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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 / 07 나팔과 잣대가 있는 풍경 / 35 그리운 시냇가 / 61 쥐라기의 사계 / 95 아름다운 난동 / 121 아니? 왜? 천진암 / 147 중편 첫사랑 / 177 작가의 말 / 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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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 초등학교.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이 쓴 소설책에 10억짜리 수표를 끼워 등기로 보냈다. 주소와 발신인은 적당하게 썼다. 시골에서의 아련한 추억과 큰 차별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준 데 대한 감사다. 교장 선생님께, 유용하게 사용하십시오. 컴퓨터 구입, 급식은 나라에서 잘할 것이고, 어디에 쓸까 고민해서 사용하십시오. 제 머리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끼리 분빠이해서 따까마시하지는 마시고. 그렇게 한다 해도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저는 11회 졸업생입니다.
2는 중고등학교. 역시 소설책에 오억짜리 수표를 끼워 보냈다. 교장 선생님께, 등록금 오천 원을 못 내서 교실에서 쫓겨난 적 있습니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조치였겠지요. 나를 쫓아낸 선생님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유용하게 사용하십시오. 선생님들끼리 분빠이하지 마시고. 저는 2회 졸업생입니다. 3은 대학교. 5만 원권으로 현찰 3억과 소설책 한 권을 택배로 보냈다. 총장님, 학교 발전기금입니다. 장학금 한 번 받지 못한 우울한 문학 지망생에게 장학금으로 쓰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중에서 자정이 넘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명감 앞에 고스란히 놓여있을 뿐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피로감은 표적이 불분명할 때 더욱 가중되는 것인지 전신이 욱신거렸다. 짜증을 은폐해야된다는 강요에 전신이 옥죄듯이 쑤셨다. 무료가 깊어지는가 싶었는데, 걸걸한 목소리를 앞세운 사내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충성! 수고하십니다아! 민중의 지팡이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그들은 대뜸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자욱한 연기 속에 가라앉아 있던 군상들이 눈을 멀뚱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또 무슨 물건인가하고 가죽잠바들의 눈빛에 짜증이 자욱했다. 훤칠한 키에 정장 차림의 사내가 반팔셔츠를 입은 사내를 껴안듯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부축을 받아야 할 쪽은 정장 차림의 사내 같은데 오히려 그가 반팔셔츠 사내를 휘감고 있었다. 정장 사내한테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상석에 앉은 대머리 가죽잠바 앞으로 비틀거리며 함께 걸어갔다. ---「나팔과 잣대가 있는 풍경」중에서 삼십대 후반이란 우리의 나이는 금방 분위기에 친숙해질 수 있는 경륜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 역시 우리 또래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스스럼없다는 것은 모질게 말하면 뻔뻔스러움이겠지만 한편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막힘이 없다는 건 어쩌면 그토록 갈구하는 깨달음의 한 모습일 것이다. 새로운 신도에게 김 교수는 그 특유의 현학적 어휘를 휘두르며 장광설을 펼쳤다. 여인은 조금씩 발그레해지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기도 했다. 치열이 고른 하얀 이를 반쯤 보이게 웃는 웃음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있을까. 그녀의 부신 얼굴을 바라보며 저마다 온갖 추측들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운 시냇가」중에서 요한, 그때 김호영이 자꾸 허황된 얘기를 해대던 것이 생각나지. 자신이 긁적인 이상한 지도를 펴놓고 환상의 섬이니 부동항이니 하면서 암호 같은 말들을 지껄일 때 이미 그의 뿌리는 습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가 그에게 다가갔던 사랑의 방식이 참으로 부정직했다는 것을 몰랐다. 치기와 너스레로 그를 감싸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잘못 알았다. 길이가 짧은 한쪽 다리를 받쳐주는 것이 우리들의 호방함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엉뚱한 곳으로 그를 끌고 갔던 것은 아닐까. 편견 없이 대한다는 거창한 명분에 우리 스스로 취해서 그의 아픔을 외면하고 우리끼리 자기만족에 희희덕거린 것은 아니었을까. 