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보궐선거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의 제1, 제2 도시인 서울과 부산의 전직시장이 성추행과 관련하여 물러나거나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실시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지리멸렬하던 야당이 단일화 과정을 통하여 집권 여당과 제1 야당의 대결로 압축된 선거였습니다. 물론 군소정당들이 여전히 난립하여 들러리를 섰지만, 1%를 겨우 넘긴 후보가 하나였을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정당정치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작금의 정치상황은 500여년 전에 시작된 붕당정치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선조 무렵 출발한 붕당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인데 이들은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동인 서인으로 나뉘었던 것이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으로 세분화되어갔고, 주도권을 두고 붕당 간에 살육을 벌이는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아갔습니다. 심지어는 왜국의 침입을 앞두고도 정세를 판단함에 있어 붕당 간에 견해가 엇갈리는 웃기지도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는 임진왜란의 치욕을 당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조선왕조의 붕당들이 호란의 치욕을 되갚으려는 효종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물론,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청나라에 반발하여 일어난 삼번의 난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휴의 개혁을 저지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올곧은 생각과 정책이 모두 지워지고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북벌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효종 재위시절에도 서인이 중심이 되어 겉으로는 북벌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북벌을 저지하려는 서인들의 끈질긴 방해가 있었고, 우암 송시열이 그 무리들을 이끌었다는 사실도 이 책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인들은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의 왕이나 신하나 명나라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체계에서는 동급으로 생각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던가요. 최근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집권여당이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송시열은 성리학자이며 공자와 맹자를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의 유학을 집대성한 주자학의 대가로 동양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정조 때는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붙여 송자(宋子)라 칭했습니다. 반면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의 주인공 윤휴는 공자와 맹자에 대한 주자의 해석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조선 유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종국에는 사문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자의 해석을 존중했던 송시열과는 다른 학문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자학자들이 사대부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것에 반하여, 늦게까지 재야에서 학문을 닦아온 윤휴는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사대부 집단의 반발로 완성시키지 못하곤 했습니다. 앞서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작금의 우리나라의 사회현상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의 저자는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어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의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15쪽)”라고 머리말을 마무리합니다. 어쩌면 작금의 우리 사회를 빗대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저만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이 책은
이 책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는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인 윤휴의 사상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왔다. 그는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거부하며 주류 학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이 외면하거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많은 저술을 통해 그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윤휴, 조선 시대의 유학자로, 1617 ~ 1680 의 시대를 살았다. 그가 살았던 조선 시대,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다 겪은 셈이다. 그래서 윤휴의 생애는 특별히 의미가 있다. 윤휴가 그런 사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윤휴는 그런 사건을 거치면서 북벌을 주창한 효종(재위 1649∼1659)과 현종(재위 1659∼1674) 시대를 거쳐 숙종 시대(재위: 1674∼1720)에 들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약을 받고.
왜 그는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을까, 그 이유를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죄목은
특이한 사항은 그가 다른 죄로 사약을 받은 게 아니라, 사문난적이란 죄명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다.
송시열과 윤휴
윤휴가 사문난적이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죽어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송시열과의 갈등이었다. 송시열은 애초에는 윤휴와 잘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 반대편에 서게 되고 결국 윤휴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북계는 송나라 학자이자 주자의 제자인 진순(陳淳)이고 신안은 원나라 학자 진역(陳?)을 말한다.
『중용』에 대하여
윤휴와 직접 관련이 되는 경전이 바로 『중용』이다. 다른 학자들이 『중용』에 대하여 주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데 반하여 윤휴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른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윤휴는 『중용』에 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졌는지, 알아보자, 송시열이 윤휴에 대하여 비판한 사항이기도 하니, 잘 살펴보자.
결국은 사사(賜死) -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수레 제작에 관하여
윤휴는 수레 제작을 주창했지만, 이것 또한 큰 반대에 부딪히고 좌절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반대의견이 많아 수레 제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수레 제작은 그후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파에 의해 다시 제기되지만,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산업을 위해 생각해볼만도 한 것이, 그저 당리당략에, 탁상공론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이 책은
윤휴, 그 이름은 그의 죽음 이후 금기가 되었다. 경전 해석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다는 죄 때문에, 그의 생각이 단죄를 당한 것이다.
