도배된 방에 앉아서 한 단어 다음에 다음 단어를 이어 쓰기가 어찌나 어려웠는지, 혹시 나도 모르게 경증의 뇌출혈을 앓았고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실어증에 걸린 게 아닐까 상상하며 글을 썼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p12
이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황금의 땅 라이프스타일'은 미국 반문화Counterculture 현장을 기록한 논픽션을, 2부 '개인적인 글들'에서는 개인적인 글쓰기나 자존감,도덕성 등에 관한 에세이를, 3부 '마음의 일곱장소'는 장소에 관한 글을 담았다. 각 장에서 다루는 글의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나는 처음 이 책을 훑어보다가 2부 먼저 읽기 시작하고, 1부로 넘어가는 순서로 읽었다. 아마도 디디온이라는 작가에 먼저 다가가 알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부에서는 반문화Counterculture를 대표하는 사건, 인물과 현장들을 탐사하며 취재하고 1960년대의 미국의 허상과 위험을 가감없이 기록하여 고발한다. 조앤 바에즈와 평화주의 운동, 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의 라스키 동지를 통해 미국의 적확한 초상을 그려내려 했고, 배우 존 웨인에게서는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괴짜 백만장자 하워드 휴스에게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을 보여 주기도 한다.
[황금빛 꿈을 꾸는 사람들 :어느 살인에 대하여] 황금빛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루실 마리 맥스웰 밀러의 사건이 있다. 고든 밀러는 첫눈에 반해 루시 밀러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은 희망과 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다. 그러나 치과 의사가 되어 불행했던 고든 밀러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결국 체념의 상태를 유지한다. 어느 밤, 남편을 폭스바겐에 태워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는 살인 혐의를 받게되는 루시 밀러는 남편을 살해하기 전 불륜의 관계까지 밝혀지게 된다. 결국 사랑과 탐욕의 동기를 가지고 충동적인 악녀가 되어 일급살인이라는 유죄를 선고 받게 되는데.... 짧은 스릴러 소설 한 편과도 같이 담담한 문체로 써내려간 글을 읽고 나면 결혼에 대한 환상 혹은, 사랑과 배반에 대해 한 번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황금의 땅에서 미래는 항상 좋아 보인다. 아무도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여기는 뜨거운 바람이 불고 과거의 방식은 무의미해 보이며 이혼율은 전국 평균의 두 배고 서른여덟 명 중 한사람은 트레일러에 사는 곳이다. 여기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의 종착지다. 추위와 과거와 구식의 삶으로부터 멀리 표류해 온 이들. 그런 사람들은 여기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찾으려 한다. 유일하게 그들이 볼줄 아는 매체인 영화와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루실 마리 맥스웰 밀러 사건은 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바치는 타블로이드의 기념비다. p21 불행한 결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닮았기에 우리는 이 결혼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파고들어 굳이 많은걸 알려 할 필요가 없다. p25 이 사건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루시 밀러를 기소하려던 근거가 법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석간 신문의 8단 표제를 장식한 적은 없어도 항상 존재했던 어떤 것, 바로 허망한 꿈들이 꿈꾸는 자에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쳤다는 깨달음에 있었다. p36
[결혼이라는 부조리극 :라스베이거스 웨딩의 낭만에 대하여] 누구든 5달러만 내면 결혼 허가증을 얻을 수 있고, 결혼 전용 예배당이 열아홉 군데나 있는 곳,라스베이거스. 모든 서비스는 휴일없이 24시간 제공되며, 여기서 치뤄지는 결혼의 전제는 일종의 게임이다. 결혼 산업이 극단적인 기능적 효율성을 갖추고 또한 격식은 당당하게 상품화되어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밤과 낮,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도 없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의 논리적 감각도 없고, 현실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다. 방금 전 결혼식을 마친 신부는 '내가 꿈꾸고 희망했던 그대로 정말 멋진 결혼식이었다'고 흐느낀다. 이 환상에 대한 배반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의 실제 기대치는 기묘하게 자기모순적인 사업으로 보인다.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정착지의 가장 극단적인 양태며 알레고리로서, 돈 욕심을 부리며 즉자적 쾌락을 헌신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이 기괴하고 아름답다. p119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히피라 불리는 미아들의 네버랜드] 이 글은 이 책에서 분량이 가장 많기도 하고 책의 제목과도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다. 디디온은 이 글을 쓸때 만큼 아파본 적이 없었다고 서문에서 말했다. 그녀에게 괴로운 시기이기도 했고 통증을 진이 덜어주었듯이 괴로움은 일이 덜어 주었다고도 고백한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원자화의 증거, 만물이 해체되는 물증을 정면으로 직접 다루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갔던 이유는 몇 달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였다. 글쓰기가 무의미한 행위고 내가 아는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p10
