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신동준 작가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시리즈 두 번째에서 다루는 내용은 BC 177년 한문제 재위 시기부터 BC 42년 한원제의 치세까지 다루고 있다. 편년체 서술 방식을 사용하다보니 대략 전한(前漢) 시대의 기간 중 135년 동안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830 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한(漢)의 역사를 모두 다루지 못하고 있으니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된 역사가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새삼 느낄 수 있게 된다. 아마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한(漢)의 역사 중 낯익은 부분들이 꽤 많을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한(漢)을 건국한 것은 물론이고 한무제의 고조선 공략, 서역을 개척한 장건, 흉노와의 끝없는 전쟁,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과 [한서(漢書)]를 편찬한 반고 등에 대한 부분이 바로 그렇다.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내용들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실제 시중에서도 이토록 한(漢)의 역사를 상세히 다룬 책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렇게 띄엄띄엄 알고 있던 부분들을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이런 면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그간 잘 알지 못했던 한(漢)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오나라의 회계(강소성 소주시)와 예장(강서성 남창시) 두 군을 삭지한다는 한나라의 편지가 이르자 오나라 왕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에서 파견한 2천석 이하의 관원을 다 죽였다. 그 소식을 듣고 교서와 교동, 치천, 제남, 초, 그리고 조나라도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 p. 117 中에서 - 기원전 154년, 한나라 경제 재위 시절에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다. 오와 초를 중심으로 한나라의 7개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사랑 출판사의 [자치통감(資治通鑑)] 2권에서 다룬 내용 중 여기에 주목한 이유는 이 반란을 통하여 한(漢)의 통치체제의 특징과 변화 또 그 흐름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위의 인용된 문구를 본다면 오나라가 통치하던 2개의 군(郡)을 삭감조치하려고 하자 그에 대해 불만을 갖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오나라의 왕 유비는 한경제의 아버지인 문제와 사촌지간이었으니 한경제에게는 5촌 당숙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나라의 왕으로서 구리 광산과 염전 개발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부과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일구었다. 그런데, 그 구리와 염전 개발의 중심지인 회계와 예장 지역을 한나라가 회수한다는 것은 오나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왕 유비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였던 경제에 대하여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경제가 황태자 시절에 오왕 유비의 아들인 오나라의 세자와 바둑을 두다가 바둑에서 지자 바둑판을 던졌는데, 거기에 맞아 오나라의 세자가 사망한 것이었다. 이 육촌지간에 벌어진 일로 인하여 오왕 유비는 한경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만으로 본다면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이유는 봉지 삭감과 오왕 유비의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오나라를 포함한 여러 제후국이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점은 이 사건을 좀 더 살펴봐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 책은 반란의 실질적인 이유와 그 의미를 짚어볼 수 있게끔 하고 있다.
먼저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한문제 시절에 가의라는 인물의 행적을 살펴봐야 한다. 가의(기원전 200년 ~ 기원전 168년)는 20세에 최연소 박사가 된 인물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후왕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훗날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한문제에게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간언하게 된다. 먼저 BC17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한 회남여왕 유장의 아들들을 열후에 봉한 것에 간하여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린다. (중략) 지금죄인의 아들을 받들어 높이는 것은 천하사람에게 '황제가 그 동생인 회남왕을 죽였다.'는 비방을 듣기에 충분한 조치입니다. 이 사람들이 자라면 후일 어찌 그들의 부친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는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는 것이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는 계책의 시행을 약간 유보토록 하십시오! - p. 52 中에서 -
또한 가의는 제후국을 더욱 늘려서 제후왕을 늘리자고 건의한다. 이렇게 된다면 제후들에게 나눠주던 봉지는 잘게 나뉘어 지면서 자연스럽게 각 제후왕들의 세력은 약화될 것이며, 이후 그들을 황제가 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한문제는 그러한 가의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가의의 예상대로 그 다음 황제인 한경제 재위 기간에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원래 한무제 유방은 군국제를 통치체제로 정하였다. 이는 군과 현으로 나누어 황제가 관리를 파견하여 전국을 직접 황제가 다스리던 진시황제의 군현제와는 달리 일부 지역은 황제가 군현제처럼 직접 다스리면서 나머지 지역은 제후들이 다스리게 하던 절충형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압은 되었지만 제후왕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으며 자체적인 개발을 통하여 오(吳)와 같은 강력한 제후국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가의는 군국제에 대한 문제점을 제후국의 세력 약화로 대응하고자 하였지만, 모두 무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경제가 황제에 오르면서 그의 측근인 조조는 제후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게 된다. 가의의 주장을 한문제는 거의 수용하지 않았지만, 한경제는 조조를 최측근으로 삼았으니 그가 건의한 내용들은 그대로 실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한경제에게 제후의 죄를 나열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각 제후들에게 처벌을 하자고 건의를 하게 된다. 한경제는 그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차례차례 여러 제후국의 봉지를 삭감하거나 제후를 교체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은 바로 오초칠국의 난에 주도적이었던 오나라에 여러 제후국들이 가담한 이유이다. 애초 한나라 무제인 유방은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에 걸맞게 유(劉)씨 성이 아닌 제후들을 숙청하였는데, 이제는 같은 성씨이면서도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원래 군국제의 취지는 이러한 반란이 발생해도 같은 유(劉)씨 성의 제후국이 황실을 위하여 반란을 진압해야 했지만, 오히려 여러 제후국이 가세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오초칠국의 난은 주아부의 활약과 양왕 유무의 분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는 군국제의 문제점을 도출하면서 군현제로의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으로 봐야할 것이다.
한경제의 뒤를 이은 인물은 바로 한무제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한무제의 업적을 꽤 비중있게 가르쳤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군현제 확립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초칠국의 난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접한다면 한무제 시기에 이제 절충형 방식의 봉건제는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실질적으로 군현제 방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무제 시기에 그의 뜻대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대에 그러한 흐름을 통하여 그 시기에 군현제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무제가 소금과 철을 국가가 관장하는 정책을 취한 것 역시 바로 군현제 확립에 따른 중앙집권화 체제가 자리를 잡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전에 오왕 유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철과 구리, 소금에 대한 개발은 제후국에서도 자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한무제 시기에는 그것들을 모두 중앙에서 관리함에 따라 그 막대한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는 그 통치 스타일이 진시황제와 비슷했는데, 실제로 그 시기에 대외 원정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탄탄해진 내정 때문이었다.
