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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지독히 다행한..
"[90] 지독히 다행한.." 내용보기
[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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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람 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그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 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 사소한 한마디 ]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작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행인이

맹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맹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크게 벌었던 것이다

 

[ 비 오는 날 ]


 

하늘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먼저 젖는다

이런 날은

매운 맛을 보는 게 상책이다

 

아귀찜 먹으로 '싱싱식당'엘 간다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입속이 화끈거린다

 

나에게도 분명

매운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비처럼 젖는 

세상의 예사로운 일이여

어떤 것은 눅눅하여

얼룩 된 지 여러날이다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길바닥을 찍고 있다

자전거를 굴리며 소년이

천상병거리를 지나고 있다

시인은 죽어 거리를 남겼다

 

모든 확신은

증오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생(生)의 후반

우두커니 서 있다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별나지 않은 일에

귀 기울리는 저녁까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기를 써야 할 날

오늘 같은 날이다

 

[ 귀는 소리로 운다 ]


                                  -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내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 마침내 ]


 

아침 바람은 가로등에 스치고

눈 내리는 날엔 풍경이 풍경을 본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고

매일 실패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젊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고

우리의 찬란이 세상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도 벽이 있고

생각에도 동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닫고 살기보다 열어놓고 살기

 강력한 삶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묻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 뒤를 돌아보는 저녁 ]


 

길을 가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본다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내려

잘못된 것이 없나

뒤를 살펴보는 인디언처럼

 

두고 온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다

 

뒤돌아보는 나는 지금 뒤편의 그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일이

나를 돌아볼 때처럼 어둑하다

 

내가 혼자가 되다니....... 돌아보면

나는 나 자신을 추스른 것이다

세상에 할 기억이 많아

진퇴양난을 겪기도 한 모양이다

 

가던 길 돌아보다

세상 참 더럽게 시끄럽네, 참을 수 없을 때

물속에 비친 달빛 같은

정화론(淨和論) 한편 쓸 수 있겠다

 

나는 오랫동안 한길 가기를 원했으므로

지금은 오래

뒤를 돌아보는 저녁이다

 

 

[ 몇번의 겨울 ]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

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

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붙 오는 것이 봄이라고

아주 평범한 말로

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 

끝은 없을 것입니다

 

[ 아무 날도 아닌 날 ]


 

오늘 하루를 생각 없이 보내버렸다

어제 죽은 친구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내일인데

오늘을 통해 내일이 오는 줄 모르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오늘은 흘러 어디로 갔나

종일 꽃 지는 그늘 속으로

바람이 속설처럼 날아다닌다

날개도 없는 것들이

내일로 가는 길을 지그시 누른다

긴긴 겨울이

주먹 속에 봄을 움켜쥐고 있다

바람은 또

앞질러 계절을 살핀다


 

세상에서 가장 몹쓸 것

오늘을 함부로 낭비한 사람

낭비하고도 내일을 가질 것 같은 사람

 

 

 

 

...  소/라/향/기  ...

s******8 2021.12.29. 신고 공감 1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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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물음, 같은 답 [시집-지독히 다행한]
"다른 물음, 같은 답 [시집-지독히 다행한]" 내용보기
'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133쪽)'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읽는다고 말하련다. 이 시집 속 어느 한 편 허투루 읽지 않도록, 세심하고 다정하며 쓸쓸하기도 한 시심 가득 담아 놓은 시들 뒤편에 시인은 자신의 산문까지 실어 놓았다. 왜 시를 쓰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 안
"다른 물음, 같은 답 [시집-지독히 다행한]" 내용보기

'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133쪽)'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읽는다고 말하련다. 이 시집 속 어느 한 편 허투루 읽지 않도록, 세심하고 다정하며 쓸쓸하기도 한 시심 가득 담아 놓은 시들 뒤편에 시인은 자신의 산문까지 실어 놓았다. 왜 시를 쓰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 안아 줄 독자를 기대하면서.   

 

아무 쪽이나 펼쳐도 좋은 시집을 오랜만에 본다. 마음에 콕 와 닿는 구절들을 옮겨 보겠노라 내내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 곳에도 줄을 긋지 못했다. 그으려면, 옮기려면, 결국 시집 한 권을 통째로 긋고 옮겨야 할 듯해서였다. 시집 제목처럼 '지독히 다행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집에는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도 물도 길도 모두 바람 아래 있는 듯하다. 덕분에 '바람아래해변(46-47쪽)'이라는 시를 다른 시들보다 더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좋아서, 이 시간을 만들어주는 시가 좋아서, 이 좋은 시를 만나게 해 준 시인이 좋아서, 나는 또 하염없어진다.    

 

그리고 또 한 편 더. '의외의 대답(94-95쪽)'이라는 시.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시인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라고 믿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다. 짧은 시 한 편으로도 사람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다는 경험을 자주 겪는 건 아니다. 횡재한 기분이다.  

 

무엇보다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설사 시인이 어려운 마음을 담았다고 해도, 그래서 어렵게 읽어 주기를 바랐다고 해도, 나는 쉽게 읽고는 깊이 빠졌다가 오래 머물렀다.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고. 

 

두 편을 천천히 옮겨 본다.

 

46-47

- 바람아래해변

물을 좋아하는 너와

바람을 좋아하는 내가

물처럼 살 수 없고

바람처럼 가벼울 수 없을 때

 

너보다 더 낮은 곳에 물이 있고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바람이 있다는 걸

바람아래해변에 가서야 겨우 알았다

 

바람은 해변 아래서만 불고

물은 해변 아래서만 흘렀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물이라 하고

누구는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바람이라 하지만

 

바람아래해변에선

모든 것이 바람 아래라는 것을

바람아래해변이 말해준다

 

바람이 불지 않고는

어떤 생각도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고

바람 없이는

어떤 후회도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바람아래해변에서

 

바람을 맞고도

너와 나는 물처럼 하염없다

 

94-95

- 의외의 대답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

지독히 다행한
YES마니아 : 로얄 j***6 2021.07.17. 신고 공감 2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