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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의 방법들 | 전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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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의 명령은 비동시, 과대면, 비인간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시간을 엇갈리게 하거나, 신체 없이 얼굴만 확대하여 모니터 위로 옮겨놓거나, 마주 볼 상대방을 아예 없애버린다. 이러한 세 가지 비대면의 양식에서는 대면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인간을 처리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전치형, 주제 에세이 「비대면의 방법들」 --- p. 9 몇 분 지나지 않아 C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는다. 도우미가…… 그전과 다른 사람이다. 지나간 영상 두 달 치를 모두 재생해본다. 단 한 번 면접을 보았을 뿐인 도우미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까지 왔던 사람은 전형적인 짧은 펌의 장년長年 여성이었는데, 오늘 영상에는 긴 생머리를 묶은 중년 여성이 나온다. 어쩌면 C보다 적은 나이일지도 모르는 얼굴이다.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 p. 53 내가 그때보다 딱히 나아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의 장소에서 그때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그때로부터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나를 보여주기가 싫었어. 변한 게 뭐가 있지. 도대체.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이라는 것이 가능한 단어인지도 모르겠어. 그냥. 응 그냥 그리고요? 있지 슬슬 잠이 와. 또? 그만 자. 아직 이야기 중인데. 알아요. 그런데 있지. 이상우, 「졸려요 자기」 --- p. 81 제가 전화를 건 이유는요. 오늘 저는 죽을 예정인데요. 상담원님은 이런 전화 많이 받아보셨을 테니까 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 좀 해주세요. 제 말을 들어보시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제 삶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살게요. (……) 보호종료가 되면 이제부터 나는 내가 보호해야 해요. 그런데 나는 나를 보호할 능력이 없고 경험도 없었어요. 정용준, 「일요일 아침」 --- pp. 106-107 |
점점 더 뉴스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면 속 이야기일 뿐, 나와는 관계없는 일인 줄로만 알았던 뉴스 속 사건들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무엇보다, 감당할 수 없는 이 뉴스들은 쌓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휘발되어버립니다. 뉴스 속 일들보다 당장 눈앞의 일상이 더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 일상을 살아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함께 고민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나아가는 것 역시 우리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읽고 씁니다.
언어와 기록을 통하면, 특히 이야기의 형식을 통과하면 그 안에는 크고 강한 힘이 생깁니다. 금세 휘발되어버리는 뉴스와 달리 창작자의 깊은 고민을 거쳐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태어난 이야기들은 읽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가 닿아 오래 살아남습니다. 한순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말들과는 전혀 다른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직접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공감의 힘일 것입니다. 추상적인 논증은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일러줄 수 있지만,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핵심을 보여줍니다. 2022년 12월을 시작으로, 계간으로 발행되는 『긋닛』은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와, 거기에 분명히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하는 세계를 연결해 보입니다. 『긋닛』은 우리 시대에 간과할 수 없는 특정한 주제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편의 주제 에세이와 세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긋닛’은 단속斷續의 옛말입니다. 끊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멈추어 섭니다. 전력질주를 하다가, 느리게 걷다가, 다시 속도를 내었다가, 어느 순간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맙니다. 멈칫거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멈춘 그 자리에서 내딛는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긋닛』 1호의 주제는 ‘비대면’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촉발된 비대면을 통해 생겨난 새로운 풍경들은 다시 다양한 현상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주제 에세이와 함께 각기 다른 개성의 세 단편은 읽는이를 수시로 멈칫거리게 하면서도 손에서 책장을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