한무제의 치세와 관련하여 아무래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바로 한의 고조선 정복일 것이다.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고조선을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니계의 재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위우거를 죽이고 투항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옛날 위우거의 대신이었던 성기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한나라의 하급관원을 공격했다. 좌장군은 위우거의 아들 위장가 항복한 재상인 노인의 아들 노최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여 성기를 죽였다. 드디어 조선을 평정한 뒤 낙랑과 임둔, 현도, 진번의 4개 군을 만들었다. - p. 413 中에서 - 우거왕을 그 이름인 '위우거'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고조선이 위만조선임을 보여주며 내부의 분란으로 인하여 끈질기게 저항하던 고조선이 허무하게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 위치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에 대한 부분도 언급되어 있다. 왕검성의 함락 대목만을 언급했지만, 그 이전부터 한나라는 고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고조선의 세력이 꽤 강대하여 '진국(辰國)'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는 부분도 기록되어 있다. 비록 중국의 사서이긴 하지만 고조선에 대한 자체적인 기록이 전무한 상황이니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하는 고조선 관련 부분은 중요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중국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기에 그에 대한 분석과 연구도 필요한 상황이다.
인간사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2권의 내용 중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대목은 바로 흉노와 관련된 부분이다. 한나라는 건국과 더불어 흉노와 끝없는 전쟁을 치뤄야 했다. 심지어 한무제인 유방은 오히려 흉노에게 강화를 요청할 정도로 굴욕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니 한나라의 대외전쟁의 대부분은 흉노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 전쟁은 계속 이어지다가 한무제 시기에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된다. 하지만 한무제 재위 시절에 이루어진 흉노 원정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BC 99년에는 한나라의 이릉은 보병 주력으로 고립된 채 흉노의 기병을 상대하다가 대패를 하게 되고 이릉은 어쩔 수 없이 흉노의 선우에게 황복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으니 바로 사마천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받아 궁형을 당한 것이었다.
"이릉은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병사들과는 신의를 지켰습니다. 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분투해 국가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중략) 다만 이번 거사에서 불행한 일이 있었으나 자신의 몸과 처자를 모두 온전하게 보존한 신하들이 그 죄를 부풀려 그의 단점을 비난하니 실로 슬픈 일입니다. (중략)" - p. 456 中에서 -
사마천은 이릉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이릉이 출전한 장군들 사이의 작전이 틀어지면서 그의 부대가 고립되었고, 그 상황에서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패전하게 되었음을 상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흉노와의 전쟁에 대한 패배로 화가 극에 치달았던 한무제는 사마천을 궁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한나라의 죄에 대한 처벌이 돈으로 무마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고조선 또한 흉노를 공략한 한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패전을 거듭하자 그들은 한무제의 노여움 때문에 사형될 위기였지만, 막대한 돈으로 죄를 면했던 사례가 있었으니 사실 사마천이 부유했다면 그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다른 권신들과는 달리 돈이 없었기에 결국 그 치욕적인 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방대한 역사 기록은 띄엄띄엄 알고 있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준다. 보통 역사가 자국 중심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 역시 그에 해당된다. 신동준 선생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남북조 또는 5호 16국 시대에 유목민족이 세운 왕국들이 실질적인 패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한족이 세운 왕조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하지만 워낙에 방대한 역사를 수록하다보니 중국 중심적인 사관의 역사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도 제공하고 있다. 가령 흉노와의 전쟁이 전한 시기 내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흉노의 세력이 강대했음을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조선과 관련된 부분도 결국 한나라에게 정복을 당하였지만, 몇 해를 거쳐 한나라가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나라의 역사를 세밀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권도 그렇지만 3권은 왕망의 등장과 후한시대에 대한 부분인데, 이 부분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기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한 기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 인간사랑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 - |
|
이 책을 두르고 있는 띠지에는 ‘열국지와 초한지, 삼국지의 시대’라는 구절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다. ‘제왕학의 교과서’라고 칭해지며, 다양한 기록들에서 인용되는 <자치통감>의 번역본을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었다. <사기열전>과 <맹자>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 역사의 흐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2권의 내용은 한나라의 전성을 이끌었던 한문제의 치세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역사에서 드물게 약 4백년의 통일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고제 유방을 비롯해, 초창기 군주들의 치세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아마도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가 권력에 취해 무도한 정책을 펼쳐 민중들에게 버림받앗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듯 오랫동안 지속되었기에 한나라 역사를 뜻하는 ‘한기(漢紀)’가 60권에 달해,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당기(唐紀)’(81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흔히 중국에서 안정적인 시기를 일컫는 표현으로 ‘한당송(漢唐宋)’의 3국을 아울러 칭하고 있다. 