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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동물해방인가, 동물권리인가, 동물관계인가? 밍크는 해방되었을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동물해방론 동물도 시민이다-동물권리론 동물은 감염시키고 빵을 나누는 소중한 타자다-동물관계론 2장 쥐 이야기 쥐의 특이한 위치 하멜른의 쥐잡이 사나이 쥐는 박멸되지 않는다 동물-되기 혹은 쥐-함께-되기 쥐와 인간의 평등한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 3장 동물, 정체성에서 행위성으로 동물의 시선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시선의 얽힘 동물은 우리를 (새로운)인간으로 만든다: 언어 없이 대화하기, 주의를 기울이기 야생에서 재야생화로 나가며 환대에서 공생으로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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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물과 인간의 사랑을 지향한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을 오해하지 말기로 하자. 여기서 사랑은 서로에 대한 동일시나 열정, 낭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한때 귀여운 강아지를 사랑했던 사람이 그 강아지를 유기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귀여운 강아지를 사랑한 것이지 강아지라는 구체적 동물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또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취향이나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또한 사랑은 인간인 나와 대상인 동물을 동일시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다. 동일시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됨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됨은 대상을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기 쉽기 때문에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자주 파괴하곤 한다. 하나됨에 빠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사랑일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랑이란 동물 타자에 대한 지속적인 긍정의 관계를 말한다. 사랑하는 동물이 인간종과 다른 타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 타자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한다. 타자에 대한 앎은 나의 편협할 수 있는 자아를 찢으며 나의 정체성을 확장하거나 바꾼다. 그렇게 동물과 인간은 서로를 현실적으로 긍정하면서 둘이 함께하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들어가며」중에서 닭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서열을 이루는데, 서로를 쪼는 방식으로 싸워 서열을 결정한다. 닭 무리가 90마리에 이르러도 안정된 서열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닭이 자신의 서열을 알고 있으며 무리 구성원을 개별적으로 식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공장식 농장에서 닭의 부리는 잘리고 만다. 나쁜 환경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유발되는 공격 행위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부리를 자르는 행위는 닭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힌다. 부리를 자르는 뜨거운 칼날 때문에 입 안에 물집이 생기고 아래턱이 부풀어 오르기도 하는데, 닿기만 해도 통증이 무척 심하다. 부리 자르기로 인해 닭들은 육체적·사회적 고통을 겪는다. 각자의 닭장에 갇혀 있으니 사회적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싱어는 묻는다.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닭이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적절한가? 인간이 육식을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인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동물해방론」중에서 동물과 인간은 거리가 멀건 가깝건 간에 공동의 역사를 만들고 지구적 공동 문화를 구축해왔으며, 동시에 각자의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고양이 요다와 함께 우리 집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에게 자유를 원하느냐고 묻는 것은 올바른 질문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묻는 것에 가깝다. 실패와 성공이 오가는 소통을 통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의존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얽힌 역사를 기억하며, 동물 아기가 아닌 동물 그 자체로 존중하고, 고통의 경감이 아니라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에서 동물과 인간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동물은 감염시키고 빵을 나누는 소중한 타자다-동물관계론」중에서 동물 문제는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보다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탐색될 수 있다. 가령 에콰도르 아마존강 상류 유역의 루나족runa은 재규어와 가깝게 살고 있는데, 이 부족에는 숲에서 엎드려 자지 말라는 말이 있다. 재규어는 엎드려 자는 인간을 ‘그것’, ‘먹잇감’, ‘죽은 고기’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나족의 금언은 재규어를 인간을 마주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인간 동물의 존재를 능동적으로 인정한다. 언제나 재규어와 맞닥뜨릴 수 있는 숲에서 살아가는 루나족은 자신을 ‘루나 푸마runa puma’로 보기도 한다. 루나 푸마란 ‘재규어-인간’, 즉 재규어로 변신할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루나 푸마는 인간이면서도 포식자다. 재규어에게도 인간처럼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위치는 달라진다. 재규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은 재규어와 인간이 특정한 관계 속에 있을 때 내놓을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이 관계를 잘 맺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앎이다. 그 앎이 관계를 두껍고 촘촘하게 한다. ---「쥐의 특이한 위치」중에서 동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복잡하고 중요한 이슈와 결합된다. 동물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고유성, 인간의 특권, 인간의 본질, 인간의 윤리·정치·법에 새로운 의미를 기입하고,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것을 사유할 때 인간의 특권과 고유성은 재기입될 수 있고, 동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사유할 때 정치와 법의 영역은 확장된다. 21세기가 제기하는 동물의 의미는 인간의 영역을 해체하고 재구축한다. 우리는 동물이란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인간과 동물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동물이 타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물을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없으며, 그들의 정체성 역시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다. 동물은 관계성 속에서 보다 자신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동물은 어떤 시선의 관계 속에 있을까? ---「동물의 시선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시선의 얽힘」중에서 그것은 동물을 열렬하게 사랑하자는 얘기와 조금 다른 말이다. 인간의 윤리적 공감력을 높이자는 뜻도 아니다. 사랑과 공감이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위험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나와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선들을 파악하는 일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의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한다. 