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작가의 말 4
언터처블 내 인생 11 아화 37 부스 69 급발진 113 감은사 137 죽을 먹는 사람 159 카드섹션 183 변기에 손을 담근 날 213 해설 : 운명은 어떻게 극복되는가(박덕규) 234 |
김동혁의 다른 상품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흔한 번째 생일날 밤, 나는 템스 강변의 회전 관람차 ‘런던 아이(London Eye)’ 안에서 한 인도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 한 시간 사십 분을 기다린 끝에 탑승한 관람차에서 혼자인 사람은 그녀와 나뿐이었다. 객차를 가득 채운 스무 명 남짓한 가족과 연인들의 무리 틈에 그녀와 나는 나란히 서 있었고, 그녀는 유리창 난간을 꼭 잡은 채 강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템스 강변에서 쏘아올리는 불꽃이 그녀의 까만 얼굴에서 반들댔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이국 여자의 얼굴을 훔쳐본 이유는 사실 그녀가 부르고 있는 노래 때문이었다. 한 바퀴를 돌아내려오는 데 삼십 분 정도 걸리는 런던 아이 안에서 그녀는 탑승한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한국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노랫소리는 허밍을 하듯 아주 작았지만 우리는 어깨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노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1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2017년 4월, 런던의 템스 강변에서 이국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고 있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관람차가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내 앞에 서서 하차를 기다렸다. 어느 새 눈물은 그쳐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괜찮으냐고 영어로 물었다. 그녀는 검고 큰 눈을 껌벅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던 순간 문득 ‘오늘이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을 상기했고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언터처블 내 인생」중에서 “김유민씨 전화인가요? 여기 아화, 그러니까…, 오봉다실(五峰茶室)인데요, 마담 언니, 그러니까…, 최정숙씨가 오늘 돌아가셨어요. 일이 생기면 언니가 이쪽으로 기별을 넣으라고 해서.” 어젯밤 최마담의 부고를 전한 것은 그녀의 다방에서 일하던 레지였다. “최정숙씨가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네.” “빈소를 어디에 차렸나요?” 내가 물었다. “아화, 그러니까…, 오봉다실이요, 마땅히 차릴 곳이 없어 동네 사람들이 여기다가 마련을 했네요.” ---「아화(阿火)」중에서 어서 옵쇼. 얼마 넣을까요, 사장님? 만땅? 아이고, 감사합니다. 만땅, 주유하겠습니다. 예, 사장님! 아, 지금 리터당 1,319원입니다. 이번 주에 또 오른다는 소리도 있기는 한데…, 토요일쯤 돼봐야 알 수 있죠. 네, 맞습니다. 저희도 가격이 내려야 손님이 많은데 여기 사장님도 죽을 맛이랍니다. 기름이란 게 많이 올려서 팔다가 조금 내리고는 생색내는 물건이라….아! 조삼모사! 맞습니다, 사장님. 우리 사장님 유식하시네. 하하. 그래도 차를 안 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 생수요? 당연히 드려야죠. 따끈하게 데워놓은 캔커피도 있는데…, 아이고 사장님, 한번 주유에 한 개씩, 다 아시면서? 마감할 때 사은품 개수랑 영수증 다 맞춰봅니다. 모자라면 우리가 떼먹었다고 욕먹습니다. 티슈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네네. 아, 물티슈는 겨울에는 준비 안 해둡니다. 그냥 포켓티슈. 갑티슈요? 갑티슈는 비싸지 않습니까? 갑티슈를 사은품으로 하면 아주머니들 오셔서 한번에 싹 쓸어가십니다. 경기가 하도 안 좋다 보니, 그렇게라도 살림장만 하는 거죠, 뭐. 네네. ---「부스」중에서 |
|
이 소설의 표제작이자 김동혁의 등단 소설인 「언터처블 내 인생」은 실제 ‘언터처블’인 인도 여인을 내세워 그 닮은꼴의 운명인 ‘대머리’ 사내 ‘나’가 자신에게 덮씌워진 ‘언터처블’ 운명에서 스스로 ‘안녕 언터처블!’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이 소설은 인간은 모두 나름의 운명을 타고 났으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론 또는 운명결정론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데, 이는 얼마간 2020년대의 시대적 흐름에서는 다소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운명론적 세계관이라고 할까 하는 이런 주제는 문학 전통에서 매우 유서 깊고 근원적이라 할 만하다. ‘신탁(oracle, 神託)’이라는 이름 아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한 왕이 끝내 운명의 회로에 휩싸여버린 ‘오이디푸스 신화’가 그러하고, 타고난 운명에 대결하다 패배한 인물을 담은 김동리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하다.