이 책이 송나라 신종 때 완성되었으니, 아마도 송나라 역시 중국 역대의 역사를 통해서 치국(治國)의 요체를 찾으려는 의도를 지녔을 것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사마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 사람이 이처럼 방대한 기록을 검토하여 엮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 송나라 조정에서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자료 조사와 편찬에 도움을 주었고, 편찬을 위해 임시 조직을 만들어 사마광의 저술 작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 책의 저술을 위해 역대의 정사(正史)와 실록 및 다양한 야사(野史)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들의 ‘묘지명’에 이르기까지 300종이 넘는 방대한 자료들을 참구하여 ‘편년체’로 엮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를 기록하면서 <한서(漢書)>의 저자인 역사가 반고의 평(評)을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에 덧붙여 편찬자인 사마광 자신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마천의 <사기>와 더불어 <자치통감>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수 목록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2권에서는 ‘한기’ 60권 가운데 한문제로부터 한원제까지 약 15권에 걸쳐 당대의 역사를 번역문과 함께 원문이 나란히 수록하고 있다. 역대 제왕의 뛰어난 점과 아울러 그들의 실정까지 함께 수록하여, 군주로 하여금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군주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인물을 적절한 직책에 맡겨 보좌하도록 하며, 항상 민중들의 삶이 안정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에 영합하는 인물들만을 고집할 경우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이 중국의 역사를 기술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위정자들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올바른 정치의 요체를 알도록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차니)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바탕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자치통감 2>는 전체 294권 중 14권(漢紀 6권)에서 28권(漢紀 20권)까지를 다루고 있다. 시기로 따지자면, 한나라 문제(文帝) 전(前) 3년(B.C. 177)에서 원제(元帝) 영광(永光) 2년(B.C. 42)까지의 135년 역사에 해당한다. 즉 한(漢)이라는 국가가 건국된 후, 안정적인 국가의 운영을 위한 내부적인 안정화를 성공한 ‘문경지치(文景之治)’의 시기, 외부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변방의 안정을 꾀했던 무제(武帝)의 시기를 거쳐 전한 멸망의 단초가 되는 왕망(王莽, B.C. 45~B.C. 23)의 출현과 연결되는 원제 시기까지이니 소설의 구성단계로 치면 발단 다음인 전개, 위기, 절정에 해당하는 셈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문제(文帝)는 아들인 경제(景帝)와 더불어 태평성세인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끈 장본인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名君)이자 성군(聖君)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허물이 있다면 아직 교화를 다 시키지 못하고 형벌을 내린다. 혹 행실을 고쳐 착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길이 없으니 짐은 이를 심히 가련하게 생각한다. 무릇 형벌이 몸의 지체를 자르거나 피부를 찢어 놓는다면 죽을 때까지 회복될 수 없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덕한 일인가? 이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된 사람의 뜻이겠는가? 육형(肉刑)을 없애고 이를 다른 형벌로 바꾸도록 하라. 또한 죄인들이 도망가지 않는다면 각지 죄의 경중에 따라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면제해주도록 하라. 이를 갖춰서 명령으로 만들라.” [pp. 77~78]라는 조서(詔書)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景帝) 때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통치체제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한(漢)나라 건국 당시 일부 지역은 황제가 관리를 파견해서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제후들이 다스리게 하던 군국제(郡國制)의 통치체제였다. 이는 진(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와 주(周)나라의 봉건제(封建制)를 절충한 형태로, 문제와 경제를 거쳐 무제 때에 이르면 사실상 황제가 모든 지역에 관리를 파견해서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효문제와 효경제는 깨끗하고 검소하여 천하를 편안하게 돌보아 70여 년간 국가에 큰 일이 없었고, 수재와 한재를 만나지 않아 백성들은 집집마다 풍족했다. 도시건 시골이건 창고는 모두 꽈 차 있었고, 정부의 창고에도 재화가 넘쳤다. 태창(太倉)의 곡식은 묵고 묵어 밖에다 노적(露積)할 정도로 넘쳤다. 미처 다 먹을 수 없어 부패했다.” [p. 174] 이렇게 선대(先代)가 넘겨준 풍부한 재화를 기반으로 무제(武帝)는 적극적으로 대외팽창 정책을 실현했다. 흉노와의 잦은 대규모의 전쟁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실크로드 개척과 무위/장액/주천/돈황의 하서사군(河西四郡) 설치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남월(南越)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구군(漢九郡),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진번/현도/임둔의 한사군(漢四郡) 등은 이러한 무제의 대외정책의 성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제(武帝) 때를 전한(前漢)의 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 광이 “효무제는 아주 사치하고 지극한 욕심을 갖고 있어 번거로운 형벌을 사용했고 세렴(稅斂)을 무겁게 거두었다.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몄고,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夷狄)을 정벌했고, 신(神)의 괴이함을 믿고 현혹돼 절도 없이 순유(巡遊)했다.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여 도적이 일어났으니 그런 것은 진시황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효무제는 먼저 선왕의 도를 존중했고, 통제하고 지킬 바를 알았고,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속이고 감추는 것을 실어했고,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이거나 상주는 것을 엄정히 밝혔고, 말년에는 잘못을 고쳐 후사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냈다. 이것이 그가 망한 진나라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망한 진나라와 같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이유다” [pp. 512~513]라고 평한 것처럼 잦은 정복전쟁으로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어 전한(前漢)이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소제(昭帝) 때 누란(樓蘭)의 왕인 안귀(安歸)를 꾀를 내어 암살하고 한나라에 있던 누란국왕의 동생 위도기(尉屠耆)를 옹립하면서 선선( 善)으로 개명했다. 이를 두고 사마 광은 “왕자(王者)는 융적(戎狄)을 대할 때 반기를 들면 토벌하고, 복종하면 재차 추궁하지 않는다. 지금 누란국 왕이 이미 자신의 죄를 자복(自服)했는데도 오히려 쫓아가 주살했다. 뒤에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귀부를 회유할 길이 없게 되었다. 반드시 죄가 있어 토벌코자 하면 의당 군사를 늘어놓고 출정 훈시를 하는 진사국려(陳師鞠旅)를 하며 공개적으로 그 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지금 마침내 사자를 파견해 금폐(金幣)로 유혹해 살해했으니 이후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이 다시 신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pp. 558~559]라고 비판했다.
원제(元帝)는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 선제와 달리 유가(儒家)의 이상론에 치우쳤다. 그리고 이를 극대화한 것이 그의 황후인 효원황후의 조카인 왕망(王莽)의 신(新)이니, 이 시기 또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자치통감 2>에서는 이 부분이 본격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음 권인 <자치통감 3>이 나오길 기대해야겠다.
