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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한국서적유통 20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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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金正喜, 추사秋史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특히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어려서는 북학파의 거장 박제가(朴齊家, 1750~1805)에게 수학하여 청나라 문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24세에는 그의 생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 사행길에 동행하면서 수많은 청나라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게 되었다. 34세의 나이에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동부승지,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사이 그의 생부 김노경은 김우명의 상소로 고금도에 위리안치되는 일을 겪게 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특히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어려서는 북학파의 거장 박제가(朴齊家, 1750~1805)에게 수학하여 청나라 문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24세에는 그의 생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 사행길에 동행하면서 수많은 청나라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게 되었다. 34세의 나이에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동부승지,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사이 그의 생부 김노경은 김우명의 상소로 고금도에 위리안치되는 일을 겪게 되었고, 이후 55세 되던 해에는 우의정 조인영의 상소로 그 자신마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64세에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지만 해배 후 2년 만에 다시 북천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고 1년 뒤 해배되어 과천으로 돌아와 4년을 더 지내다가 향년 71세에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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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4쪽 | 212g | 190*260*4mm
ISBN13
9791191175127

출판사 리뷰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서법첩
阮堂書法(완당서법)음각목판 절첩본


조선말 간행추정되는 추사김정희의 고탁본첩-阮堂書法(완당서법)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며 가늘다)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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