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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서론 제1부 제2차 삼두정기의 로마 정치 제1장 카이사르의 모살(謀殺)과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1. 카이사르의 모살과 안토니우스의 부상 1) 카이사르의 모살과 안토니우스의 대타협 2) 카이사르의 장례(기원전 44년 3월 20일)와 군중 폭동 2.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입성과 카이사르파의 분열 1) 열여덟 살의 청년 옥타비아누스 2) 안토니우스의 지배권의 동요 3) 무티나 전투와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로마 진군 3. 카이사르의 아들 옥타비아누스 제2장 제2차 삼두정의 형성과 전개 1. 제2차 삼두정의 성립 배경과 주요 내용 2. 삼두 간의 갈등과 협상 1) 브룬디시움 협약(기원전 40년 9월) 2) 타렌툼 협약(기원전 37년 가을) 3. 삼두정의 위기와 붕괴 1) 시칠리아 전쟁 2) 선전전과 악티움 해전 제2부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의 성립과 전개 제1장 원수정의 출범 1. '공화정의 회복' 선언(기원전 27년) 1) 국가의 구원자 2) '공화국의 회복' 선언 2. 원수의 통치 제2장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의 위기와 대응 조치들 1. 아우구스투스의 콘술직 사퇴 배경에 대한 논란 1) '위기론' 2) 수정론과 '무레나 논쟁' 2. 위기의 징후와 증거들(기원전 29~25년) 1) 크라수스 사건과 갈루스 사건 2) 프리무스 재판과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기원전 23년) 3. 아우구스투스의 콘술직 사퇴(기원전 23년) 제3장 원수정의 확립 1. 곡물 위기와 종신콘술의 임페리움 확보 1) 로마 시의 곡물 위기와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부상 2) 종신콘술의 임페리움 확보(기원전 19년) 2. 공동 통치제의 수립과 원로원 숙청 1) 아그리파의 부상과 공동 통치제 2) 제2차 원로원 숙청 3. 아우구스투스 혼인법과 원수정 1) 혼인법의 입법 배경 2) 혼인법의 주요 내용과 의미 제3부 아우구스투스 원수정 아래에서의 로마 정치 제1장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권위의 독점과 승계 1. 대사제직의 장악(기원전 12년) 2. 국부(기원전 2년) 3.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정책: 결혼과 입양, 그리고 공직 특혜 1)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율리아의 결혼(기원전 26년) 2)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재혼: 율리우스 황가의 형성 3)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세 번째 결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가의 탄생 4. 원수정의 계승과 황가 형성 제2장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 1. 아우구스투스의 키레네 고시(告示)들(기원전 7~5년) 2. 부당취득재산반환청구에 관한 칼비시우스의 원로원 의결(기원전 4년) 283 1) 속주민의 고소권 인정 2) 재판 기간의 단축 제3장 아우구스투스와 민회 1. '회복된 공화정' 아래에서의 민회 2. 「헤바 서판」과 '발레리우스 코르넬리우스법'에 나타난 민회의 모습 결론 참고문헌 수록 논문 출처 찾아보기 |
金悳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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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체제의 근간인 원로원과 민회를 무력화시키고 1인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다
아우구스투수의 정치력은 원수정의 출범 당시부터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권력투쟁을 외부세계, 즉 동부 이집트제국의 위협에 대한 로마와 이탈리아의 수호 전쟁으로 선전하면서 로마인들을 통합시켰고, 자신을 구국의 영웅으로 선전했고, 그에게 준 각종 명예를 1인지배체제를 만드는 데 최대한 활용했다. 또한 그는 양부(養父)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하면서 원로원과 귀족들을 최대한 자신이 구상한 신체제에 동참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정치력이 위기에 빠졌을 때인 기원전 23년에도 콘술직을 사퇴하면서도 새로운 정치제도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특히나 기원전 22년에 몰아닥친 곡물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함으로써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대해져갔다. 결국 기원전 18년 제2차 원로원 숙청을 단행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체제는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그는 원로원 신분을 다시 특권신분화하면서도 원로원 체제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둠으로써 원수정 체제의 영속화를 기했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모살 이후 원수정 체제의 확립 때까지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원로원과 로마 인민, 즉 민회가 재편됨으로써 성립한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이며, 1인지배체제였음이 분명하다. 동양(왕정에서 제정으로)과는 다른 제국으로의 이행(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런 역사적 사실이 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가? 사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물론 우리의 현재 국력이 제국의 단계에 이른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21세기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과 사고 안에는 이미 제국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들이 눈에 띄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힘을 겨루는 나라들이 결코 소국이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세계열강이다. 이제 우리도 제국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 주변의 열강이 취하는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본질을 꿰뚫어 볼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 중국의 역사를 통해 황제의 통치와 제국의 역사를 엿보는 기회는 많이 가졌다. 하지만 서양 역사에서 황제와 제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예를 들면 중국의 (황)제정과 로마의 (황)제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우선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제정은 왕정에서 제정으로 발전되었지만,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정치 투쟁의 성격과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동양의 왕권 내지는 황제권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공화정과의 긴장 관계에서 성립한 로마제국의 성격에 대한 해명이 이 책을 출판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다. 세계지배, 즉 제국의 통치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 최초의 사례, 아우구스투스 그런데 국가의 힘도 성장 단계에 따라 그 조직의 성격과 체제를 달리한다. 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단계에서 국가의 권력이 조직화하는 모습과 국가를 다스리는 방식, 그리고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국가의 권력이 체계화되는 과정과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정치가가 바로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