결과가 나온 뒤에 평가하는 일은 쉽다. 그래서 철저히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는 유가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마 광의 평가[臣光曰]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이란 제목부터 ‘치도(治道)의 자료(資料)로 두루 통(通)할 만한 역사의 거울인 사감[史鑑]’이라는 뜻이니 오히려 제왕이 본받아야 할 것과 경계해야 할 것에 기준을 세우는 사마 광의 평가가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제왕이 하나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지 못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그때 그때 결정한다면 그것은 유연한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
|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번역한 신동준 선생의 [자치통감 2]는 전체 294권 중 14권(漢紀 6권)에서 28권(漢紀 20권)까지를 다루고 있다. 시대구분으로는 전한(前漢)시대이며, 기간은 기원전 177년부터 기원전 42년까지이다. 한나라를 세운 한고제 유방이 죽고, 혜제를 거처 혜제의 후궁소생이던 유공이 즉위하자 여태후는 천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천자의 대권을 행사한다. 이후 여태후가 유공을 폐한 뒤 유폐시켜 죽게 만들고 합산왕 유의를 새 황제로 세우지만, 여태후가 죽자 군신들이 여씨일족을 도륙하고 유황을 옹립하니 그가 한 문제이다. [자치통감 2]는 한 문제부터 시작하여 경제, 무제, 소제, 선제를 거쳐 한 원제에 이르기까지 136년간의 전한(前漢)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전한시대의 황제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는 한 무제일 것이다. 그는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받아들여 백가의 학설을 축출하고 유가를 표방함으로써 유학을 관학으로 삼았다. 또한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흉노와 전쟁을 벌였으며, 서강을 정벌하고 남월과 남이를 평정했다. 이민족을 정벌하고 난 후에는 요지에 둔전을 두고 병사들이 상주하게 만들었다. 중국 역사상 정복군주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이다.
한 무제 시대의 기록 중에서 우리의 역사와 관련되어서는 두 군데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 무제 원봉2년(BC109),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만이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날 빈 땅에 요새를 만들고 진번과 조선에 사는 만이와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부리고 복속시켜 왕 노릇을 하고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과 ‘한 무제 원봉3년(BC108), 조선을 평정한 뒤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4개 군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들 내용은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그때까지 전해오던 사서를 참고로 하여 쓴 것이다. 아마 전한시대 사마천이 쓴 [사기]나 후한시대 반고가 쓴 [한서]에 나온 내용을 간략하게 발췌한 것이지 싶다. 사마천이나 반고, 사마광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 국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그들에게 이민족 모두는 만이(오랑캐)였다. 그러기에 이민족과 관련된 역사서술이 객관성을 지니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한 무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고조선과 관련하여 나온 서술이 단 두 개에 그치고, 그것도 간략하게 기록하고 넘어간 것을 볼 때 이는 당시 고조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거나 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했을 수도 있다. 중국은 바로 이런 기록을 토대로 동북공정을 벌이고 있으며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왜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기록은 사마천에 대한 것이다. ‘한 무제 천한2년(BC99), 5,000여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흉노를 치러 갔던 장군 이릉이 기나긴 싸움 끝에 무기가 떨어지자 부하들을 도망가게 하고 흉노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황제는 대노했고 군신들은 하나같이 이릉에게 죄가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태사령인 사마천에게 묻자 사마천이 긴 말로 이릉을 두둔했다. 황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거세하는 부형에 처했다.’ 우리가 [사기]를 쓴 사마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사마광은 간략하게 줄여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마 사마광이 사마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 것보다는, 이릉이 흉노에 항복한 뒤 한 나라와 흉노의 전쟁에 관여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한시대 한나라의 최대 고민은 바로 흉노와의 전쟁이었고 이릉이 죽은 뒤 이릉의 아들 역시 흉노의 편에 서서 한나라와 싸웠기 때문이다.
[자치통감 1]권을 읽을 때 다른 사서와는 달리 사마광이 곳곳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자신의 관점에서 평한 것이 눈에 들어왔었다. 2권 역시 열서너 군데에서 사마광의 평이 나온다. 그 중 관심이 가는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한 무제의 비빈인 조첩여가 임신한지 14개월 만에 직문의 남쪽에 있는 구과궁에서 유불릉을 출산했다. 황제가 성인인 요(堯)도 14개월 만에 태어났다며 유불릉이 태어난 문을 요모문으로 명명한 것을 두고서, 사마광은 ‘군주는 신중해야 한다. 당시 황후와 태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구과궁의 문을 요모문이라고 명명한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다. 간사한 자들이 행여 황제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읽는다면 황후와 태자를 위해하여 무고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한다. 훗날 태자는 무고를 당해 죽고 유불릉은 한 무제 사후 보위에 오른다. 또 한 무제가 71세의 나이로 죽자, 사마광은 ‘무제는 진시황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선왕의 도를 존중했고, 통제하고 지킬 바를 알았고,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죽이거나 상주는 것을 엄정히 밝혔고, 말년에는 잘못을 고쳐 후사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내었다. 이것이 그가 망한 진나라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이유다’라고 평했다. 한 무제가 정복전쟁으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고, 신선에 빠진 것을 두고서 사마광은 진시황과 같다고 했지 싶다. 그런가 하면 한 소제 때 누란국왕이 한에 복속되었음에도 꾀를 내어 죽이고 한나라에 있던 누란국왕의 동생을 옹립한 것을 두고서, 사마광은 ‘왕자는 융적을 대할 때 반기를 들면 토벌하고, 복종하면 재차 추궁하지 않는다. 누란국왕이 자신의 죄를 자복했음에도 만이에게 도적의 꾀를 내어 주살했으니 뒤에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귀부를 회유할 길이 없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평한다.
이러한 사마광의 평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대의 사람이 선대의 일을 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다. 그 일의 결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마광이 살았던 시기는 유학이 국가이데올로기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시대였다. 그러나 전한시대는 비록 한 무제가 유학을 관학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단지 백가의 첫 번째임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제나 선제가 형법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얽어매는 문법리들을 중용한 것이나 유협들을 혐오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래서 사마광은 철저하게 유가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마광이 평한 내용들은 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의와 예법과 어긋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 해주는 것 같다.
