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문학 시장은 유럽의 지적 담론을 일종의 문화상품처럼 수입하고 가공하고 유통한다. 철학자의 이름과 얼굴은 이미지 상품으로 판매되고, 철학 개념은 떠다니는 기표처럼 여기저기에 붙었다 떨어진다. 그에 반해 지적 논의를 위한 공동의 기초는 너무나 허약하다. 수많은 사람이 철학 개념을 언급하며 정치에 참여하지만, 정치철학의 기초적인 문제들, 예컨대 이 책에서 다루는 인권과 시민권의 구별과 일치, 인민과 네이션nation 사이의 긴장, 정치와 사회의 구별 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지식 체계의 기초를 구성하는 개념과 문제들에 관한 공동의 이해를 수립하는 일이다. 여기에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