탈출을 꿈꾸면서도 탈출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함량이다. 그리고 명백한 명분도 없이 탈출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변명이 함정이다. 명백한 명분이야 독립운동이나 반정부운동이 확실하지. 그러나 우리 모두가 혁명가나 투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것 또한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함정은 어떤 것이든 고통이다. 글쎄 함정 속의 고통을 즐기는 족속이 있을까. 개미귀신이 파놓은 함정을 기어오르는 개미의 안간힘을 본능적 유희라고 할 수 있을까. 김호영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뒤척였던 몸짓을 자족, 자학의 유희라고 할 수 있을까. ---「쥐라기의 사계」중에서 그들의 강학은 계속 이어졌다. 계절이 바뀌고 드나드는 선비들이 바뀌었지만 강학의 모습은 한결 같았다. 주지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비들은 우리 집에 찾아든 갈 곳 없는 새들이다. 언젠가는 떠나갈 새들이다. 부처님 봉양하듯 불편하지 않게 잘 받들어라. 선비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 지 관심두지 마라. 누가 오는지 누가 가는지도 관심 두지마라. 그건 남의 집 곳간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고 몰래 훔쳐보는 짓이다.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라는 주자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하심을 잃으면 모든 수행은 헛것이다.” 공양을 준비하는 스님들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던 선비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발우 닦듯 그릇을 깨끗이 닦고, 경내에서 스님을 만나면 하대하듯 뒷짐을 지던 선비들이 스님들과 합장례를 나누었다. 스님과 선비들이 어울려 근처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기도 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만 생활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스님들의 철야정진, 삼천 배 올리기, 묵언수행은 선비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이었다. 선비들이 잠을 쫓으며 밤새워 소곤거리는 토론은 스님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공부와 수행이 다르지 않구나. 불이법문이 그들에게 눅눅하게 스며들었다. ---「아니 왜? 천친암」중에서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고 자기야말로 자신이 의지할 곳,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쇠에서 생긴 녹이 쇠를 먹어 들어가듯 자신의 허물 때문에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는 것이리라. 이제 내가 혹은 그대가 해야 될 일은 정복한 나라를 버린 왕처럼, 숲속을 다니는 코끼리처럼 홀로 가는 것입니다.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 내어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릅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반쯤 채운 항아리가 아니라 가득 찬 연못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일이 있다면 우리의 가슴에 담긴 사랑을 흠집 없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꽃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식탁 위에서 발견한 그녀가 남기고 간 언어를 나는 꽃씨 받듯 한 알 한 알 가슴에 받으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좁은 도랑을 오르내리며 미꾸라지 모양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누구를 위하여 경적을 울리나. 서로를 튼튼히 얽어매기에는 너무 가늘어 보이는 전신주에 걸려있는 난잡한 줄들, 그 풍경 위로 희미하게 광활한 밀림이 환시처럼 오버랩 된다. 날랜 말을 타고 날선 검을 휘두르며 달려야할 원시림으로. ---「첫사랑」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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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우상 작가의 신작 소설집으로 여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 소설을 싣고 있다. 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는 소설 정형의 진수를 보여주면서도 특유의 재치있고 활달한 화술과 유희적인 문법으로 기존의 엄숙한 통념을 보기 좋게 박살내고 있다.