역자가 전한시대라는 제목으로 다루는 한기(漢紀)는 4권에서 26권까지이다. 이 책에서 20권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다음 권에서는 전한시대 말기와 왕망시대를 다룰 것 같다. 왕망이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나라 시대를 역자는 왕망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사마광은 왕망시대도 여전히 한기(漢紀)라 기록한다. 전국시대의 역사를 모두 주기(周紀)라 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다음 권이 기다려진다. |
|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동양의 역사, 즉 중국의 역사가 오롯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편년체로 기록해 개인 중심이 아니고 시대의 흐름을 잘 드러내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저자가 사건과 사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하여 특정된 부분에서는 저자가 책 속에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간다. 그 의견이 역사적 사실의 판단에 도움이 많이 된다.
전체는 294권이다. 통감(通鑑)이라고도 한다. 주나라 위열왕이 진(晉)나라 3경(卿:韓 ·魏 ·趙氏)을 제후로 인정한 BC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먼저 사마 광이 통지 8권을 찬진(撰進)하자 영종(왕)이 사마 광의 주재 하에 유반(劉?)이 전 ·후한(前後漢)을, 유서(劉恕)가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를, 범조우(范祖禹)가 당(唐)나라 및 5대를 각각 분담하여 기술하도록 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였다. 그래서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이 태평성대라고 하는 송대에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 역사로 치면 고려조가 될 것이다.
자치통감이라 함은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독특한 사관(史觀)에 의하여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감계(鑑戒)가 될 만한 사적을 많이 기록하였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에는 ‘신광왈(臣光曰)’이라고 하여 사마 광 자신의 평론을 가하고 있어 그의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을 중국의 고전들을 번역하며 노심초사하시던 신동준 선생이 번역을 했다. 번역을 하다가 과로로 사망한 줄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의 유고 번역본을 읽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2권은 한기 권14에서 권28까지를 담아 놓고 있다. 한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제시되어 있다. 2권은 한이 북방 주변 민족과 어떻게 경쟁하면서 나라를 통치해 나가는가가 그려져 있다. 이것이 나중 5호16국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경제 전 4년(BC 153) 1) 봄, 다시 관을 설치하고, 전을 사용해 출입하게 했다. 2) 여름 4월 23일, 아들 유영을 세워 황태자로 삼고, 유철은 교동왕으로 삼았다. 3) 6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4) 가을 7월, 임강왕 유알이 죽었다. 5) 가을 10월 무술, 일식이 있었다. 이렇게 한 해의 내용을 개요 식으로 적어 놓고 서술형으로 전반적으로 일어난 반란이나 군사의 동향 등을 적었다. 한 해 중에서 중요한 사항들만 기재되었다. 그리고 뒤에 한문 원본을 실어 놓았다. 한문 원본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흐름으로 전체적인 내용들이 그려져 있다.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으니 사실을 알고 이해하면서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겠다.
글을 읽어 나가면서 감명 깊었던 인물은 이광이라는 장군이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덕스러웠다. 그가 전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 대장군이 선우와 싸울 때 전투 장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장군이 그 사연을 묻게 되자 모든 책임을 이광 자신이 길을 잃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혼자 책임을 진다. 그는 벼슬을 40년 가까이 했으나 청렴해 상품으로 받은 것은 모두 휘하에 나눠주고 집에 있는 것이 없었다. 군사들은 이광을 자신들의 장수로 모신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이광은 자신이 어떻게 붓이나 놀리면서 재판이나 하려는 형리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자진했다. 모든 사람들이 슬퍼했다.
선우와의 싸움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나가고 그 전쟁에서 활약한 이광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가까지 자세하게 기재하고 있다. 그 후 대장군은 이광을 보아 그의 아들을 등용시켜 일을 하도록 주선한다. 낭중지추라고 인덕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빛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당대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적고 있다. 읽으면 시대의 면모를 쉽게 수용하고, 자신의 오늘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한다. 역사를 알고 그 속에서 지혜를 얻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우리들에겐 필요하다. 2권의 뒷부분은 후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무제 때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흉노와의 관계가 많이 그려진다. 다음에 나오게 될 삼국시대는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강의 흐름을 파악한다. 그런데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가 위, 촉, 오 삼국의 정립에서 인의를 내세워 촉을 중심으로 그려나가는데 비해 이 책은 위가 정통임을 명시한다. 한에서 위로 위에서 진으로 그렇게 나라의 중심이 이어졌다는 말이다. 사마 광은 그것을 분명히 한다.
신 사마 광은 평한다. “제갈풍은 주감과 장맹에 대해 처음에는 칭송하고 나중에는 비난하는 전예후훼를 했다. 조정을 위해 선인을 천거하고 악인을 내치는 진선거간이 아니라 황상 곁으로 다가가는 비주를 통해 승진을 구하는 구진에 뜻이 있었을 뿐이다. 그 역시 정붕 및 양흥과 같은 부류니 어찌 강직한 일물일 수 있겠는가
인물에 대해 사마 광의 평가가 들어 있다. 이렇게 자신이 나서야 할 부분에서는 과감하게 나서 그 흐름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물론 객관적으로 기록해 나가면서 행하는 평가기 때문에 독자가 분별을 할 수 있다. 독자의 의지에 따라 읽어주면 될 것이라 여겨진다.
방대한 분량이다. 한나라의 이야기만도 책이 넘어간다. 앞으로도 여러 권의 책이 나올 듯하다. 진의 천하통일, 한초 전으로 한 권의 책을 이루더니 한나라로 또 한 권이 지나간다. 아마 다음 이야기를 그려내려면 몇 권의 책이 더 필요할 듯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알고 지혜를 가져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길 기원해 본다. 책이 정말 가치 있게 다가온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사랑의 배려로 즐겁게 읽었다. 감사하다.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지원 받아 읽었습니다.> |
|
자치통감 2 사마광/신동준 인간사랑/2021.4.30.