이 책으로 그런 시대를 살았던 윤휴라는 선비를 만나고, 그의 사상을 돌아보게 된다. 주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경전 해석, 그야말로 ‘주자의 시대’에 경전 해석을 다르게 했다고 죽어야 했던 그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그의 죽음 이후로 기울어지는 조선이란 나라가, 그래서 안타깝다. 그의 생각이 좀더 인정받았더라면, 그래서 활발하게 생각들이 교환되고, 열린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해석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
윤후는 송시열과 노론 기득권 세력에 의해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렸다. 백성들의 민폐 해소와 신분제 해체 주장, 임금과 백성과 학문을 사랑하고, 평생 일관된 도를 추구한게 죄일까? 장독(곤장 맞은 독)에 신음하던 그는 사약을 마셔야 했고, 마지막 유언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윤후가 사형당한 지 3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저자의 열정적인 연구와 치밀한 고증 덕분에,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던 윤후의 삶과 사상을 오롯이 되살려 내고 있었다. 마지막 유언까지도 거부당했던 윤후!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했던 시대, 그런 시대의 청산을 희망한다면, 이 책 한번 꼭 권하고 싶다. |
절대적인 도그마가 지배하는 시기엔 도그마에 약간의 해를 가하려는 행위도 반역에 준하는 것으로 취급받았다. 17세기 조선의 주자학이 바로 그러한 절대적인 도그마였다. 조선에서 주자학은 종교처럼 떠받들여진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주자에 대한 일말의 농담과 풍자도 용납되지 못하던 숨막히는 이념의 시대였다. 주자에 대한 일말의 비난과 평설도 사문난적으로 몰려 문자옥에 버금가는 탄압과 박해의 구실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용감하게도 주자 학설에 반대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바로 백호 윤휴의 항변이다. 윤휴(1617-1680)의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저자 미상의 책『수옥문답』에 따르면, 윤휴의 일생은 학문의 추구, 북벌대의의 실천과 백성들의 각종 폐단 제거로 점철된다. 다시 말해서, '학문, 대의, 민폐'가 바로 윤휴 담론의 3대 키워드인 셈이다.
17세기 중반 숙종 때의 조선은 정통 주자학과 수정주의와의 논쟁이 격화되고 서인과 남인간 당쟁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정통 주자학의 화신이라면, 남인 윤휴는 수정주의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당색을 보면 윤휴는 허목과 함께 현종 때 출사를 거부한 청남(淸南)의 영수로,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과 입장을 완연히 달리했다. 노론이 집권하는 동안,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린 윤휴의 저작은 금서가 되었다.1660년 효종의 국상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기간을 두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난다. 서인은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은 참최복(3년복)을 주장했다. 기해예송의 승리는 서인에게 돌아갔다. 그후 15년간 윤휴는 내려지는 벼슬을 사양하며 은거하다 청나라에서 오삼계에 의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에게 '대의소'를 올려 급진적인 북벌을 주장한다. 1674년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돌아가면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윤휴는 성균관 사업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치다 우찬성에 오르지만 경신환국으로 실각하여 갑산으로 유배된 뒤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된다. 1689년 기사환국후 권력을 잡은 남인은 이 사건이 무옥임을 주장하고 윤휴는 이때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된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대표작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1617년 대사헌 윤효전의 아들로 태어나 1680년에 사약을 받고 죽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윤휴의 삶을 추적하고, 송시열과 노론 추종 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철저하게 금기시된 윤휴의 삶과 사상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 조선 중후반기의 최대 라이벌이 였던 송시열과 윤휴의 이야기에서부터 윤휴의 죽음 이후, 침묵의 제국이 된 조선의 모습까지 모든 실상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
중고등학교 6년간 역사 수업을 들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윤휴. 내가 처음 윤휴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경기도문화재단의 역사탐방에서 의정부에 있는 서계 박세당 고택과 묘를 찾았을 때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또는 공격하는 용어이다. 비난이나 공격할 때 쓰는 용어이기에 그리 위협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살생부나 마찬가지였다. 우암 송시열, 그는 주자학과 예학의 대가로서 그의 주장은 곧 법이었다. 그가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박세당과 윤휴. 그들은 결국 정치적 보복과 무고로 유배되었고 심지어는 사약까지 받아 삶을 마감했다. 그들의 사상이 어떠했기에 그러했을까? 윤휴 그는 임금과 백성과 학문을 너무도 사랑했고, 평생 일관되게 도를 추구했다. 송시열은 주희를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말이나 글은 일점일획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주자 절대 추종론자였다.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윤휴는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는 것이다. 윤휴에게는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문난적이 되었다. 