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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람 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그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 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 사소한 한마디 ]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작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행인이 맹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맹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크게 벌었던 것이다
[ 마침내 ]
아침 바람은 가로등에 스치고 눈 내리는 날엔 풍경이 풍경을 본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고 매일 실패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젊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고 우리의 찬란이 세상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도 벽이 있고 생각에도 동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닫고 살기보다 열어놓고 살기란 더 강력한 삶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묻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 아무 날도 아닌 날 ]
오늘 하루를 생각 없이 보내버렸다 어제 죽은 친구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내일인데 오늘을 통해 내일이 오는 줄 모르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오늘은 흘러 어디로 갔나 종일 꽃 지는 그늘 속으로 바람이 속설처럼 날아다닌다 날개도 없는 것들이 내일로 가는 길을 지그시 누른다 긴긴 겨울이
바람은 또 앞질러 계절을 살핀다
세상에서 가장 몹쓸 것은 오늘을 함부로 낭비한 사람 낭비하고도 내일을 가질 것 같은 사람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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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133쪽)'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읽는다고 말하련다. 이 시집 속 어느 한 편 허투루 읽지 않도록, 세심하고 다정하며 쓸쓸하기도 한 시심 가득 담아 놓은 시들 뒤편에 시인은 자신의 산문까지 실어 놓았다. 왜 시를 쓰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 안아 줄 독자를 기대하면서.
아무 쪽이나 펼쳐도 좋은 시집을 오랜만에 본다. 마음에 콕 와 닿는 구절들을 옮겨 보겠노라 내내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 곳에도 줄을 긋지 못했다. 그으려면, 옮기려면, 결국 시집 한 권을 통째로 긋고 옮겨야 할 듯해서였다. 시집 제목처럼 '지독히 다행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집에는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도 물도 길도 모두 바람 아래 있는 듯하다. 덕분에 '바람아래해변(46-47쪽)'이라는 시를 다른 시들보다 더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좋아서, 이 시간을 만들어주는 시가 좋아서, 이 좋은 시를 만나게 해 준 시인이 좋아서, 나는 또 하염없어진다.
그리고 또 한 편 더. '의외의 대답(94-95쪽)'이라는 시.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시인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라고 믿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다. 짧은 시 한 편으로도 사람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다는 경험을 자주 겪는 건 아니다. 횡재한 기분이다.
무엇보다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설사 시인이 어려운 마음을 담았다고 해도, 그래서 어렵게 읽어 주기를 바랐다고 해도, 나는 쉽게 읽고는 깊이 빠졌다가 오래 머물렀다.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고.
두 편을 천천히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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