<자치통감 2>는 한문제 전3년(BC177년)에서 한원제 영광2년(BC42년)까지의 135년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책이다. 이 시기는 한나라 건국 후 안정적인 국가의 운영을 위한 내부적인 안정화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변방의 안정을 꾀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정권 다툼이 있었고, 몇 번의 반란이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특히 흉노의 잦은 침입과 그들과의 관계정립이 큰 문제로 대두되는 시기였다. 또한 한나라의 전성기였던 한무제 때 고조선을 침공하여 한사군을 설치하는 등 우리의 옛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드디어 오나라의 회계와 예장 두 군을 삭지한다는 한나라의 편지가 이르자 오나라 왕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에서 파견한 2천석 이하의 관원을 다 죽였다. 그 소식을 듣고 교서와 교동, 치천, 제남, 초, 그리고 조나라도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p.117)” “한경제 전3년(BC 154년) 오나라와 초나라 군사가 함께 양나라를 공격해 극벽을 깨뜨리고 수만 명을 죽였다. 승세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기상이 자못 날카로웠다.(p.118)”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오나라와 초나라의 7국이 반기를 들었다. 또한 “오, 초가 서로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황제가 자제들을 왕으로 삼아 각각 땅을 나눠주었는데 지금 적신인 조조가 제후들을 임의로 처분하고 땅을 빼앗는지라 반란을 일으켜 서쪽으로 함께 가 조조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한 뒤 그만두겠디’고 했다.(p.121)” 이처럼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황제는 오왕의 동생인 덕애후 유광의 아들로 오왕을 잇게 했고, 초원왕의 아들인 유례로 초왕을 잇게 했다. 오나라의 복국은 허락하지 않고, 초나라의 복국만 허락했다.
한나라 때 북쪽의 흉노는 틈만 나면 변경을 침범했다. 한무제 원경 2년(BC 133년)에는 흉노의 선우가 요새를 침공하자 마읍으로 출정한 왕희는 겁을 먹고 되돌아와 변명을 하지만 사세가 불리해지자 자진하는 일이 있었다. 이 후에도 수많은 침공이 있었지만, “흉노가 화친을 거절한 채 요새를 공격했고,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이 한날의 변경에 들어와 도적질을 했다. 그럼에도 흉노는 접경지대 시장인 관시를 탐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좋아했다. 한나라 역시 관시를 열어 그들의 뜻에 맞는 일을 끊어버리지 않았다.(p.235)” 한나라는 변경이 위험해지면 군사를 파병하여 흉노의 군대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접경지대 시장을 열어 그들이 원하는 교역을 허락해 주는 양면책을 썼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군대가 강해지면 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혼인정책으로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했다.
한무제 원정 6년(BC 111년)에는 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누선장군 양복이 남월 땅으로 들어가 심협을 먼저 함락시킴으로써 반우에 있는 석문을 깨뜨리려 했으나 남월의 예봉에 좌절됐다. 수만 명을 대리고 복파장군 노박덕이 도착하자 함께 진격했다. 누선 장군이 앞서 남월의 도읍지인 반우에 이르렀다.(p.382)” 이와 같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을 평정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변경의 안정을 위해 “한선제가 변경의 군들로 하여금 모두 창고를 지은 뒤 곡식이 싸면 그 값을 올려서 사들이고, 곡식이 비싸면 그 값을 내려서 내다 팔도록 하여 명칭을 상평창이라 하였다.(p.750)”는 것처럼 제도적인 보완에도 신경을 썼다.
|
|
자치통감 2 사마광/신동준 인간사랑/2021.4.30. sanbaram
<자치통감 2>는 한문제 전3년(BC177년)에서 한원제 영광2년(BC42년)까지의 135년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책이다. 이 시기는 한나라 건국 후 안정적인 국가의 운영을 위한 내부적인 안정화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변방의 안정을 꾀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정권 다툼이 있었고, 몇 번의 반란이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특히 흉노의 잦은 침입과 그들과의 관계정립이 큰 문제로 대두되는 시기였다. 또한 한나라의 전성기였던 한무제 때 고조선을 침공하여 한사군을 설치하는 등 우리의 옛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드디어 오나라의 회계와 예장 두 군을 삭지한다는 한나라의 편지가 이르자 오나라 왕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에서 파견한 2천석 이하의 관원을 다 죽였다. 그 소식을 듣고 교서와 교동, 치천, 제남, 초, 그리고 조나라도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p.117)” “한경제 전3년(BC 154년) 오나라와 초나라 군사가 함께 양나라를 공격해 극벽을 깨뜨리고 수만 명을 죽였다. 승세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기상이 자못 날카로웠다.(p.118)”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오나라와 초나라의 7국이 반기를 들었다. 또한 “오, 초가 서로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황제가 자제들을 왕으로 삼아 각각 땅을 나눠주었는데 지금 적신인 조조가 제후들을 임의로 처분하고 땅을 빼앗는지라 반란을 일으켜 서쪽으로 함께 가 조조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한 뒤 그만두겠디’고 했다.(p.121)” 이처럼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황제는 오왕의 동생인 덕애후 유광의 아들로 오왕을 잇게 했고, 초원왕의 아들인 유례로 초왕을 잇게 했다. 오나라의 복국은 허락하지 않고, 초나라의 복국만 허락했다.
한나라 때 북쪽의 흉노는 틈만 나면 변경을 침범했다. 한무제 원경 2년(BC 133년)에는 흉노의 선우가 요새를 침공하자 마읍으로 출정한 왕희는 겁을 먹고 되돌아와 변명을 하지만 사세가 불리해지자 자진하는 일이 있었다. 이 후에도 수많은 침공이 있었지만, “흉노가 화친을 거절한 채 요새를 공격했고,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이 한날의 변경에 들어와 도적질을 했다. 그럼에도 흉노는 접경지대 시장인 관시를 탐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좋아했다. 한나라 역시 관시를 열어 그들의 뜻에 맞는 일을 끊어버리지 않았다.(p.235)” 한나라는 변경이 위험해지면 군사를 파병하여 흉노의 군대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접경지대 시장을 열어 그들이 원하는 교역을 허락해 주는 양면책을 썼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군대가 강해지면 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혼인정책으로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했다.