우리는 인간성의 개념을 다시 설정할 때가 되었다. 동물을 배려하고 잘 관리하는 것은 휴머니티가 아니다. 인간은 가이아에서 동물과 연결된 생명체이자 그들과 신경 체계가 조금 다른 존재일 뿐이다. 동물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살고 죽어갈 것인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동물은 우리를 (새로운)인간으로 만든다: 언어 없이 대화하기, 주의를 기울이기」중에서 하지만 공생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동물과의 공생 관계를 복잡하게 사유하고, 복잡성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자체가 다규모적·다층적이며 얽혀 있기 때문이다. 공생은 존재론적으로 평평한 관계를 인정할 수 있지만, 상황적으로는 차이와 불평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동물과 함께-되기를 실천할 때 차이와 불평등을 탈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종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언어차별 등 다양한 차별을 안고 있다. 여성은 오랫동안 ‘자연’이나 ‘동물’로 비유되어왔다.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여성과 비좁은 스톨에 갇혀 새끼를 분만하고 젖을 먹이는 어미 돼지는 종을 가로지르는 교차적 지점에 있다. 여기에는 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되어 차별을 증폭시킨다. 동물에 대한 종차별이 동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불평등과 교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동물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은 인간과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나가며 환대에서 공생으로」중에서 |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 방식을 의심하다
-동물 보호와 동물 해방은 동물을 위한 일인가 1998년 영국, 동물권 활동 단체인 ‘동물해방전선’은 밍크 농장에 침입하여 비좁은 케이지에 갇혀 있던 6,000마리의 밍크를 ‘해방’시킨다. 그들은 인간과 동물의 권리는 동등하므로 밍크의 털을 얻기 위해 밍크를 사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해방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밍크는 야생 숲에 적응하지 못해 일찍 죽거나 마을로 내려와 아이와 반려동물을 위협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해방’된 밍크는 드넓은 숲에서 갑자기 내던져져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이때의 ‘해방’은 밍크의 입장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해방’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성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에도 전제되어 있다. 싱어는 동물이 쾌감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쾌고감수능력’을 지닌 존재이며, 인간이 동물의 이익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종차별주의’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미각은 동물의 목숨에 비하면 사소한 이익이며 동물실험으로부터 얻은 유용성은 분명히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공리주의적 논리를 펼친다. 또한 동물과 인간의 평등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물과 지적 장애가 있는 성인이나 어린아이를 비교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성과 한계를 드러낸다. 동물의 내재적 권리를 인정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톰 레건의 《동물권 옹호론》이나 동물을 인간과 동일한 사회적 구성원 혹은 대등한 거주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윌 킴리카의 동물정치론 역시 차별받아온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인권의 확장 방식과 유사하게 인간이 동물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인간중심성을 전제하고 있다. 저자는 두 이론 모두 동물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급진적 논의이지만, 윤리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사회에 동물을 편입시키는 방식이지 인간과 함께 지구생활자로 살아온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개를 ‘소중한 타자’이자 ‘반려종’이라고 선언한 해러웨이의 동물관계론에 집중한다. 인간은 동물을 보호하거나 해방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공생의 역사를 써온 ‘반려종’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개를 인간사회로 데려왔으므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동물정치론과 달리, 동물관계론에서는 개와 인간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조우해 함께 공생의 역사를 써온 공생 관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동물에게 자유와 권리가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 알아가며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권리를 부여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에 대한 앎은 곧 사랑의 가능성이다 -동물을 마주하고 응답하는 새로운 인간성을 꿈꾸다 저자는 벌거벗은 채로 고양이를 마주해 수치심을 느낀 데리다를 비롯해, 동물을 ‘마주할’ 수 있는 철학이 부재해온 현실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수치심을 느끼며 고양이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능동성을 지닌 존재로서 ‘타자’인 자신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고양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고양이의 시선이란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레비나스 역시 동물을 자신의 타자 윤리 체계의 바깥에 두었고 하이데거는 동물이 인간적인 것을 결여한 채로 세계 빈곤 속에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동물의 시선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기에 동물과 인간이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동물과 마주하고, 서로 권리를 부여하고, 공생의 관계를 구축하려면 먼저 동물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학자이자 자폐인인 템플 그랜딘은 동물 연구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이루었는데, 그는 자신(자폐인)이 동물과 유사하게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의 몸을 압박하는 보정틀에서 소가 안정을 찾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맞는 압박기를 구상해 고양이를 끌어안는 법을 배운다. 그는 소를 이해하기 위해 소처럼 눕고 소처럼 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랜딘은 동물의 삶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언어 없이도 동물과 대화를 해나간다. 동물의 사고방식과 감정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동물이 된다. 저자는 바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동물을 알아가는 핵심이라고 본다. 우리가 동물이라는 존재에 주의를 기울일 때, 식탁의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수족관의 돌고래는 과연 행복한지 함께 사는 반려동물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언어 없이도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주변의 동물에서 시작해 인간과 공생해온 동물 전체로 확장되어, 인간과 한 번도 분리된 적 없었던 공생자 동물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동물을 배려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고 죽을 것인지에 응답하는 것이며,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인간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