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가격
27,500
19 22,300
YES포인트?
230원 (1%) 마니아추가적립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최대 3000원 즉시할인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국내배송만 가능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Misa Criolla - 1. Kyrie vidala-babuala (original version)
  • 02 2. Gloria carnavalito-yaravi (original version)
  • 03 3. Credo chacarera trunca (original version)
  • 04 4. Sanctus carnaval cochabambino (original version)
  • 05 5. Agnus Dei estilo pampeano (original version)
  • 06 Third Booke of Songes, 1603 - John Dowland: 2. Time stands still (Original Version)
  • 07 Franz Schubert: IV. Die Nacht "Wie schon bist du" (Arr. Heinzel for Violin and Vocal Ensemble)
  • 08 Remo Giazotto: Adagio in G Minor (Formerly Albinoni's Adagio) [Version for Solo Violin, Organ and String Orchestra]
  • 09 Bechara El Khoury: Byblos, The Old City
  • 10 Arvo Part: Spiegel im Spiegel
  • 11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36 "Enigma" - IX. Nimrod (Arr. Bateman for Violin and Vocal Ensemble)
  • 12 Stephen Collins Foster: Ah! May the Red Rose Live Alway! (Arr. Mason and Ungar for Violin, Baritone and Piano)
  • 13 The Traditional: Danny Boy (Arr. Bateman for Solo Violin, Harp and String Orchestra)
  • 14 Dream a Little Dream (Version for Solo Violin, Harp, Piano and String Orchestra)
  • 15 The Traditional: Amazing Grace (Arr. Bateman for Solo Violin, Voice, Harp, Piano and String Orchestra)

아티스트 소개16

작곡Edward Elgar

관심작가 알림신청
 

에드워드 엘가

영국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잉글랜드의 우스터 근교에서 태어난 엘가는 피아노 조율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가 처음 음악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99년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부터였다. 이후 《제론티우스의 꿈》, 《남국에서》, 《서주와 알레그로》,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협주곡》등의 걸작들을 남겼다. 그의 곡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01년에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이다.

Edward Elgar의 다른 상품

작곡Arvo Part

관심작가 알림신청
 

아르보 패르트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던 페르트는 군복무를 마친 뒤 1958년 탈린에 있는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며, 1958~67년에는 에스토니아 라디오 방송국 음악부에서 일했다. 그는 전(全)소련청년작곡가경연대회에서 어린이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우리 정원 Meie aed〉(1959)과 오라토리오 〈세계의 진보 Maailma samm〉(1960)로 1위를 차지해 동유럽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의 12음계(아널드 쇤베르크에 의해 만들어진 20세기초의 작곡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페르트는 〈네크롤로그 Nekrolog〉(1960)라는 작품에서 파격적으로 12음계를 실험했는데,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던 페르트는 군복무를 마친 뒤 1958년 탈린에 있는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며, 1958~67년에는 에스토니아 라디오 방송국 음악부에서 일했다. 그는 전(全)소련청년작곡가경연대회에서 어린이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우리 정원 Meie aed〉(1959)과 오라토리오 〈세계의 진보 Maailma samm〉(1960)로 1위를 차지해 동유럽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의 12음계(아널드 쇤베르크에 의해 만들어진 20세기초의 작곡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페르트는 〈네크롤로그 Nekrolog〉(1960)라는 작품에서 파격적으로 12음계를 실험했는데, 이것은 에스토니아 최초의 12음계 작품이었다.

1963년에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그는 〈교향곡 제1번 Symphony No.1〉(1964)과 〈교향곡 제2번 Symphony No.2〉(1966)을 작곡했는데, 〈교향곡 제2번〉에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인용한 부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피아노와 혼성합창 및 오케스트라를 위한 〈사도신경 Credo〉(1968)에서도 이 콜라주 기법을 사용했다. 종교적인 제목 때문에 소련에서 금지된 〈사도신경〉을 마지막으로 페르트는 12음계에 대한 실험을 끝냈다.

페르트는 그 후 8년 동안 집중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는 영화음악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곡을 하지 않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음악 같은 형식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페르트의 음악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징후는 그가 이 침묵의 시절에 창작한 소수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제3번 Symphony No.3〉(1971)이었다. 그러나 미국 청취자들이 페르트의 작품을 분명히 식별해낼 수 있을 만큼 그의 작품이 개성적인 소리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말에 현악기를 위한 작품들(특히 〈형제들 Fratres〉(1977)이 발표되었을 때부터였다.

