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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시간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작가의 말 |
Shin Kyung-Sook,申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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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내게 닥친 일 중에서 어려운 것만을 찾아 나를 돕던 큰아이. 나를 탓하지 않고 그렇게 말해주는 아들에게서 힘을 얻어 다시 일거리를 찾아다녔어. 집을 나설 때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라던 성경 말씀을 새겼지.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곳간에 모아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그들보다 귀하지 않으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때면 무거운 발걸음을 떼면서 너.희.는.그.들.보.다.귀.하.지.않.으.냐. 웅얼거렸다네.
--- p.51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던 17년 6개월 동안은 조국이 우리 가족을 버렸다고 생각했어. 깊이 사랑한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은 아문 후에도 마음에 폐허를 남기지. 우리 네 식구는 타의로 시작된 이곳에서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 속마음을 털어놔본 적이 없네. 내가 서울에 딱 한번 갔었다고 말하자 왜 서울에 다시 가지 않느냐고 선생이 물었지. 시인이 모국어와 그렇게 등지고 살아서 되겠느냐고도.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나? 대답을 하기는 했는가? 조국과 정부는 다르다고 생각하네. 딱 한번 서울에 다녀온 후 알게 되었네. 조국이 우리 가족을 버린 게 아니라 정부가 우릴 버린 것이었다는 걸. 남편이 그렇게 그리워한 곳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가지 않은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네. 내 아들들이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조국이지만 마음에 품고 살아가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 나이가 되면 자식의 침대가 놓여 있는 곳이 조국인지도 모르지. --- p.73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 p.96 우리는 젊어서 외로웠고 각자의 태생지를 두고 기차를 타고 떠나온 사람들이라 도시에 집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매달 다가오는 월세 내는 일은 벅차고 고되었다. 결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은 이유 없이 잡을 손이 필요했다. 나에겐 너의 손이 거기에 있었고 너에겐 나의 손이 거기 있었겠지. --- pp.111~112 퇴락한 기다란 목선 안에 빈틈없이 실린 남루한 살림살이들은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 p.121 너에게 갈 수 없으니 나는 여기 있을게. 오늘은 어땠어? 내일도 물을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하지. 반짝이는 눈망울을 한 아이들, 모든 것을 잃고 멀리 떠나는 사람들, 남루한 세간살이들, 누군가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 이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대면할게. 사랑하고도 너를 더 알지 못해서 미안해. --- p.157 가끔 처음 해보는 일이나 처음 당해보는 일 앞에 처하게 되면 제 나이를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물끄럼해집니다. 아직도 처음인 게 남아 있다니 싶어서요. 도대체 얼마를 더 살아야 처음 닥치는 일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요. 누구에게나 죽음을 앞둔 일초 전도 처음 처하게 되는 순간일 테니.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 일초 전까지 처음 앞에 서게 되는 거네요, 선생님. --- pp.167~168 단순한 여행으로 이 섬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요. 송당의 어디쯤에서 이런 표석과 마주쳤어요. 사람이 죽은 얘기가 담담히 쓰인 표석을 본 뒤부터 이 섬에 자주 왔어요. 그러니까 표석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읽으러요. 어느 날인가 이 다랑쉬굴 앞의 표석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바람이 너무 휘몰아쳐서 날아가버릴 것 같은 날이었는데 내 숨은 내 것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요. --- p.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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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 서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신경숙의 따뜻한 손길 뉴욕에서 일년간 함께했으나 지금은 무슨 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는 화가 ‘선생’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는 「봉인된 시간」의 화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봉인된 시간’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군인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지 반년 만에 박 전 대통령 암살사건과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 암살자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가족은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낯선 미국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고국에서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던 화자는 모국어를 향한 그리움을 품은 채 시 쓰기를 놓지 않는다. 