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킨토스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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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슬러 사법대신이 왜 제로델을 폐기하자고 주장할까요? 제로델을 인간으로 본다면 추방형을 내려야 하는데 그럴 경우 그에게 이주할 행성을 찾을 기본 시간과 최소한의 정착비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이 일을 오래 끌기 싫은 겁니다. 폐기가 추방보다 쉽기에 폐기로 결정된 겁니다. 그러나 제로델은 인간이에요. 행성 유르베에는 사형 제도가 없습니다!”
“에레나 마르 박사는 제로델을 만들며 사교계를 관할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프로그래밍했고 제로델은 프로그램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그에게는 폭력성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 가드 공작이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에게 인간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인 속성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니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다소 비약은 아닐지요.” “진짜 잔혹한 건 인간이란 말이에요! 그가 빛날 때는 인간으로 인정하다가 성가셔지자 폐기로 결정지은 건 누구죠? 대관절 인간의 잔혹성은 누가, 언제 프로그래밍한 거죠?” --- p.118 “왜 내가 제로델을 사람이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나는 이 일과 관련된 많은 이들을 만났어. 자네는 제로델이 수감된 후 가장 오래 그와 시간을 보낸 이지. 나는 자네의 의견도 편견을 갖지 않고 들으려 했네.” “이 사건의 본질은 제로델이에요. 그를 사람이라 여겼다면 제일 먼저 제로델부터 만나러 오셨어야 해요.” “이 일에 관여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지나치게 의인화하거나 기계로만 보거나. 나는 중립을 지키려 했어.” “세상에 중립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요? 존재한다면 옳은 걸까요? 제로델을 사람이라 봤다면 어떻게든 구명하셨을 겁니다.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신부님은 그를 구할 마음까지는 없으셨던 거예요.” -행성 달루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그건 자네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일세! 나도 이 전쟁에 반대하네. 하지만 우린 성직자야. 중립을 지켜야지! 그가 행성 유하를 떠나려 하자 상급자가 그를 호되게 책했다. 그리고 그를 방에 가두었다. 카이유와는 탈출했다. 그래야 했다. --- pp.160-161 |
사랑인가, 학습된 반응인가. 추방인가, 폐기인가.
귀족 사회에 깊이 침투한 로봇 ‘제로델’을 둘러싼 암투와 욕망. 제로델은 유르베에서는 최초로 로봇으로서 시민권을 받았고, 중세 왕정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만들었던 감옥에 갇히는 첫 번째 시민이 되었다. -26쪽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 인격체인지 아닌지를 판명하는 소설은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너무 클래식하다고 여길 SF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소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클래식한 소재는 그저 고전적인 것이 아닌 특수한 소재가 된다.『히아킨토스』는 독특한 배경 속에 문제적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클래식한 소재를 정면으로 돌파해나간다. ‘유르베’는 마치 빅토리아 시절 왕정과 귀족 사회의 풍경을 재현해놓은 듯한 소설이다. 대개 SF 콘텐츠는 우주 개척 시대임에도 왕정 시대로 회귀한 설정을 차용할 때, 저마다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 인공지능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문명이 파괴되어 제국의 환경을 갖추었다든지, 다른 문명과의 오랜 단절 때문에 정치 시스템이 후퇴했다든지 등등. 『히아킨토스』의 행성 ‘유르베’는 독특하게도 너무나 많은 풍요와 평화 때문에 왕정이 정착되었다는 설정이다. 풍부한 자원을 갖춘 시민들이 역할극으로 즐기던 귀족 놀이가 진짜 정치 환경으로 구축된 것이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귀족정. 그러나 누구에게도 과한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느슨하고 평화만이 가득한, 동시에 많은 이들이 욕망이 실현되기도 하는 사회. 유르베는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곳이다. 하지만 이 유르베 또한 로봇 제로델의 파괴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두 분파가 갈등하게 된다. 이때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카이유와’가 등장한다.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유르베에 정착해 신부가 된 그는 유르베 사회 속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며, 제로델과 얽힌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는다. 그리고 유르베 사회에 속한 인물들이 각종 트라우마와 딜레마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로델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르베에서 벌어진 갈등은 단순히 제로델만이 가져온 것이 아닌, 이 사회 곳곳에 뿌려진 불합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카이유와는 이 행성에서 벌어진 갈등을 보며, 자신이 참전했던 고향 행성의 전쟁을 반추하는데. 『히아킨토스』는 유르베의 환경에 깊이 침투한 제로델의 존재 양태에 관한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로봇 제로델. 그 자신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하고 있을까? 제로델에게 씌여진 범죄 혐의는 혐의에 불과한가? 만약 제로델이 그토록 완벽한 존재라면 그가 중심축이 된 이 행성의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이 소설은 전개될수록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들로 독자들을 휘어잡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