윤휴는 청나라에서 벌어지는 삼번의 난을 이용해 반청 연합 전선을 구상하여 청나라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윤휴, 그의 길에 북벌대의가 있었다. 그 순간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세력에게 그는 정적이 되었다.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국력이 강해야 했다. 임란 당시 류성룡은 면천법을 시행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 의병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구했다. 민부가 곧 국부라고 생각했던 윤휴는 민부를 달성하려면 양반들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되거나 축소되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서 윤휴가 주창한 법이 바로 지패법(종이로 만든 신분증 제도)과 호포법(양반도 군포를 납부하는 제도) 이었다. 윤휴는 호패법과 지패법을 시행함으로써 신분제를 폐지 내지는 완화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예론을 강화하고,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해서 혼란을 극복하려 했다. 윤휴, 그의 길에 백성들의 민폐 해소가 있었고, 신분제 해체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윤휴, 그는 적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사약을 마셔야 했고, 마지막 유언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예송논쟁 자의대비 복제가 1년인지, 3년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의 왕권을 부정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왕이 아닌 사대부의 죽음이었다.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자신들이 한때 군부로 모셨던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에 의해 서자로 전락했다.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그들은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 생각했다. 이런 견해 충돌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조선 왕실을 절대적인 왕실로 인정하는 남인들의 견해와 조선 왕실을 명 황실의 신하로 인정하는 서인들의 견해가 복제를 계기로 드러난 것이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였다. 윤휴는 약 5년 정도 벼슬에 있었지만 실제 벼슬에 있은 기간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북벌과 민생의 폐단 해소였다. 이런 윤휴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서인들의 생각이었다. 감히 주희에 맞서면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고, 사대부의 특권을 폐지하려 한 윤휴를 살려두어서는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계속 누릴 수가 없었다. 다시는 윤휴 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려야 했다. 서인들은 윤휴의 죄를 만들었다. '대비를 조관하라'라는 단어를 억지로 해석하고, 도체찰사부가 설치될 때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죄였다. 이는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구히 잇겠다는 서인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서인은 노론이 되었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고, 6.25이후에는 친미주의자가 되었다. |
안녕하세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깡꿈월드입니다.
때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조선시대에 체면이 아닌 실리를 중시여겼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을까?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했던 622. " 금기어가 된 조선유학자, 윤휴" 입니다.
사실 나는 "윤휴" 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물론 내가 모든 유학자들을 알순 없지만 이정도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라면, 이정도로 나라를 위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처럼 서인과 등을졌던 "윤휴"의 이름은 쉽게 찾아볼수 없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당한 당대 최고의 선비, 윤휴.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조선의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위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로 향했다.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릴때 어린 윤휴는 오늘 날 치욕을 잊지 않겠다며 "북벌대의"를 자신의 뼈에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효종이 세상을 떠나게되고,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로 형식상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가 논쟁의 중심에 떠올랐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는 장자상은 3년, 둘째 아들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는데 송시열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가 적장자이고 효종은 차자이기 때문에 1년 입는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휴와 남인 세력은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장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시열 등을 비롯한 서인들이 조선 국왕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면 간단히 풀릴 문제였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에게는 국왕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과 등을 지기 시작한 윤후는 숙종의 명을 받고 조정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다.