사라진 아이들이 한데 모여 '히피'라 자처하는 곳, 샌프란시스코. 1967년 추운 늦봄,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본인 스스로도 무엇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녀는 가출한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약과 비행 청소년이 문제인 여기 헤이트 애시베리 지구에서는 '히피'라 칭해지는 아이들 모두가 약에 취해 절어 있다. 다섯 살인 수전이라는 아이마저도. '히피 현상'은 단순히 아방가르드 운동이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저항과 같은 낭만적 이상주의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사회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아예 모른다고 진단하며, 히피라 불리는 그들을 포장하지도 필터를 씌우지 않고 현장에서 받았던 날것의 느낌 그대로를 글로 전한다. 장면과 장면, 인물들이 파편처럼 기술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 씌여 있는데 글을 읽고 나면, 결국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고 만다. 믿을 수 없고 짧은 탄식만이 입가를 맴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독하게 아팠다는 디디온이 묘하게 공감된다. 그 어떤 장황한 감상이 없이 문체는 기괴하리만치 담담하다. 그러나 나는 내면에서 허물리는 이 감정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보고 있었다.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본 이상, 그 진공상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원자처럼 쪼개지는 사회를 복구할 수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었다. p175 미국의 반 지성주의를 바라보는 씁쓸한 눈길은 1부에 실린 모든 글을 관통하는 화두다. 디디온은 반문화에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고싶어 했지만 보지 못한것 같다. 오히려 사회적, 문화적, 지성적 진공 상태에서 뭔가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는 무지한 아이들의 안쓰러운 노력을 보았다. p342
2부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듯 하면서도 더 확장된 세상에 대한 시선을 응집시킨다. 자신의 글쓰기, 자존감이나 도덕성에 관한 글, 가족이나 샌타애나 바람에 관한 글 등 5편이 실려있다. 여기서도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노트쓰기 : 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충동을 느꼈고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디디온.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면서 혼자 노는 법을 배우라며 엄마가 주었던 '빅파이브' 태블릿 노트를 회상하기도 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p189 그래서 내가 노트를 쓰는 이유는 과거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내 행위와 사고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충동으로, 가끔 부러운 마음이 들지만 내게는 없는 현실을 향한 본능이다. p190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 언제나 그게 핵심이었다. p193
[자존감에 관하여 :내 삶을 내가 책임진다는 것] 이 글은 '보그'에 입사하여 쓴 칼럼이다. 그녀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예리한 시각 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마음가짐마저도 정직하고, 용기있고, 꾸밈이 없음을 가감없이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그러했다기보다는 부단히 추스리고 노력하였음을 이 글을 통해 알게 된다. 그녀의 스타일처럼 평가되는 성품인 높은 자존감과 치밀한 윤리 의식은 갈고 닦여진 것이었음을. 디디온은 힘든 일이지만, 과거의 부끄러운 자신 그대로의 진면모를 보는 것은 진짜 자존감의 시작에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자존감은 타인의 인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타인의 인정이나 평판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를 존중할 때만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고, 자존감을 가진 사람만이 실수하는 용기를 갖는다고 한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터프함, 소정의 윤리적 배짱을 보여준다. 과거에 '한 성격Character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는 인정받아도 간혹 더 즉각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미덕 앞에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곤 하는 자질이다. p205
3부에서는 그녀의 고향인 새크라멘토부터 하와이, 앨커트레즈, 뉴포트 벨뷰 애비뉴, 멕시코, 로스엔젤레스, 뉴욕 등 7개의 장소에 대한 7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녀는 그 장소들을 여행하며 느낀 점을 예리하고 비평적이며 주관적인 글로 담아 낸다.
