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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초판 작가의 말 5 1 전씨가의 사람들 11 2 동해랑의 낙조 104 3 묵은 것과 새로운 것 258 2권 4 풍운의 화촉 7 5 어머니의 아들 255 6 풍진세상 371 3권 7 적선정 나으리 댁 사람들 7 8 아들딸의 시대 162 9 인삼장의 연회 297 종장 429 |
朴婉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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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태임이가 이 나라 여자들과는 다르게 살길 바랐다. 이 나라 여자들이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쓰고 있는 숙명적인 굴레에서 태임이만은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 다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그런 삶을 예비해야 되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미구에 여자들의 삶도 달라지게 되리란 막연한 예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 안팎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풍운이 다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과도 상통하는 그만의 현실감각이었다.
---p.34 「1권」중에서 “그 사람은 당장 숨이 넘어갈지도 모를 만큼 위중한 것 같았어요. 그런 중에도 헛소리를 지르는 게 밖에까지 들렸어요. 그 도적놈들은 왜놈들이었다고 나막신 신은 걸 똑똑히 보았노라고 외치더군요. 그대로 죽게 할 순 없었어요. 누군가가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그는 아마 죽어서도 눈을 못 감고 원귀가 되어 떠돌아다닐 것 같았어요. 그때 그에게 필요한 건 약이나 침보다 그의 말을 참말로 믿어 주는 사람이었어요. 전 들어가서 그에게 다짐했어요. 그의 말을 믿는다고, 그가 죽어도 내가 그 말을 증거하겠노라고요. 그게 뭐가 나빠요, 할아버지.” ---p.124 「1권」중에서 좋은 날씨를 풍파 없이 화락한 금슬로 비유하고 바라는 것처럼 흔하고 듣기 좋은 덕담도 없었다. 이제부터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술과 입심 좋은 덕담이 넘칠 차례였다. 홀로 승재만이 고약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신양명에 대한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훨씬 못할지 모른다는, 여지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그건 도저히 위로받을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같은 처지로 알고 동고동락하던 종상이가 하룻밤 새의 개성 부자 노릇을 하는 걸 보고 느낀 배반감과 열등감에는 그렇게도 신효한 치료제가 돼 주던 출세에의 집념이 이렇게 보잘것없어질 줄이야.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비하면 그건 구질구질하고 징그러운 욕심에 불과했다. ---p.137 2권 중에서 떡을 따라 우루루 안으로 들어온 여자들은 어른, 아이, 상전, 드난꾼 가릴 것 없이 목판을 하나씩 차지하고 둘러앉아 조랑이떡을 만들었다. 대개는 어른들이 손에 기름을 발라 가며 손가락 굵기로 가늘고 길게 밀어 놓으면 계집애들은 그걸 가져다가 날이 무딘 나무칼로 허리를 잘룩하게 눌러 주면서 잘라 내면 꼭 누에고치 모양의 조랑이떡이 되었다. 가래떡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대신 나중에 썰 필요가 없이 그대로 떡국을 끓일 수 있는 송도 지방 고유의 떡 만들기였다. 손은 많이 가지만 특별한 솜씨를 요하지 않아 어른 아이가 함께 어우러져 하면서 구수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조랑떡 만드는 재미였다. ---p.443 2권 중에서 “기미년 만세 통에 여란이 학생은 서울에 없었죠? 우리 집은 종로통 복청다리 근처니까 만세 통 한복판에 산 셈인데 그때 서울 장안이 어땠는 줄 알아요. 참 장했다우. 특히 학생들 장한 건 말도 못 해요. 학생들이니까 그렇게 일제히 한꺼번에 일어날 수가 있지 백성들이야 마음은 있어도 제각각이지 합칠 재간이 없잖아요. 여학생들도 남학생들과 똑같이 발을 구르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는데 정말 장합디다. 조선 사람이 아니면 모를까 그걸 보고 같이 따라서 만세를 안 부를 수가 없었으니까. 다리 밑에서 거지가 쪽박을 두드리며 만세를 부르지 않나, 부엌에서 밥 짓던 여편네가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뛰쳐나오질 않나, 그동안 가만히 죽어 지낸 게 부끄럽고 원통해서 제각기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나서는데 그 힘에 천지가 진동하고 고목나무도 살아나 춤을 추는 것 같더라구요.” ---p.45 3권 중에서 종상이에게 만주 땅은, 만주 땅 중에서도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간도 지방은 꿈의 고장이었다. 힘이 부쳐서 이루 다 개간할 수 없다는 무진장 넓고 기름진 땅, 조선 사람이 모여 사는데도 일본의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자치지역, 독립투사들의 의기가 충천하고 민족의 기상이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곳, 그뿐일까 무력으로 당당하게 일본군과 싸워 대승한 별천지였다. 바로 두만강 너머에 그런 땅이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고 언젠가는 마침내 그 기적적 기운이 햇살처럼 조선 땅에 퍼질 것을 믿고 싶었고 미리 확인해 두고 싶었다. ---p.89 3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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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르기까지
박완서가 채집하고 체화한 한반도의 이야기 『미망』은 박완서 작가의 소망이기도 했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이렇게 쓴다.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소설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커다란 애정을 보여 주는 개성 사람의 특질과 그 고장만의 상업과 사업가들의 방식, 특히 개성 지방의 물과 흙으로 키워 낸 인삼 농사에 대한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렇듯 『미망』은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되살리는 동시에 한 집안의 일대기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 그 이전의 고려 시절부터 맥을 이어 온 역사와 경제, 그리고 구시대의 가족과 그로부터 뻗어 나가 변해 가는 아들딸들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큰 줄기를 관통해 가는 와중에 박완서 작가 특유의 여성주의적 관점에 더해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가식 없는 평가, 욕망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넘쳐난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집필했음에도, 『미망』 속 박완서의 문장에는 결연하고 전진하는 듯한 힘이 서려 있다. 시대의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꼈던 잎새 같은 사람들이 남긴 잊을 수 없는 눈빛 『미망』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분제가 들썩이던 시절 비범한 상업 감각으로 인삼 농사와 장사를 통해 집안의 부를 축적한 전처만 영감과, 그가 유난히 애틋하게 아끼는 손녀 태임, 그리고 태임의 남편이 되는 쇠락한 양반 가문 출신 종상, 태임의 어머니가 친정의 하인과 간음하여 낳은 태임의 이부 동생 태남, 이후 시간이 흘러 태임과 종상이 결혼하여 낳은 딸 여란으로, 이외에도 이 가문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인물들이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욕망을 찾아 헤매며, 그 와중에 서로 반목하고 연민하거나 경쟁하고 동지가 된다. 소설의 제목 ‘미망(未忘)’의 뜻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종종 제목의 동음이의어인 ‘미망(迷妄)’, 즉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물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시기에 닥쳐오는 혼란과 변화를 구시대(조선)보다 자유롭게 느끼며 폭발하는 개인적 욕망을 마주하면서도, 나라의 흥망 앞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같은 ‘떳떳한 것’에 대해 거듭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 단어는 운명 앞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나타낸다. 작가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이 세밀하면서도 우직한 소설을 그때보다 먼 훗날의, 지금의 독자들이 함께 체험하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