한무제 원정 6년(BC 111년)에는 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누선장군 양복이 남월 땅으로 들어가 심협을 먼저 함락시킴으로써 반우에 있는 석문을 깨뜨리려 했으나 남월의 예봉에 좌절됐다. 수만 명을 대리고 복파장군 노박덕이 도착하자 함께 진격했다. 누선 장군이 앞서 남월의 도읍지인 반우에 이르렀다.(p.382)” 이와 같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을 평정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변경의 안정을 위해 “한선제가 변경의 군들로 하여금 모두 창고를 지은 뒤 곡식이 싸면 그 값을 올려서 사들이고, 곡식이 비싸면 그 값을 내려서 내다 팔도록 하여 명칭을 상평창이라 하였다.(p.750)”는 것처럼 제도적인 보완에도 신경을 썼다.
“한무제 원봉 3년(BC108년) 한나라 군사가 조선의 경계지역으로 들어가자 조선왕인 위우거는 군사를 발동해 험준한 곳에서 항거했다. 누선장군이 제나라 병사 7천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도착했다. 성을 지키던 위우거는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바로 성을 나와 누선장군을 공격했다. 패한 누선장군의 군사가 흩어져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p.410)” 10여 일이 지나 물러나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은 조금씩 찾아 다시 모았다. 좌장군이 조선의 패수 서쪽에 있던 군사를 공격했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다. 두 장군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천자는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위우거에 항복하기를 권하게 했다. 위우거는 사자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 사죄했다. 그러나 “드디어 조선을 평정한 뒤 낙랑과 임둔, 현도, 진번의 4개 군을 만들었다. 이어 참을 홰청후, 위장을 기후로 삼았다. 노최는 부친이 죽음으로써 공을 세운 덕분에 열양후에 봉해졌다.(p.413)” 현도와 낙랑은 본래 기자의 봉지이다. 옛날 기자는 조선에 있으면서 그 백성을 예의로 가르쳤고, 밭 갈고 누에 치고 길쌈을 하게 했다. 백성들을 위해 8조목의 금령을 두었다. 살인을 하면 즉시 죽이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적몰하여 그 집의 가노가 되고 여자는 비로 삼았다. 스스로 속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 당 50만 전으로 속죄하게 했다. 그러나 비록 면죄가 돼 다시 민이 될지라도 풍속에서는 이를 수치로 생각했고,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스24를 통해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
자치통감 사마광/신동준 인간사랑/2021.3.30.
중국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역사서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마천의 <사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역사를 비교적 간단히 정리한 <자치통감>이 예전부터 많이 읽혔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송나라 진종 때 사람으로 20세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왕안석의 신법이 채택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자치통감>저술에 몰두 했다. 그의 나이 48세 때인 1066년에 시작해 66세 때인 1084년에 마무리 했다. 역저자 신동준은 고전연구가이자 평론가로 <삼국지 통치학>, <전국책>, <중국 문명의 기원>, <공자의 군자학>, <맹자론> <장자>, <한비자> 등 1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출간했다.
<자치통감>은 1065-1084년에 걸쳐 북송의 사마광이 책임자로서 주나라 위열왕이 3진(한, 위, 조)을 각각 제후로 인정한 BC403년부터 시작하여 960년 후주 세종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 편년체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던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제왕과 신하들의 리더십인 이른바 ‘군신공치의 리더십’을 제시코자 노력했다. 검약과 겸양의 기풍 위에 부국강병의 실리와 예의염치의 명분을 공히 추구하는 국가가 바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통해 구현코자 한 이상적인 치국평천하의 모델이었다고 역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끝까지 완역을 못하고 별세를 하게 되어 전한시대까지로 마무리 하게 되었다.
<자치통감>에 최초로 주석을 가한 호삼성이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자치통감목>의 요지 및 취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점이다. 약칭 <통감강목>으로 불린 <자치통감목>은 <자치통감> 전체의 3분의 1가량으로 편년체인 <자치통감>과 달리 큰 제목인 강 밑에 목이 등장하는 이른바 강목체로 구성돼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강목체’는 집필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고, 기록의 원문이 집필자에 의해 임의로 깎이거나 바뀌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원래의 뜻이 뒤바뀌는 게 가장 큰 결점이었다. 주희가 <통감강목>을 출간할 당시 첨삭된 부분과 자의적인 편제가 너무 많아 커다란 비판을 받은 이유다. 주목할 것은 극단적인 명분론으로 치달은 이른바 ‘조선성리학’을 만들어낸 조선 사대부들의 행보이다. 이들은 원본에 해당하는 <자치통감>을 멀리한 채 오직 <통감강목>만을 중시하는 왜곡된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한다.
<자치통감>의 시대구분에 대한 관점을 보면, 첫 번째로 한족중심의 중화관에 입각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사기>의 사마천을 비롯해 <한서>의 반고와 <후한서>의 범엽 등의 역대 사가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북조시대의 주역이 북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 위주로 편제를 한 게 대표적이다. 기존의 오호십육국 내지 위진남북조 등의 용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라고 한다. 진시황이 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이 시기에 이뤄진 만큼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엄밀하게 나눌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자치통감>은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하나로 뭉뚱그려 모두 권 7인 ‘전기 2’에 묶어서 기술해 놓았다. 이것이 학계의 통설과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
|
@자치통감2 고 신동준 선생 역주의 자치통감1, 2는 자치통감 1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부기는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학계에서는 선진시대로 명명)를 어떻게 분류하는것이 옮은가를 놓고 깊은 고민이 크셨던 것 같다. 물론 이는 중국 학계분만 아니라 세계 학계에서도 분분한 의견속에 한참후의 일인 삼국시대때부터 정통론이란 단어가 중국에서도 대두되었듯이 아다시피 이는 각각의 자신이 처한 상황, 조국, 직간접의 인과관계, 사관관에 따라서 시각이 갈라진다.