그러던 중 평소 흠모했던 고국의 화가가 뉴욕으로 와 체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머물 집을 알아봐주는 일을 시작으로 일년간 그와 가깝게 교류한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연락을 시도하지만 어쩐 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고, 태풍 샌디로 집 안에 갇히게 된 화자는 답장을 받지 못할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태풍이라는 자연현상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집 안에 갇힌 화자의 현재 상황처럼 삶의 격랑에 휩쓸려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향해 투쟁하는 존재의 격렬한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오랜 친구에게 보내는 가슴 아픈 작별인사를 담은 작품이다. 20대 초반부터 우정을 나누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친구는 암투병을 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나’는 친구의 작별인사가 담긴 이메일을 받고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지만 친구는 한사코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복기하며 ‘나’는 친구가 사는 독일의 지척에서 매일매일 전화를 건다. “나에겐 너의 손이 거기에 있었고 너에겐 나의 손이 거기 있”어서 위로받았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하루하루 작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이 작품의 제목인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인도 출신 설치미술가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퇴락한 기다란 목선 안에 빈틈없이 실린 남루한 살림살이들”을 전시한 이 작품은 ‘나’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낡은 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차디찬 강을 건너는 중에도 맞잡을 수 있는 서로의 손이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찬란한 진실을 펼쳐 보이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비로소 온전하게 작별한다. 표제작 「작별 곁에서」는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뼈아픈 작별을 겪은 ‘나’가 「봉인된 시간」의 화자에게 8년 만에 보내는 답신으로 쓰인 작품이다.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 오랜 시간 은둔했던 ‘나’는 작업실로 사용했던 제주의 숙소를 8년 만에 다시 찾는다. 그사이 전세계는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팬데믹 상황을 맞았다. 인간생활의 친밀감을 두려움으로 바꿔놓은 바이러스는 모두를 위축시키지만 ‘나’는 깊은 무기력 속에서도 집주인 ‘유정’과 함께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지난 흔적과 조우한다. ‘유정’의 안내로 4·3의 아픈 흔적을 마주한 ‘나’는 “내 숨이 내 것인 것만이 아니”며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유정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삶 쪽으로 발을 내디딜 힘을 얻는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은 매 순간 헤어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로한다. “부서진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봐야 하는 것이 숨을 받은 자들의 몫”(작가의 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는 이렇듯 애틋한 발신음이 되어 절망의 끝에서도 우리를 구원할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부서진 자리에서 마주한 생의 찬란한 숨결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마음을 주었던 것들과 종내에는 이별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데 있어 깊은 의미가 되어주었던 모국어와의 작별, 유약한 젊은 시절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소중한 친구와의 작별, 한때 생의 전부이기도 했던 그 모든 존재와의 작별을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후회 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듯하다. ‘작별’에 대한 신경숙의 깊은 사유와 빛나는 통찰은 우리에게 아직 사랑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한 것, 마음이 묻어 있는 것들과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기를”(작가의 말), 환한 삶 쪽으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이 세통의 긴 편지글은 인생 속에서 한때 부서져본 사람이 부서지려는 사람에게 건네는 손길이기도 하다. 이 다감한 손길은 생의 찬란한 숨결이 되어 지금 작별 곁에 서 있는 당신의 어깨를 가만히 보듬어줄 것이다. 작가의 말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일들로 삶의 방향이 틀어져버린 사람들의 작별이 희미하게 서로 연결된 채 여기 있다. 이 연작소설을 이루는 세통의 긴 편지가 어디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수신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간절한 발신음들이 당신을 만나 서로 손이 닿기를. 희망을 안고 탔던 배는 종종 난파되어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지 않는다. 배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알 수 없는 곳에 우리를 내려놓고 부서져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서진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봐야 하는 것이 숨을 받은 자들의 몫이라는 말을 당신에게 하고 싶었는지도. 부서지려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 독백형의 세통의 편지를 쓰게 하는 일뿐이었다. 다만 쓰는 동안 나 자신이 저쪽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읽는 당신도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 나는 메말라가지만 내가 어떤 글을 쓰든 그 글들이 종내는 작별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보듬어주는 온기를 품고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한 것, 마음이 묻어 있는 것들과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기를. 지금 내게는 작별하는 일이 인생 같다. 2023년 봄 신경숙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