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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제1부 제2부 징구 로마열(熱) 주 해설―뒤틀린 삶의 틈새에 낀 불완전한 인간들 판본 소개 이디스 워튼 연보 |
Edith Wh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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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뒤로 한참 동안 꿈 같은 황홀경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삶이 궁핍할지라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그 무엇이 삶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녀가 소녀였을 적에 엄마가 금색 목걸이를 주었는데, 잠옷 안에 숨겨 뒀다가 어둠 속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살짝 꺼내 봤던 그 금색 목걸이처럼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얻은 것 같아 감정이 북받쳤다.
--- p.71 다음 날 아침, 래미 씨와 그의 아내는 세인트루이스로 향하고 앤 엘리자만 가게에 홀로 남았다. 미스 멜린스와 호킨스 부인과 조니가 뒷방의 장식을 떼고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들렀을 때, 겉으로는 첫 이별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앤 엘리자는 그들의 친절을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 p.88 요즘 들어 그녀는 하느님이 한 개인을 지켜 준다고 더는 믿지 않았다. 만약 돈을 빌리는 대신 어쩔 수 없이 훔쳐야만 한다면, 그 정당성을 심판하는 것은 신이 아닌, 오로지 자기 양심의 잣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돈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실제로 요청하는 순간은 여전히 굴욕적이고 씁쓸했다. 그녀는 미스 멜린스가 자기처럼 상황을 초연하게 봐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미스 멜린스는 매우 친절했지만 친절을 베풀어 주는 대가로 여러 질문을 던질 권한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다. 앤 엘리자는 동생의 비참한 비밀들이 자기 입에서 조금씩 새어 나와 재봉사의 소유물이 되어 가는 것을 바라봤다. --- p.129 신이 요지부동할수록 그의 노여움을 달래려는 인간의 욕망은 커지는 법이다. 오스릭 데인의 첫 모습에 낙담한 회원들은 도리어 작가를 즐겁게 해 주려는 열망이 눈에 띄게 커졌다. 작가가 자기를 초대해 준 회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의무감을 느끼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작가의 태도 때문에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레버렛 부인이 나중에 동생에게 밝혔다시피, 오스릭 데인은 상대방을 쳐다볼 때 상대방이 자기 모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 p.159 친구의 몸이 조그맣게 오그라든 것만 같았다. 마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기라도 하면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처럼 훅하고 흩어져 버릴 것처럼. 그 모습을 보자 슬레이드 부인은 불현듯 질투심이 일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 여자는 그 편지를 붙들고 살아왔다니. 그까짓 잿더미로 변한 기억을 보물처럼 여긴다면, 도대체 그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다는 말인가! --- p.207 |
뉴욕의 오래된 거리, 작은 방에서 함께 사는 앤 엘리자와 에블리나 자매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옷 수선을 해 주고 손바느질한 물건들을 팔아 근근이 살아간다. 궁핍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이어 가던 어느 날, 앤 앨리자는 동생 에블리나의 생일을 맞아 탁상시계를 선물한다. 이 탁상시계를 산 가게의 주인 래미가 자매의 삶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단조로운 일상은 예상치 못한 파고를 만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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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의 중단편 명작 이 책은 이디스 워튼의 중단편 선집으로 「버너 자매」, 「징구」, 「로마열(熱)」이 수록되어 있다. 본 도서의 표제작인 「버너 자매」는 작가의 초기 작품이지만 뒤늦게 세상에 나온 보석 같은 중편 소설이다. 1892년에 「버너 자매」를 완성한 이디스 워튼은 몇몇 잡지사에 작품을 보냈지만 길이가 짧은 데다 연재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작품이 쓰이던 당시 미국 사회는 남북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던 무렵으로, 역사의 발전을 믿는 진보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세계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버너 자매」의 등장인물들은 화려한 도시 뉴욕의 뒷골목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타락과 마약, 불륜 등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에 휘말리고 만다. 더욱이 워튼은 끝내 한 줄기 희망의 빛도 남기지 않은 채 소설을 마친다. 이처럼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염세주의적이기까지 한 이 작품은 결국 24년이 지난 1916년에야 비로소 『징구와 다른 이야기들』에 수록되어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디스 워튼 역시 「버너 자매」처럼 재평가를 받은 작가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거센 파도를 타고 그녀의 작품들이 재발견되면서 저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그동안 남성 작가들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들도 속속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금은 당당히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주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뉴욕의 명문가에서 자란 워튼은 자신이 성장한 도시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고, 상류 사회의 도덕적 타락 같은 부정적 측면을 풍자하는 내용을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가 소설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은 「버너 자매」처럼 사회적 약자를 다룬 것들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세계와 미묘한 심리 변화를 현실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함께 수록된 「징구」와 「로마열(熱)」 또한 걸작 단편들이다. 「징구」에서는 20세기 초 지식인들의 현학적 태도를 꼬집고, 더 나아가 인간의 허식과 위선을 풍자한다. 「로마열(熱)」에서는 사랑과 질투 같은 미묘한 감정의 실타래를 감각적으로 끄집어낸다. 『버너 자매』에 실린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인생의 아이러니와 불완전한 인간 본성,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그리는 이디스 워튼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명작들이다. 여성의 내면세계에 비친 냉혹하고 모순된 삶의 단면 「버너 자매」는 19세기의 시대상과 사회 변화를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엽 다윈이 문학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인간이 유전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자연주의가 퍼졌고, 당시 유럽에 살던 워튼은 이러한 사상을 누구보다 먼저 흡수했다. 이후 그녀의 소설에는 자유 의지보다 결정론을 설득력 있는 세계관으로 받아들이는 자연주의 문학의 전통이 스며들었으며,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던 기존 소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워튼의 작품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끝내 사회·경제적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버너 자매가 대표적이다. 산업화와 함께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널리 퍼진 가운데 자매는 궁핍하고 무료한 일상을 이어 가며, 그 이면의 욕망과 모순이 자신들을 휘감아 흔들어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자매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들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고 아끼는데도 가난에서 궁핍으로, 궁핍에서 결핍으로 점점 하락한다. 게다가 잘못된 결혼은 이들을 더욱 나락으로 몰고 간다. 스스로 선택한 결혼조차 외견과 실재, 겉모습과 참모습 사이의 괴리를 증명하며 혼란에 빠지고 만다. “삶이란 죽음 다음으로 가장 슬픈 것”이라고 했던 워튼의 존재론적 실망과 좌절감이 바로 이 자매의 일상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아울러 그녀들의 생은 자신의 의지로 어찌하지 못하는 일에 자주 맞닥뜨리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버너 자매」가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 「징구」는 인간의 허위를 풍자하는 소설로 「버너 자매」에 비해 밝고 유쾌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이디스 워튼이 심리 묘사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판에도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짤막한 이야기 속에 다채롭게 등장하는 젠체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일견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두 작품에 비해 「로마열(熱)」은 연애 감정을 다루는 좀 더 감성적인 소설로, 워튼의 섬세한 묘사와 필치가 돋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