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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arie Schae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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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 고하는 작별』이 작별을 고하고자 하는 미학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내재하는 활동들의 총체로서의 예술 장르들을 다루는 대신, 이 활동들을 삶과 대립시키는 미학이다. 그럼으로써 이 미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의) “좋은 삶(Eudaimonia)”을 영위하게 해 주고 세계를 향한 공동 관계를 심화하게 해 주는 예술 장르들의 능력들을 등한시한다. 그것은 “미적”이라 불리는 경험이 세계를 향해 존재함의 특수한 양식임을, 그리고 이 양식이 역사적으로 목도된 모든 문화 내에서 사람들에 의해 인식되고 활용되며,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체험된 삶의 모든 상황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미학적 학설의 탄생 이후 미적 행동에 대한 철학적 연구의 장은 존재론적 이원론의 가장 존엄한(아니면 가장 잘 보존된) 보호 구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학에 고하는 작별은 이 이원론의 특정한 태도에 고하는 작별이기도 하다. 저 건너편에서 철학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척도가 없는 영역이며, 철학이 가장 기초적인 도구들로써 구성하기 시작하는 탐구를 위한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혼란과 막다른 길, 헛된 기대와 기만을 동반할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시도할 미적 관계에 대한 분석과 해설은 당연히 이러한 결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짧디짧은 삶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요구한다. ---「1장 철학과 미학」중에서 필자가 본 장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목격담 중 어떤 것도 (이들은 예술적 대상들, 이 경우 문학 텍스트들이기는 하지만) 예술 작품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선별에 대한 나의 근거는 발견법적(heuristique)이다. 사실, 우리가 “미학적(esthetique)”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대부분 “예술적(artistique)”이라는 단어와 혼용되곤 한다. 미학 이론(theorie esthetique)은 범예술 이론(theorie des arts)으로 환원된다는 발상이 여기에서 나온다. 칸트의 미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헤겔적 재해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테제는 예술적 실천은 물론 미적 행동에 대한 이해에 극도의 해로움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장 미적 행동」중에서 미적 행동 양식의 틀 내에서 미적 판단의 역할에 대한 문제는 그것의 지위와는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후자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도 뜨겁게 이루어졌으며, 거기에서 의견의 불일치가 그토록 격정적인 국면을 맞이했다면, 이는, 철학적 미학의 역사가 그랬듯이, 미의 ―심지어 예술의― 영역의 인문적 가치가 미적 판단의 인식적 지위에 의존했다는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미의 영역의 인문적 가치는 오로지 인지적 풍부함과 미적 주의력 관계의 만족도에 달려 있다. ---「3장 취향 판단」중에서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일반 독자가 미학 저서들을 탐독할 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기존의 수많은 철학적 분석과 지식이 자신의 삶,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미적 경험과 무슨 상관관계를 지니는가를 결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학 저서들이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경험한 내적, 외적 사실들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으며 이것이 나의 어떤 경향을 드러내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혹자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지 않다면 미적 경험은 분석될 필요도, 토론될 필요도 없다. 그저 홀로 향유하면서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더라도 이 경험의 존재 이유, 강도, 지위, 정당성을 저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옮긴이의 해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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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 대하여 작별을 고한다고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과의 영원한 이별, 또는 마지막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미학에 고하는 작별”이란 아주 도전적이고 위험해 보일 수 있는 제목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미학과 작별해야 하는가?” 그렇다. 만약 당신이 생각하는 미학이 “철학적” 미학, 그러니까 여태까지 미학계를 주름잡았던 어떤 특정한 경향성을 지닌 미학이라면 말이다. 셰퍼에 따르면, 이 철학적 미학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내재하는 활동들의 총체로서의 예술 장르들을 다루는 대신, 이 활동들을 삶과 대립시키는 미학”이다. 셰퍼에 따르면, 미학은 삶 속의 체험과 그 체험에서 얻어진 사실들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 유럽에서 시작되어 발전해 온 철학적 미학은 “몇 가지 헛된 기대들”을 낳았다. 그 ‘헛된 기대’란, 철학이 “어떤 미적 이상이나 판단 기준”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미적 경험이 철학적 명제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셰퍼는 “분석적 관점에서 구상된 미적 성찰의 과제는 미적 사실들을 판별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어떤 미적 이상이나 판단 기준들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며, “미적 사실들은 철학적 합리성의 유추된 (그리고 감각된) 예증으로도, 결핍과 비본래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 방식에 대립하는 완결성과 진실성의 역표본으로도, 인간의 초월적 기반이나 개별적 주체성과 인류의 보편성이 조화를 이루며 소통 방식의 개화가 이루어지는 장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처럼 헛된 기대를 품고 있는 철학적 미학과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것과의 이별은 곧 새로운 어떤 만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꿔 말해, 새로운 만남이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이전의 것과 작별해야만 한다. 이 책이 의도하는 것 역시 그렇다. 셰퍼에 따르면, “‘미학에 고하는 작별’은 또 다른 미학의 탄생에의 호소이다.” 즉 이 작별은 또 다른 미학을 위한, 그 탄생을 촉구하기 위한 작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셰퍼가 말하는 “또 다른” 미학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셰퍼가 천천히 전개해 나가는 논지와 옮긴이의 상세한 해제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추구하는 바가 단순히 “작별”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에 고하는 작별은 내일을 향한 마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