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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이생진)
추천의 글(송일준) 추천의 글(박순백) 시인의 말 1. 한계령에서 한계령에서 1 한계령에서 2 - 타인의 노래가 되어버린 한계령에서 3 - 낙엽 떨어지던 저 능선에 진달래 피면은 한계령에서 4 - 미래는 알 수 없음에 가치가 있다 한계령에서 5 - 가을의 정적을 깨고 피는 꽃처럼 한계령에서 6 - 마음보다 먼저 앞서 간 발길처럼 한계령에서 7 - 자욱한 안개 속에 길이 있다 한계령에서 8 - 눈 오는 밤이면 그려지는 고향 한계령에서 9 - 아무도 모른다. 얼마만큼 가야 만날 수 있는지를 한계령에서 10 - 별을 바라보면 거기 그의 모습이 2. 다시, 한계령에서 다시, 한계령에서 1 - 수채화 같은 삶이기에 비 오는 날이면 다시, 한계령에서 2 - 누구라도 한계령 그 고갯길에 서 보면 다시, 한계령에서 3 - 집어등은 고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를… 다시, 한계령에서 4 - 가슴 절절한 그리움으로 부르던 노래 다시, 한계령에서 5 - 기다렸다. 저 들길에 눈물보다 고운 4월 진달래 다시, 한계령에서 6 - 여기 구름이 머물렀다고 하여 다시, 한계령에서 7 - 찔레꽃 피면 고향길 나설까 다시, 한계령에서 8 - 오색 달맞이꽃에게 다시, 한계령에서 9 - 추일연가秋日戀歌 다시, 한계령에서 10 3. 또 다시 한계령에서 또 다시 한계령에서 1 - 날마다 수심이 깊어 인생이란다 또 다시 한계령에서 2 또 다시 한계령에서 3 또 다시 한계령에서 4 또 다시 한계령에서 5 또 다시 한계령에서 6 - 그대, 그리운 건 내게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한계령에서 7 또 다시 한계령에서 8 또 다시 한계령에서 9 또 다시 한계령에서 10 4.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1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2 - 한 조각 바람이면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3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4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5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6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7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8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9 - 한계령 겨울나무에게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10 5. 가을 한계령 한계寒溪 - 9월의 편지 가을 한계령 - 낙엽 지는 날의 엽서 한계령에서 한계령 상고대 그 가을 한계령 6. 나의 어린 시절과 「한계령」을 쓰기까지 나의 어린 시절과 「한계령」을 쓰기까지 다시 한계령에서(악보) 한계령(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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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상 그렇게만 살고 싶었는데
내가 부르는 노래 내가 불러야 하는 노래 육신의 껍질 훌훌 벗어놓고 달 뜨는 동편 산자락 꽃으로 피리라 구절초 쑥부쟁이 서러운 그 꽃으로 달이 지면 목 놓아 울고 서러이 홀로 새날에 새 바람 불어오는 영마루 꽃으로 피어 노래 부르리 인생은 흐르는 시간 속 찰나의 꿈 향 한 촉 사룰 시간 있을까 시간을 어루만져 바람 분다 채 마르지도 못한 나뭇잎 떨어진다 ---「한계령에서 5」중에서 가슴 아파하지 마라 너의 고통이 더 아플 것인데 몇 방울 눈물로 지울 수는 없잖니 달이 없어도 밤이면 피어나는 운명 누가, 너의 그리움 절대 산정에 오르라 하는지 울어라 속삭이는지 몰라도 꽃망울 터뜨려 해사하게 웃기만 하여라 다만 그리움으로 충만한 밤 한낮의 몽상은 계속되고 이윽고 팽창하여 톡톡 가슴들을 여느니 이상한 꿈을 꾸는 아이처럼 순수의 달빛 아래 네 눈물 바다에 익사하는 내가 있다 ---「다시, 한계령에서 8」중에서 불러 본 적 없다 하였건만 부득부득 불러 보란다. 한계령 노래 원작자가 그것도 못 하느냐다. 세상 참 제목 잘못 붙여 놀림당할 일 두려운데 바꿀 길 없는 제목인 줄이나 아는지 내 삶의 그 어느 한 때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먼저 한계령에서가 되었어야 할 사연 많은 한계령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내 탓 이요.’ 하려니 그도 궁색하기 그지없음은 내 모습 그대로 오가피나무 가시가 손톱을 휘저었단 시어에 오가피나무에 가시가 어찌 생겼냐는 사람 그 말 서글퍼 메스처럼 가슴 휘졌는데 ---「또 다시 한계령에서 7」중에서 오래토록 아파하던 서러움 하나 한마디 말 없는 당신 앞에 내려두고 그토록 애끓던 쓸쓸함도 당신께 맡겨 두고 돌아서는 길 언제 당신이 제게 사랑한다 한 적 있나요. 언제 당신이 제게 용서한다 한 적 있나요. 묻고 또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 없는 당신을 생각하며 노을빛 밟아 돌아오는 길 무언가 못 할 일 저지른 듯싶어 눈물 한 줌만도 벅찬 당신 앞에 말이지요. ---「그리고, 또 다시 한계령에서 4」중에서 어머니 여기 명치끝이 너무 아파요 발아래 아득하게 텅 빈 허방에 혼자 섰나 쓸쓸함 가득 찬 가슴이 너무도 아파요 어여 오라 손짓만 그리도 야속하게 허허로운데 수천수만 걸음 걸어왔어도 여전히 아득한 거리 눈물겹게 낯선 바람 불어요 눈물도 말라버린 가슴팍에 흔들거리며 지워지는 풍경 그래 설까요 어머니 명치끝이 참으로 서럽게 아파요 ---「한계령에서」중에서 오색령! 