이뿐만이 아니라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않은 부분, 그나마 다행스럽게 기록이 남아있있더라도 후대의 기록에 의지하는 부분, 그부분 또는 승자의 시각을통해 바라본 사관의 주관에따라 모두 아는 것처럼 달라지는 것이다. 추가로, 저자가 언급한 부분은 학계에서 왜 춘추전국시대를 선진시대로 명칭하는 이유는 진시황이 세운 진제국과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던 유방과 항우의 대전을 그린 초한지의 유방이 세운 한제국을 통칭하는 진한시대와 구분코자 함임을 말하고 있다.
한 예로 사마광(68세 사망, 7세때 춘추좌전을 강독했다는 희대의 천재같음)은 주 왕조의 정통성이 진나라를 거치지 않은채 유방의 한나라로 넘어왔다고 본것은 진제국이 미미한 집단으로 서주와 동주를 확연히 구분하고있는 부분과 뚜렷한 연도별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작게는 주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기원전 256년를 감안하면 35년에서 ~ 기원전 403년 시작된 동주시대가 진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을 합치면 550년, 춘추전국시대의 초점이 200년 까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유왕을 살해하여, 제후들이 그의 뒤를 이어 평왕을 옹립했고, 곧 이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시 부근)에서 부도 낙읍(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겼다.(이 부분도 견융의 침략으로 약화된 주가 제후들에의해 수도를 천도한 후 유왕이 살해됐는지, 침략당한 주의 유왕이 죽은 후 천도했는지 각각 다름)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사마광의 시대구분에따른 이견에도 불구하고 자치통감1,2 공히 약 1,400여년에 달하는 어마한 기간동안을 사료로 남길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가 바라본 그런 이유이다. 춘추좌전의 기본 필법에 편년체의 체제를 유지해 어느 특정 국가에 치우치거나 평준하지않은 화이관을 그대로 이어서 자기만의 사관을 고집하지않고 열린 시각으로 널리 통용되는 연도별 기록을 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고 신동준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한번 놀랍고 깊이있는 통찰력 가득한 필기를 누리기를 바란다.
짐이 생각컨데 군자란 이전 사람이 한말과 행적인 전언왕행을 많이 알아 그 덕을 쌓아가는 까닭에 능히 주역, 대축의 단사에 나오듯이 강건독실하여 휘황이 빛나도록 날마다 새롭게하는 휘광일신을 할수 있다고 본다. [본문에서]
폐하는 몸소 성덕을 베풀고 태평성대로 가는 길을 열면서 어리섞은 이민이 법금에 저촉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매년 크게 사면하고 있습니다. 뱅성들로 하여금 행동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는 개행자신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천하가 아주 다행입니다. [본문에서]
자치통감1,2을 보며 궁금했던 연보와 참고할 사항을 차례로 본문을 먼저 정리해보면 ▶자치통감 1 권 1~13 제1부 전국시대, 권1~7 제2부 초한시대 권8~11 ▶자치통감 2권 권14~28 제3부 진한시대 권12~34 제4부 왕망시대 권35~40 제5부 후한시대 권41~57 제6부 삼국시대1 권58~68 제5부 삼국시대2 권69~81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개인적으로는 학자에따라 각 제후국들의 연도는 조금식 차이가 있지만 그리 중요치는 않다는 생각이다 자로재듯 알수도 없을 뿐더러 중요한것은 제자백가나 백가쟁명이 아닌가 생각.) -열국지 무왕이 강태공의 도움으로 건국한 주나마 말부터, 즉, 서주 말부터 ~ 진시황의 천하통일까지 550년간 춘추전국을다룬 시대 역사로 -서주 B.C. 1046년 ~ B.C. 770년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 즉, 동천으로 이주한 때까지~ 엄밀히 말하면 이때가지는 씨족사회, 어머닌 다르고 아버진 같은 사회로 중앙집권으로 관리됐을듯~ -동주 춘추시대(B.C. 770 or 771 ~ 403)와 전국시대(B.C. 403 ~ 221 or 256)로 나뉜다. 그 이후, 진시황이 천하 통일할 때 기원전 770 ~ 256 또는 학자에따라 221까지~ 이는 춘추시대(BC 770~403)와 전국시대(BC 403~221)로 나뉜다. 즉, B.C. 약 771년 견융(훗날 평왕, 주때 활동한 한 부락-개인적으로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시대가 완전히 다른 건륭제로 착각했었음)이 주변 제후들과 협력 주를 침략 유왕을 살해하고 제후들이 그의 평왕을 옹립 후 이어서 현재 시안시 부근인 호경에서 부도 낙읍(현재 뤄양)으로 천도했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서주(B.C. 1046년 ~ B.C. 771년까지), 이후-동주(B.C. 770년 ~ B.C. 256년까지)로 구분. 철학적 제자백가가 활발했으며 공자가 등장한 시기이고 또한 노자, 손자, 한비자가 등장한 시기다
▶춘추시대 기원전 B.C. 770~403, 중국 역사에서 B.C. 770년 ~ B.C. 403년 시기 -춘추시대, 5국과 춘추오패는 제, 진, 초, 오, 월~나라와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왕 합려 or 부차, 월나라 왕 구천이다.
▶전국시대 B.C. 403~221 B.C. 260년의 전국 칠웅 연, 위, 제, 조, 진, 초, 한 으로 한, 위, 조가 진을 3분한 B.C. 453년 혹은 주왕실 403년부터.. -제자백가 또는 백가쟁명 춘추전국시대 770 ~ 221까지 사상가와 학파를 말한다. 아다시피 제자백가의 선구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이다.
-전한 B.C. 202년 ~ A.D. 8년, 고조 유방이 항우이긴후 세운 왕조, 진에 이어 중국을 두번째로 통일한 왕조, 수도는 장안,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있어 서한이라고도 ▶왕망 B.C. 45년 ~ A.D. 23년, 중국 전한 말기 관료, 신나라 황제 ▶후한 25년~220년,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 -위 220년 ~ 265년,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던 세 나라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조위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 삼국시대의 개인적 역사서, 후한 말기 ~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삼국시대, 위가 세워진 220년 ~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