[캘리포니아의 딸이 쓰는 단상 :새크라멘토] 이 글은 단순히 고향이었던 새크라멘토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가 늙어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 우리가 깨뜨리는 약속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새크라멘토가 바로 캘리포니아고, 캘리포니아는 대호황의 정신세계와 체호프적인 상실감이 불편한 유보상태로 만나는 곳이다. 정신은 의식 깊은 곳에 파묻혀 있으나 지울 수 없는 생각, 말하자면 여기서는 왠지 만사가 잘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 이 광활하고 표백된 하늘 아래 이곳에서, 우리가 내쳐 달려온 대륙이 끝나기 때문이다. p241 훗날 뉴욕에 살게 되었을 때 나는 일 년에 네댓 번 새크라멘토로 돌아갔고 애시당초 떠날 생각이 없었음을 증명하려 애썼다.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 캘리포니아는 에덴과 비슷했다. 복된 땅에서 무단이탈한 이들은 당연히 추방당했다는 전제가 깔린다. 마음에 어딘가 도착적인 흠결이 있어 추방당했다고들 생각한다. p245
[태고의 바위 : 앨커트래즈] 한 때는 죄수들을 수감했으나 지금은 온통 여러 색깔의 꽃들로 뒤덮여 있는 섬인 앨커트레즈를 방문하고 쓴 글이다. 지금은 더 이상 예전의 흔적조차 제대로 느끼기 힘들어진 장소에 대한 아이러니한 단상이다. 인간의 허영심도 없고 인간의 환상도 깨끗이 떨쳐낸 폐허, 날씨에 돌려준 장소, 바람의 울음소리를 멈추려 한 여인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한 노인이 듀크라는 개 한 마리와 공놀이를 하는 곳.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아무도 내게 머물라고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왔을 것이다. p288
[그 모든 것들에 안녕 : 뉴욕] 그녀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고백한다. 고향을 떠나온 스무 살부터 스물여덟이 되는 때까지의 삶을 사랑의 시작과 끝에 빗대어 이야기해주는 듯이... 그 시절 뉴욕에 대한 열병을 치러내고 이제는 향수나 향에 의해서만 소환되는 회상의 시절이 되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는다.
그때 나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믿었고, 오로지 뉴욕에 고유한 그 느낌, 말하자면 다음 순간, 다음 날, 다음 달, 언제라도 뭔가 굉장히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p316 몇 년이 지나도 뉴욕을 감싼 그 경이로운 느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뉴욕의 외로움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내가 어디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 필요가 없다는 느낌 말이다. 걷는게 좋았다. p324 사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뉴욕에서는 내가 아주 젊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황금의 리듬이 깨어졌고 이제 나는 젊지 않다는 이야기다. p327
1934년에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보그' 에디터를 거쳐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으며, 여러 편의 소설과 논픽션 희곡,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겨우 접할 수 있는 작품은 딸의 죽음에 대해 썼던 자전적 에세이 <푸른 밤>, 절판된<상실>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이 새롭게 발간된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 기쁘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86세의 나이로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인 조앤 디디온. 최근 몇 년간 회자되는 작가의 자취들은, 이를테면 2015년 셀린Celin의 모델이라던가 2017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조앤 디디온의 초상>, 디디온 소설의 영화화, 미발표 에세이를 모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 Let Me Tell You What I Mean>의 출간 등으로 그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를 넘어 20세기 미국 문화사에서 중요하게 손꼽이는 여성 저자들 중의 한 명이기도하다. 관찰과 분석과 문장이 탁월한 에세이스트라는 대명사, '디디온풍' (Didion-esque) , '디디온 같은' (Didion-like) , '디디온스러운' (Didion-ish)과 같은 형용사로 사용되기도 하여 그야말로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영향력있는 작가와 배우, 뮤지션들이 디디온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그에 대한 영향을 당당하게 피력해왔다. 조앤 디디온의 세공된 문체와 날카로운 비판적 지성은 영미권의 문단에서 헤아릴 수 없는 추종자를 양상했다. 그레타 거윅, 미치코 가쿠타니 등 디디온의 팬을 자처하는 명사들도 지금까지 줄을 잇는다. p333
50년이나 지나, 왜 이제서야 디디온의 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은 지극히 60년대 미국적인 에세이와 글이라는 인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선호와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런 개인적인 동경과 무조건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글이 매끄럽고 쉽게 읽혀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나의 부족한 소양 때문이었는지, 집중하지 못했던 독서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속도가 더뎠고, 자주 멈췄으며, 끝까지 읽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그저 흐르듯이 허투루 문장을 넘길 수 없었고, 문장을 꼭꼭 씹어 소화하면서 읽어낸다는 느낌이 스스로 강하게 들기도 했다. 아마도 사회적인 이슈와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지나치게 미국적이라는 생각에 낯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책을 끝까지 읽어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서문'을 또 읽어 냈을 때,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듯이 의미가 명확해지고 선명해지고 이해되기 시작했다. 뒷 부분의 '옮긴이 해제' 또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많아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곁에 두고, 자주 읽고 또 읽을 것 같다. 그런 책이 있는 것이다. 한 번 읽고 나면 두번 다시는 들춰 읽지 않고 그대로 인연이 끝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몇 번이고 꺼내 읽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분명 후자일 것이다. 카메라를 꿰뚫듯이 강렬하게 빛나던 사진에서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그녀가 떨쳐내기 힘들어 했던 예이츠의 시에서의 웅웅거림을 나도 조금이나마 이해해 낼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글을 통해 그녀를 만나려고 할것이다. 여성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디디온 스타일'의 글쓰기임을 피력해 낸 그녀의 작업물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영감과 활력을 선물해 줄테니까.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