누군가 물었습니다. “오색에도 한계령 말고 또 다른 고개가 있어요?” 한계령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 “한계령을 한동안 오색령이란 이름으로 불렀던 적이 있었고, 소솔령이나 소동라령으로도 불렀었다고 전해진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이 됩니다. 저에게 있어 이 한계령(오색령)은 여행의 목적지나 여정의 행간 한 부분을 차지하는 길목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대상 하나쯤 있지 않을까요? 바로 삶의 이유고 목적이며 가치인 대상 말입니다. 저에겐 한계령이 얼마쯤은 고단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세월의 증인이고 친구며 동반자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한이고 행복이며 동시에 숙제기도 합니다. ---「나의 어린 시절과 「한계령」을 쓰기까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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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의 사계절이 온전히 그려지는 45편의 시
슬픔이 묻어나는 감미롭고도 아름다운 노랫말 한계령이라는 지명은 한계(限界)가 아닌 한계(寒溪)로 한자표기를 해야 하는 고갯길, 령(嶺)이다. 한계(限界)란 말은 어떤 대상, 아니 대부분의 사물이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범위나 경계로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 이미 알고 있었다. 더러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저지당하는 느낌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한계(寒溪)는 막히거나 끊기고 단절되며 저지당하는 운명이 아니다. 끝없이 이로운 물길들을 만나 서로 섞여 어우러지며 도도히 흐르기 시작하는 차가운 시냇물을 이른다. 오색(五色)으로 불리는 마을은 이 땅에 단 한 곳뿐이다. 오색나무가 마을에 자라서 오색리로 불렸는데, 이 나무는 키가 작았고 마을에서도 지금은 숙박시설이 들어선 자리를 따라 흐르던 아주 작아 골짜기라 부르기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도랑 가에 있었는데 1970년대 모두 사라졌다. 바로 그 마을에서 시인은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시인은 머리말에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저 잡초에 불과한 풀도 꽃을 피운다. 구절초, 쑥부쟁이, 질경이, 졸방제비꽃, 한계령 풀, 구름송이풀 등 모든 들풀마다 고유의 이름을 지녔지만 제대로 모르면 그저 풀이고 잡초가 된다. 들과 산에서 만나는 모든 풀의 이름을 배워 부르며 시로 쓰고, 글로 풀어가며 살고자 했다.’라고 썼다. 한국PD연합회장과 광주MBC 사장을 지낸 송일준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대라고는 해도 소년은 처참하게 가난했다. 배가 고프면 오색약수로 배를 채웠고 공부가 하고프면 설악산 줄기들을 탔다. 한계령에 올랐다. 세상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떠돌고 싶었다. 산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어깨를 떠밀었다. “때가 될 때까지 네게 주어진 세상을 살아 내거라.” 눈물이 났다. 진작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의 가슴에서 오색약수처럼 시가 퐁퐁 솟아올랐다. ‘저 산은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시는 노래가 되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을 위로해주는 슬프면서도 따뜻한 멜로디. 지치고 힘들 때면 시인의 시집을 들고 한계령에 오시라.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을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거려줄 따뜻한 품이 여기 있다.’ 이생진 시인은 추천사에서 정덕수 시인과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해발 1400m에서 1700m 설악산의 산 능선마다 어디에 어떤 산나물이 자라는지 안다는 정 시인의 안내로 굽잇길을 달려 한계령을 오르고 차를 나누었어요. 다시 그의 고향이라는 오색마을에서 정 시인의 토박이 친구가 직접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었지요. 동행한 이들과 같이, 일찌감치 숙소를 정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난 다음 찾아간 “낙산사 뒤쪽이라 후진(後津)으로 부른다.”는 작은 포구 횟집에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산삼도 보았나요.”라고 정 시인에게 물어보더군요. 궁금증에 그가 하는 대답에 저절로 귀를 기울여 듣게 되더군요. 예전엔 산삼이라 하면 정말 진귀한 영물이고 산삼 하나로 팔자를 고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설악산에 사는 정 시인이 과연 그런 산삼을 만났나 싶었지요. 