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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조건 없는 대학(L’Université sans condition)』은 고등교육, 지식 생산, 진리의 말하기를 둘러싼 철학적·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대학이 어떤 가능성을 보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고도 도발적인 제안이다. 이 책은 1998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데리다가 전통적 철학 논문이 아니라 윤리적 요청에 가까운 형식으로 대학이라는 제도에 던지는 하나의 ‘기도’ 같은 글이다. 데리다는 대학을 단순한 지식의 전달 기관이 아니라, 조건 없이 말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특히 진리와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상상한다. 그는 “조건 없는 대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권력이나 자본, 시장 논리에 예속되지 않고 무엇이든 사유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대학이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자유는 단순한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해체와 질문을 통해 기존 질서와 가치의 전제들을 근본부터 흔들 수 있는 권리이다. 즉, 대학은 체제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흔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조건 없는’이라는 표현이 환상이나 공허한 선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는 조건 없는 대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운동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대학은 언제나 권력과 시장의 조건 속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 조건들에 질문을 던지는 힘을 내면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적 요청이 바로 데리다의 정치이며, 대학이 지닌 미래지향적 윤리의 핵심이다. 『조건 없는 대학』은 학문과 정치, 철학과 제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짧지만 강렬한 사유의 텍스트로, 현대 대학이 처한 위기 ― 특히 학문과 자본, 학문과 권력의 결탁 속에서 잊혀진 비판의 힘 ― 을 날카롭게 짚는다. 데리다는 이 책을 통해, 대학이 다시 질문하는 장소,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용기, 정의 없는 정의에 저항하는 이름 없는 목소리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독자는 이 책에서, 데리다가 단지 해체의 철학자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을 보호할 언어를 믿었던 마지막 휴머니스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깊이 실감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