윤휴는 북벌대의를 펼치고자 애를 썼지만 그와 다르게 사대부들은 말로는 북벌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말 뿐인 사대부 대신 윤휴가 주목한 세력은 바로 행동하는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북벌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이 나라는 사대부만의 나라가 아니고 백성들 자신의 나라이며, 북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의 일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 "지패법과 호포법"을 주창했지만 이는 기득권을 타파하는 법이었므로 양반들의 격렬한 반발만 불러 일으켰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미 유학자들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성현의 말씀을 달고 살지만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 정반대로 사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극소수에 불과했기에 조선은 계속해서 썩을 수 밖에 없었다.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방기하는 사대부들의 계급이기주의에, 능력이 아니라 신분을 따지는 신분제도에.
이대로 윤휴를 둔다면 분명 자신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이 후대에 들통날꺼라 생각한 서인들은 어떻게해서든 그의 목소리를 끊어내야만 했다.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제거해야 할 만큼 윤휴는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결국 모두 잘 사는 삶을 꿈꾸던 윤휴는 세상을 떠났고 주인을 잃어버린 그의 발자취들은 송시열이란 이름표를 단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만약 그때 숙종이 윤휴의 말을 새겨 들었다면,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고 조선의 미래를 생각한 학자들이 있었다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한번이라도 되돌아봤다면, 조선의 마지막은, 지금 우리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이 책은 다산북스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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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19502074/222313307686 "하늘은 주유를 내시고도 공명을 내셨는가" 강호동씨 말투를 좀 빈다면, "이런 기 어딨노?!" 윤휴 또한 유사한 톤으로 외칩니다. "주자는 되고 나(윤휴)는 왜 안 되는가" 중용을 주자만 알고 나는 왜 모른다는 말인가.? 이러한 연유로 숙종실록은 윤휴(1617~1680)를 사문난적(사문반적)으로 싣고 있습니다. 당시 '주자성리학'은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질서'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주자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서인(노론) 및 산림의 영수로 윤휴의 대척점에 선 인물입니다. 송시열은 율곡 선생으로 대표되는 기호학파를 계승하고 신분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대안을 낸 긍정의 일면이 있습니다.그러나 그의 '주자 신봉'이 이후의 조선(후기)을 얼마나 크게 지배했으며 그로 인해 퇴행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낳은 것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을 위한 것이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명백해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워 방자하게 억설을 하는 것이오." (송시열과 윤선거의 대화 p78) 교조주의로 흐른 주자 학설이 당시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는 송시열의 말입니다. 기원전 공ㆍ맹의 도덕 사상으로 성립한 성리학은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주자학이라고도 불립니다. 한편 명의 양명학은 주자의 해석에 반대하여 이룩한 학문(학설)입니다. '주희도 되고 양명도 되는데 윤휴의 해석이 다르다고 하여이것이 사문난적이 될 입니까.' 10여 년에 걸쳐 책을 집필한 저자 이덕일은 윤휴가 무엇을 두고 어떻게 해석했는지의 디테일에서 빛이 납니다. 가격을 지불하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부분이죠.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이덕일, 다산초당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2021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되고, 300년이 지나 후손이 조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면 필시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었거나, 여전히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불이익이 생겨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 아닐까?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된 사람은 조선 유학자 윤휴이다. 그의 후손은 300여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조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해도 어떤 후손은 조상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300여 년 전에 사형당한 한 선비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윤휴를 다시 보려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의 힘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추적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로 연결된다.(14쪽)