해발 1000m 지대에서 처음 산삼을 산나물을 채취하다 만났고, 얼마 전에도 1600m 지대에서 다시 몇 뿌리의 산삼을 만났다는 그의 대답과 함께 우리 일행들은 산의 내음이 물씬 나는 얘기를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었네요. 그러고 보니 그날 일몰을 맞춰 찾았던 후진항 방파제 바로 앞 횟집은 제법 오래전 낙산 바닷가에 세워진 황금찬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 갔을 때 정 시인이 안내했던 곳이더군요. 세월이 흘렀고, 몇 사람 일행은 바뀌었어도 그나 나나 여전히 시를 얘기하고 잠시나마 같은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정 시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으로 시 한 편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날 하루 일행들을 안내하는 정 시인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에 들려주었던 〈한계령〉이란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과 동기를 통해 오색리가 고향인 정덕수란 한 인물이 살았던 기록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 썼다는 「한계령」이 그의 나이 18살 시절이라면 그 이전부터 이미 많은 시를 썼다는 얘기인데 그 궁금증은 그가 저에 대한 기억으로 들려준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70년대 말 어느 해인가로 기억되는데 가을이 시작되기 전 장충단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보리수 다방이란 곳에서 몇 분의 시인님들과 함께 계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드러냄 없이 조용하면서도 나이 어린 후배들을 배려하시는 겸손하신 모습에 더 많이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고, 그 뒤로도 여러 곳에서 선생님의 변함없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 시인의 얘기로 미루어 19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자리에서 만났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가 나를 닮고 싶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최근에도 거푸 두 번 인사동에서 만났는데 멀리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정 시인에게 “시 많이 쓰세요.”라 했던 인사가 이렇게 다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인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반가운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부하니, 아름다운 고갯길 설악을 찾을 때는 정덕수 시인의 『한계령』을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설악의 품에 안겨 바다를 만날 때도 시집을 꼭 품에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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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갯길 설악을 찾을 때는 정덕수 시인의 『한계령』을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설악의 품에 안겨 바다를 만날 때도 한계령에서 시집을 꼭 품에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 - 이생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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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힘들 때면 시인의 시집을 들고 한계령에 오시라.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을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거려 줄 따뜻한 품이 여기 있다. 시를 읊조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고갈됐던 에너지가 다시 채워져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 송일준 (전 한국PD연합회장, 광주MBC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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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들을 읽으며 한계령에 얽힌 애증에 함께 아파하는 동시에 깊은 사랑을 가지게 됐다. 그 후의 한계령은 외지인인 내게도 고향 같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 박순백 (수필가, 언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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