표제작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는 로또 복권 1등, 역대 최고금액 888억 당첨자 소설가 구보 씨를 상상하는 작품으로 얼핏 엉뚱해 보이지만 현실 세태를 풍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시치미 뚝 떼고 소설가의 자기 반영적인 메시지와 심적 구조를 로또 당첨금 사용처로 응축해 표현하는 상징은 자본주의 본질을 돋보이게 서술하는 장치로 나타나고 있어 상당함 설득력을 내포하고 있다. 「나팔과 잣대가 있는 풍경」은 술값을 지불하지 못해 경찰서에 잡혀 있는 동생 보호자로 하룻밤을 보낸 화자가 보아내는 삶의 궁핍과 고독 그리고 함께 뒹굴면서 감추기 힘든 우리들의 치부를 누설하는 시선이 사뭇 날카롭다. 현실을 포착하는 작가의 특정한 인식 구조가 경찰서 하룻밤이라는 공간에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운 시냇가」는 법주사 경내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교수, 시인, 소설가들이 몰래 빠져나와 술집에 모여앉아 술을 마시다가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과정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 역시 일탈적 방식에 나타나는 작가의 인식적 통찰의 세계를 실연하는 작품으로, 우연성과 인간의 개체적 욕망이 혼란스럽게 어울리고 뒤섞이게 만들어 소설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쥐라기의 사계」는 먼저 죽은 친구, 몸이 불편했던 천재 김호영을 추억하는 소설로 ‘기억’의 공간 속에서 비애를 가득 안은 지극히 평범하고 고독한 사적 개인의 평범하지 않은 내밀한 고백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난동」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기로 결심한 화자가, 죽기로 결심한 여인과 그런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혼내는 스님을 망월암에서 만나는 이야기로 소설들이 그렇듯이 표면의 이면에 그 표면을 생산하는 관념적 의미체계를 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삶이라는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왜? 천친암」은 멀리 정약용의 시대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공간을 배경으로 곳곳에 유머와 반어조로 서술하는 문장이 작품을 단숨에 읽히게 한다. 또한 삶의 현실이라는 현상 아래에 종교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작가 특유의 폭넓은 보폭과 질감으로 표현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중편 「첫사랑」은 시대의 공간과 배경의 풍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기발한 언어유희와 함께 화자와 그의 첫사랑 여인의 삶의 비애와 고통이 발산하는 정서적 감응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이우상의 작가의 신작 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의 화자들은 대부분 일대일 대응 관계에의 어떤 고정적인 의미를 표상하지 않는다. 모두가 일상의 한가운데에 상식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엉뚱한 면면으로 끼어들어, 그와 결부된 개인 사연의 서술과 판단을 낯설게 묘사하고 있다. 이 방법은 인생의 고정된 의미를 사양하고 삶의 양상이 일탈해 비껴나가면서 소설을 유희적으로 읽히게 만든다. 능청스러운 유희적 상황 설정과 언어의 진술을 통해 일상의 열악한 조건을 새로운 가치 발견의 토대로 슬그머니 역전시키는 솜씨로 소설의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깊은 사유와 철학을 동반하는 작가의 내러티브는 삶의 중요한 핵심 국면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가치체계나 이데올르기를 통쾌하게 비웃으며 뒤집어 버리는 반전의 묘미와 기발한 풍자로 소설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나름의 지극히 상식적인 세상의 가치를 새삼 새로운 시선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이우상 작가의 개인적 능력이고,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는 그 능력의 뛰어난 산물이다. 작가의 말 향기 없는 꽃이라도 피워보겠다는 저열한 욕망의 산물, 존재의 이유를 위해 긁적거린 허기진 벽보, 거짓 치열로 지순한 치열을 농락한 비루한 지갑, 이 책의 본색이다. 본색을 밝히니 편하다. 편함 속에 묻혀있는 우울, 자조, 후회는 오로지 내몫이다. 애정어린 격려를 기대하는 비열함도 본색의 일부다. 비열한 본색이 우아한 위선보다는 낫다. 구보 씨의 꿈이 나에게 덜컥,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매주 벌어지는 기적의 방망이춤에 나도 꽝 얻어맞고 싶다. 살면서 남에게 모진 짓 한 적 없으니 자격은 된다. 완벽한 설계도를 그려놓았으니 당황할 일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