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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김안
국내작가 문학가
출생지
강원도 도계
직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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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국내작가 문학가
문학평론가. 강원도 도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중·고·대학을 다 마쳤고 인천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현재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30년 넘게 문학평론과 시사 칼럼을 써왔고, 지금은 계간 [황해문화]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기도 하다. 『희망의 문학』『불을 찾아서』『잠들지 못하는 희망』『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조연현, 비극적 세계관과 파시즘 사이』『자명한 것들과의 결별』『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鬪爭の詩學』『내면 산책자의 시간』『문학적 근대의 자의식』등의 저서가 있다. 시집으로 『오빠 생각』, 『미제레레』, 『아무는 밤』이 있다. 제5회 김구용시문학상, 제19회 현대시작품상, 제7회 딩아돌하작품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전체작품

작가의 추천

  • 눈사람은 내가 짜준 목도리를 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벚꽃 보러 갈까? - 살아 있을 수 있으면. - 약속하면 살아 있을게. 짧은 삽화지만 소설 한 편의 무게를 능히 감당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로 알려진 헤밍웨이의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은 적 없습니다.) 보다 한 수 위다. 하명희의 소설들은 따뜻하다.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나면 어느새 가슴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그 안에 어떠한 긴장도 고민도 없이, 그저 세상을 좋게만 바라보려는, 사실상의 방관에 다름없는 온정주의적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따뜻함에는 확실한 방향성이 있다. 그의 따뜻함은 이 세상의 뒤틀림과 그릇됨에 의해 상처받은 존재들을 향해서만 열려 있다. 그것은 따뜻함이되 ‘당파적 따뜻함’이다. 장편 나무에게서 온 편지(2014)와 소설집 불편한 온도(2018)의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야만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근원적 적대성과 악마성이 만들어 낸, 패배와 좌절, 추방과 유랑, 상처와 죽음으로 가득한 매우 끔찍한 지옥도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하명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마치 우는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처럼 그 모든 고통의 주체들을 품어 안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듣는 이들도 덩달아 그렇게 그 품에 안겨 있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힘이, 희망이, 고요히 스미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도저한 따뜻함은 어디서 오는가? 여기 실린 18편의 또 다른 이야기들은 대부분 매우 짧은 이른바 장편(掌篇)들인데 하명희의 그 따뜻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짧지만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하명희 소설의 밑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의 소녀와 고양이, 불량소년들, 룸펜 프롤레타리아 청년들, 시장의 생선장수, 농촌노인, 글 못 쓰는 작가들, 반지하방 이웃, 시설 수용 청소년들, 노숙자들 등, 이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작가가 자기의 일상세계 속에서 오가다 만나고 헤어지는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로 엮일 수조차 없이 하찮고 미미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하찮고 미미한 것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결코 하찮고 미미하지 않다. 하명희는 이 모든 하찮고 미미한, 그래서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깊고 따뜻한 시선을 던지고,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섬세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선과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마치 감염된 듯 그들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질긴 인연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우리 하나하나가 그들의 ‘하찮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연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게 바로 하명희 소설의 따뜻함의 기원이다. 그리고 세월호 이야기 『배가 들어오는 날』, 여순사건 이야기 『그 밤, 잠의 꽃밭에서』, 가난한 이웃과의 공명을 다룬 ?청자의 노래?, 참척의 슬픔을 극복하는 가족이야기 『종달리』, 악연의 가족사에 대한 성찰 『보리차를 끓이며』 등, 이 짧은 이야기들과 함께 묶여 넘어가기엔 아까운 주옥 같은 단편들은 하명희 문학세계의 또 다른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명편들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
  • 시는 원래 자연의 것이고, 자연과 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과 인생에 대한 겸손한 송가였다. 도시에서도, 그 인공의 낙원에서도 시는 지어지지만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유배당한 인간들이 잃어버린 자연을 그리워 부르는 애가에 지나지 않는다. 시적인 것의 핵심에 초월이 있다면 그것은 시가 이제는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신성한 자연으로 단번에 돌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인류세’가 지속되는 동안 인간에게 자연은 어느새 잃어버린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모든 시는 그렇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노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이제 자연은, 그리고 자연과 생명의 순환에 몸을 맡기는 삶은 우리가 새삼 찾아나서야 할 미래의 삶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류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자연과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고 그 삶에서 솟아나는 잃어버린 말을 다시 깨우쳐야만 한다. 농사짓는 삶을 시작한 지 7년이 된 20대 여성 청년 농민 서와의 시를 읽는다. 단순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다. 마치 막 말을 배워서 처음 써먹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말솜씨처럼 그렇다. 도시의 삶을 청산하고 자연 속으로, 농農적 삶으로 전향해 모든 것을 새로 배워 나가는 일곱 살짜리 어린 농민의 말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단순하고 소박한 말로 써 내려간 시에는 우리들 도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순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들어차 있다. 우리는 그 문법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그 말과 문법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시는 이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노래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가 아니라, 어서 와 주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다림의 노래다. 그래서 아직 자연과 생명의 리듬에 충분히 몸을 싣지 못한 어설픔과 서투름 속에서도 숨겨진 보석처럼 반짝인다. 진짜 미래파 시가 여기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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