근대소설은 당대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그 삶에서 실패한 캐릭터로 구조화하는 장르인바 이것에 운명론이 투영되면 그 상황과 인물은 보다 더 본질적인 관계와 연루될 수밖에 없다. 김동혁의 소설이 바로 그렇다. 그 인물들은 현실의 삶은 물론이고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인물 자신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것으로 설정돼 있다. 「언터처블 내 인생」에서 ‘대머리’와 ‘불가촉천민’이라는 운명적 인물들, 「아화」에서 모성의 부재와 결핍에서 성장하면서 심각한 내적 갈등에 시달려온 주인공 등이 작가가 가진 운명론적 세계관의 산물임을 확인했다. 이에 비해 「감은사」는 ‘감은사 터’와 ‘수몰지구’ 등 역사 속에서 실종된 지역을 복원해 내면서 우리가 사는 지금의 상황이 오래 진행된 그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는 일종의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좀 더 가까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폭넓게는 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현재의 ‘나’가 놓인 것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들에 비해 「부스」나 「급발진」의 시공간적 배경은 운명이나 역사라는 차원에서는 보다 현실 문제에 치중해 배치된다. 한편, 김동혁의 소설은 작중의 배경으로 대구, 영천, 경주라는 실제 지역공간을 다룬다는 점도 특별하다. 주요 인물들이 이 지명과 관련한 지역에서 살았거나 해서 그곳을 찾아가거나 다녀가는 행로를 드러낸다. 가령, 「아화」는 제목 그 자체가 경주시에 속하는 ‘아화’라는 지명을 뜻하며 실제 무대는 ‘경주시 아화면 건천리’가 된다. 아화는 경주 외곽의 면단위 마을로 기차역도 남아 있다. 「감은사」 역시 경주의 유적지로 최근 들어 복원을 통해 옛 모습의 일단을 가늠할 수 있는 장소다. 작중 ‘나’의 어머니가 투병 중인 곳은 옛 친정집을 수몰해 완공한 영천댐 근처의 요양원을 설정돼 있는바, 이중 영천댐은 역시 실재하는 공간이다. 이 두 편에 등장하는 경주박물관은 한국 대표 박물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밖에 지명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터처블 내 인생」의 국내 공간은 대구, 「부스」 역시 대구 인근, 「급발진」은 경주 아래 울산쯤으로 이해된다. 김동혁의 소설은 이처럼, ‘나’와 더불어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 눈앞에 있으나 그것은 역사로부터, 현실의 조건으로부터 운명처럼 엮인 존재로서 각자의 지역에 튼튼히 뿌리내려 살아 있는 실체가 됨을 알려준다. 전문가의 말 근대소설은 당대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그 삶에서 실패한 캐릭터로 구조화하는 장르인바 이것에 운명론이 투영되면 그 상황과 인물은 보다 더 본질적인 관계와 연루될 수밖에 없다. 김동혁의 소설이 바로 그렇다. 그 인물들은 현실의 삶은 물론이고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인물 자신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것으로 설정돼 있다. 이 소설의 표제작이자 김동혁의 등단 소설인 「언터처블 내 인생」은 실제 ‘언터처블’인 인도 여인을 내세워 그 닮은꼴의 운명인 ‘대머리’ 사내 ‘나’가 자신에게 덮씌워진 ‘언터처블’ 운명에서 스스로 ‘안녕 언터처블!’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 작중의 배경으로 대구, 영천, 경주라는 실제 지역공간을 다룬다는 점도 특별하다. -박덕규(소설가, 문학평론가)의 해설 「운명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작가의 말 고도의 변두리를 찾아가 묵묵히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후 꽤나 긴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소설들을 이제야 한 곳에 모아 첫 소설집을 묶었다. 여기에 수록된 소설들 중 거의 절반은 발표한 지 육칠년을 훨씬 넘긴 것들이다. 소설집을 출간하기로 결심하고 출판사에서 교정본으로 보내온 원고를 다시 읽으며 나는 ‘그 시절’ 생각에 빠지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자신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했고, 또 내 삶이 초라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되도록 나를 둘러싼 일상적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서글픈 단상에 집중하려는 자장(磁場)을 벼려두고 있었고, 고도(故都)의 변두리를 자주 찾아가 묵묵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내게 소설을 남겨주었다. 부족한 능력이었지만 만성질환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챙기는 약처럼 꼬박꼬박 나는 소설을 썼다. 그때의 나는 소설 때문에 힘들었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출근길에 맞춰 소설을 쓰려고 나서는 아침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무언가 지정된 일을 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퇴근길에 맞춰 하루치의 원고를 다 쓰고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밤의 공기는 상쾌했다. 나는 소설 덕분에 저녁이 즐거운 호사스러운 한 세상을 보낸 것이다. 앞으로도 삶과 창작은 그리 녹록치 않겠지만 나는 소설을 계속 쓸 작정이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하겠다. 여전히 나는 소설과 여러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먼저 사반세기의 시간 동안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시고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박덕규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 가족들은 친가, 처가 할 것 없이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변에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조금만 길을 나서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따스하고 든든한 일인지 자주 깨닫습니다. 큰 병환을 이겨낸 빙모 김명혜 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푸근하고 인자한 미소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자식들을 그늘 아래 두고 있어 아직도 큰살림을 살아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늘 죄송스럽지만, 덕분에 지금의 나와 내 식솔의 삶이 평온하다는 것을 늘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2023년 2월 김동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