아무리 다른 당파라도 공작 정치로 무고한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서인들이 소론이 되고, 정치 공작을 옹호한 서인 중진들이 노론이 되었다. 이후에도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렇게 지금도 국사 교과서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놓았다.(396쪽)
조선 시대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서인들에 맞선 유학자 윤휴. 서인은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으로 주희와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 윤휴는 주희와의 다른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주희가 정리한 중용과 대학도 얼마든지 다르게 분류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군주, 사대부, 백성으로 이어지는 신분제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서인들과 군주와 백성만 있기에 사대부의 특권을 없애려는 청남의 대립은 서인들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일제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다.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했던 결과가 나라를 잃게 한 단초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옛날 스승과 제자들도 묻고 대답하는 도리가 있었다. 옛날에 물은 것은 행하려고 묻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묻는 것은 단지 알려고만 하는 것이다.(…) 묻고 대답하는 데 있어 옛날과 지금이 다른 것이니,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73쪽)
예론은 흔들리는 사회 질서를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이해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김장생, 송시열 등이 주희를 절대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희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 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75~76쪽)
<중용>은 <대학>, <논어>, <맹자>와 더불어 사서라고 높여지지만 <논어>, <맹자>와 달리 고대부터 유학의 경전은 아니었다. <중용>과 <대학>은 원래 <예기> 49편 중의 한 편씩이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따로 떼어내어 독립된 책으로 만들어 <논어>, <맹자>와 같은 사서의 반열에 올린 것이었다.(76쪽)
서인들은 이율배반적이었다. 왕실에는 사가의 예법을 적용하면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은 더욱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서인들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심 이론으로 예론을 가져간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93쪽)
윤휴는 선대 왕인 효종과 현종의 유지이기도 한 북벌을 주장한다. 당론으로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서인들과 달리 윤휴는 제도를 정비하고 실력있는 무인을 뽑아 청을 선제 공격하자고 주장한다. 청의 남쪽에서 반란(삼번의 난)이 일어나고 있으니 삼번과 대만(정)과 협력하면 청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휴의 상소를 <대의소>라고 부르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대의는 북벌을 뜻했다. 윤휴의 대의소는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였다. 그것도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북벌하자는 상소였다. 지금까지 북벌은 서인의 당론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북벌을 주장하는 서인 실세는 아무도 없었다. 서인에게 북벌은 당의 선명성을 과시하는 구호에 불과했다. (…) 말로만 북벌을 내세워 조선국왕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서인의 당략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북벌 대의소를 올리자 자신들의 이중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26쪽)
“때가 왔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時至不斷, 反受其亂, 天與不取, 反受其殃)”(54쪽)(시지불단, 반수기란, 천여불취, 반수기앙)
윤휴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병폐를 목도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지패법, 오가통법, 호포법을 정비해 민심을 바로잡아 북벌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지패법은 당시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을 달리 사용한 것을 모두 종이로 대체하자는 것이고, 오가통법은 행정단위를 정하는 것으로 신분의 구분 없이 주변의 다섯 가구를 묶어 한 통(統)으로 정하고, 다섯 개 통이 리(里)로, 여러 개의 리는 면(面)으로, 여러 개의 면은 군현(郡縣)이 된다. 호포법은 지패법과 오가통법으로 확인된 16세~60세 남성 모두에게 군납을 부과하자는 것이다. 당시 양반 사대부는 군포가 면제되고, 일반 백성은 죽은 사람과 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리고, 도망간 자의 군포를 이웃들에게 물리는 등 군포의 폐단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전체주의적 억압이 판치는 사회에서 고립된 윤휴에게 유일한 피안의 언덕은 학문이었다.(109쪽)