페르트가 꾸밈없고 간결한 양식으로 작곡한 최초의 작품은 〈알리나를 위하여 Fur Alina〉(1976)라는 피아노곡이었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3화음의 연속을 발견했다고 말했고, 그것을 자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단순하고 작은 규칙으로 삼았다. 그는 3화음의 소리를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소리 같다고 묘사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작곡방식을 '방울 양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표현양식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정신적 교류를 추구하는 신세대에게 페르트가 만들어낸 단순하고 강렬하며 매혹적인 소리는 직접 전달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보 페르트는 거룩한 미니멀 아트 예술가라는 평가와 네오바로크 음악가라는 상반되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Arvo Part의 다른 상품

작곡Bechara El Khoury

관심작가 알림신청
 

베카라 엘-쿠리

관현악법의 대가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레바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베카라 엘-쿠리

Bechara El Khoury의 다른 상품

작곡Tomaso Albinoni

관심작가 알림신청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 ,Tomaso Giovanni Albinoni

작곡Franz Schubert

관심작가 알림신청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고,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기로 인해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테레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인 요한 미하엘 포글을 만났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Schubertiads 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방랑자》나 《교향곡 제5번》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방랑자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을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Franz Schubert의 다른 상품

작곡John Dowland

관심작가 알림신청
 

존 다울랜드

영국 또는 아일랜드 르네상스의 작곡가, 류테니스트, 가수

John Dowland의 다른 상품

작곡Ariel Ramirez

관심작가 알림신청
 

아리엘 라미레즈

노래Thomas Hampson

관심작가 알림신청
 

토마스 햄슨

성악가 (바리톤)

Thomas Hampson의 다른 상품

연주Daniel Hope

관심작가 알림신청
 

다니엘 호프

1974년생으로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출생, 영국에서 성장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보자르 트리오의 최연소 멤버로 7년간 활동했다. 솔로 연주자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그 중 ‘클래식 에코’는 여러 번 수상했다. 2007년 첫 번째 음반 「조상의 유산」을 발표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다니엘 호프의 첫 번째 저서 『조상의 유산』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그는 아카데미 수상 배우인 클라우스 마리아 브랜다우어와 공연을 위해 "전쟁과 평화", "언플러그드 모차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의
1974년생으로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출생, 영국에서 성장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보자르 트리오의 최연소 멤버로 7년간 활동했다. 솔로 연주자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그 중 ‘클래식 에코’는 여러 번 수상했다. 2007년 첫 번째 음반 「조상의 유산」을 발표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다니엘 호프의 첫 번째 저서 『조상의 유산』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그는 아카데미 수상 배우인 클라우스 마리아 브랜다우어와 공연을 위해 "전쟁과 평화", "언플러그드 모차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의 스크립트를 집필했으며, 종종 BBC와 아메리칸 퍼블릭 미디어의 라디오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Daniel Hope의 다른 상품

연주Michael Metzler

관심작가 알림신청
 
퍼커션 연주자

Michael Metzler의 다른 상품

연주Patrick Messina

관심작가 알림신청
 

파트릭 메시나

클라리넷 연주자

Patrick Messina의 다른 상품

연주Jacques Ammon

관심작가 알림신청
 

자크 아몬

피아노 연주자

Jacques Ammon의 다른 상품

연주Marie-Pierre Langlamet

관심작가 알림신청
 

마리 피에르 랑글라메

클래식 하프 연주자

Marie-Pierre Langlamet의 다른 상품

지휘Ruben Dubrovsky

관심작가 알림신청
 

루벤 두브로프스키

오케스트라Zurcher Kammerorchester

관심작가 알림신청
 

취리히 실내 관현악단,Zurich Chamber Orchestra / ZKO

실내악Amarcord

관심작가 알림신청
 

아마르코드 앙상블,Ensemble Amarcord

남성 중창단

Amarcord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매일
2021년 09월 24일
시간/무게/크기
크기확인중
KC인증

음반 속으로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22,300
1 2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