법이나 정책이 백성들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했다. 일반 백성들이 사대부에 비해서 법적, 정책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윤휴가 주창한 법이 지패법과 호포법이다.(197쪽)
식구 수의 많고 적음과 재산의 빈부를 논하지 않고 다섯 집을 묶어 한 통을 만든다는 것이다. 빈자는 대부분 일반 백성이고 부자는 양반 사대부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이웃 다섯 집을 묶어서 한 통을 만든다는 방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199쪽)
양반 사대부들이 지배법에 반대한 이유는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종이로 된 지패를 차고 다니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오가통법을 반대한 이유도 상민이 통수가 될 수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지패법은 호포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지패법과 오가통법은 반드시 호포법과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패법과 오가통법은 시행하고 호포법은 연기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208쪽)
호포법이란 모든 호가 군포, 즉 병역세를 납부하자는 법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까지의 남정들이 직접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1년에 2필씩 군포를 납부했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는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209쪽)
호포법을 시행하면 ‘온 나라가 일어나서 원망할 것’이란 말은 ‘온 양반 사대부가 일어나서 원망할 것’이라고 말하면 정확한 것이었다. 호포법을 시행하면 원망할 사람은 양반 사대부지 일반 백성들일리가 없기 때문이었다.(219쪽)
사대부들은 윤휴가 주장한 지패법, 오가통법, 호포법을 반대했고, 숙종은 이들의 의견을 절충해 일부 시행했지만, 2~3년 후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적당히 타협한 반쪽짜리 개혁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켜 안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적당히 타협한 반쪽짜리 개혁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정치는 생물이라며 적당히 타협한 법과 제도가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혀 효과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할 때 적당히 타협한 법과 제도가 개혁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외주화를 막자는 취지로 입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적당히 타협’하며 ‘재해기업보호법’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77786.html)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강력 처벌하기 위해 별도의 수사처를 만든다는 공수처법은 야당에 비토권을 주고 ‘적당히 타협’해 통과시켰지만, 타협의 산물인 ‘야당 비토권’으로 공식 출범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재차 법을 바꿔 공수처장을 임명했지만, ‘수사방해처’란 비판을 받으며 아직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24034530)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유배지로 가는 윤휴에게 ‘피 묻은 버선을 갈아 신으라고 권하자’ 거절하며 자손들에게 ‘시대의 형세를 알지 못하면 우환이 닥친다’는 점을 경계하도록 했다. 제 한 몸의 영화와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시대의 형세이고, 백성의 등골을 뽑아 제 뱃속을 챙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북벌을 주장하고 사회적 폐단을 없애 개혁하자고 한 것이 우환이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된 오늘 날에 시대의 형세를 따라 망국의 길로 갈 것인지, 시대의 우환을 따라 사회적 병폐를 없애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사회를 만들 것인가 묻는 것 같다.
(유배지로 가는 윤휴에게) 피 묻은 버선을 갈아 신으라고 권하자 윤휴가 거절했다. “그대로 두어라. 자손들 가운데 시대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시대의 우환을 범한 자에게 경계가 되게 하리라(可作子孫之不識世勢妄犯世患者之戒)(383쪽)(가작자손지불식세세망범세환자지계)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조선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 것이었으며, 사대부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면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다른 사상도 용인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꾀하려 했던 것이 또한 시대의 우환이었다.(383~384쪽)
술은 마셔야 맛을 제대로 느끼고, 말은 표현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생각했다. 말의 의도와 뜻이 분명하게 전달했어도 듣는 사람은 듣고 싶은대로 취사선택해 듣는다. 이해시키려 할수록 오해만 쌓인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가 더 맛있고, 말은 하지 않을 때가 더 뜻깊다’는 윤휴의 탄식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개혁가의 후회와 좌절이 느껴지는 한편, 사고의 깊이를 더해 말과 행동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느껴진다.
술 마시는 맛이 술을 마시지 않는 맛보다 길지 못하다.飮之爲味 不若不飮之爲味長也
* 해당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았으며, 제 주관에 따라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
역사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다. 책은 인조반정 후 어지러운 조선 사회, 송시열과 그를 둘러싼 유학자들과 왕권과의 대립, 그 속에서 개혁가, 사상가로서의 윤휴의 모습을 정말 흥미진진하게 담고 있다. 이번 주말은 이 책과 함께 역사 속으로 떠나 보시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늦은 나이 만 58세에 처음으로 정계에 나간 인물! 평생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를 관직에 나아가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결국, 정적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마는.............. 지나간 시대지만, 너무 안타깝고 지금 이 시대 또한 몇 백 년 전의 조선 시대랑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느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났을 때부터 조선은 어쩌면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송시열과 그 학파들은 '주자학'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론으로 이용하고 이외의 유학 해석을 이단으로 몰아 배척했다. 윤휴야말로 공자, 맹자가 주장한 유학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고, 당대 많은 사대부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나 초야에 묻혀 살았다. < 예송 논쟁 > 송시열과 그 무리들은 왕의 죽음에도 1년 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왕을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의 한 사람쯤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서인들은 명 황실의 관점에서 조선 왕실을 제수, 즉 신하라는 관점으로 본 것뿐이었다." <p 92> 여기에 윤휴는 3년 상을 주장한다. 당시 많은 유학자가 3년 상이 맞다고 여겼으나, 송시열과 그 무리들이 두려워 결국은 모두 송시열의 편을 든다. 이들이 이렇게 예법을 중요시한 이유는 "양란(병자호란, 임진왜란) 이후, 흔들리는 신분제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예론을 주장했다. "<p 93>
예법 하나를 가지고 편을 가르고 적으로 몰아세우는 그 폭력이 현대 '매카시즘'을 닮았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나? 슬픈 일이다. 과거로부터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이 .... 바로 이렇기 때문에 역사를 알아야 한다. < 왕권과 사대부들의 대립 > 송시열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은 임금 한 사람쯤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고, 현종이 송시열과 그 무리를 벌하려고 할 때, 갑자기 예고 없이 왕들이 죽는다.
결국 서인들은 유학을 겉으로 내세우지만,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이익집단 같다. 타인과 유학 경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심지어 왕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송시열은 소시오패스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서인, 남인, 노론, 소론... 이런 단어들은 익숙하게 이해된다. 그래서 읽기 전에는 잘 몰라도 된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러운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그 무리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겁쟁이들이다. 겉으로는 북벌을 말하지만, 청을 두려워해서 눈치만 보고 알아서 비위를 맞추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계급 제도를 더 공고히 만들어 나간 무리들. 이들에게 북벌은 왕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북벌을 위해, 실제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호패법을 바꾸고 군역법을 바꾸어 호포제를 시행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심지어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전차 제작까지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반대가 당시 신분제를 그대로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사대부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들 때문이다.
책은 모두 9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먼저 당시 중국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 또한 만주족(청)이 중국을 재패해가는 과정에서 명과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혼란한 상황이다. 제1 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윤휴가 북벌을 주장한 것이 결코 탁상공론으로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납득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기인 만큼 중국 역사 속 인물들의 행동을 쫓아가는 일은 정말 흥미롭다. 이후 제2장부터 윤휴라는 인물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윤휴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였고 원래 이름은 '휴'가 아니었다 스스로 '휴'로 개명했고 호를 백호로 지었다. 27세 때 어머니를 모시고 여주로 왔는데 그때 집 근처에 백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사진은 송시열과 윤휴가 처음 대면했던 속리산 복천사 모습이다. < 서술 방식 > 사진자료를 곳곳에 정말 풍부히 싣고 있다. 이런 인물 사진 자료 하나 사실 구하려고 해도 쉬운 게 아닌데, 인물들, 장소들 등 각종 자료 사진들 .... 책의 이해를 돕는 양질의 좋은 사진들을 많이 싣고 있다.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종종 등장해서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으면 그다지 방해받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다. 저자가 상황 설명을 잘 하고 있고 대화글로도 상황을 잘 보여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다.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윤휴가 어떻게 될지 읽어 나가는 과정은 긴장감을 준다. 제발 옛이야기처럼 결말은 의로운 이가 승리하는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읽어 간다. 그러나 종종 현실은 소설보다 다 잔인하다. 윤휴를 읽는 과정은, 당시 안타까운 조선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는 지금 이 시대, 또는 미래 어느 때이든 개혁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모두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다. 개혁을 바라는 집단은 누구인가? 그들은 과거 송시열과 그 무리들 같이 개혁을 바라지 않는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희생당할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잔인한지....... 인간이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동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단지 그 시대 조선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개혁이 꿈으로 끝나는 일은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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