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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발과 오븐
김형수
한뼘책방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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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여는 글: 이 사람부터 태웁시다
이름을 찾아서
왕할매와 곶감
헬로, 아임 프레시맨
900원짜리 참치캔
1995년 3월 2일, 오늘처럼
전화 카드 한 장
아스피린을 삼키고
흰고래 같은 차를 타고
유니크하고 유일하다, 예술이다
티라노! 뭐라노? 와그라노?
게르니카는 미술 동아리가 아닙니다
쉘 위 댄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신의 아들
고독하지 않았다
커피 마시는 티라노
우간다에서 얻은 이름
닫는 글: 우울한 날에는 오븐을 데운다

저자 소개1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자라는 동안 목발에 능숙해지고, 승차 거부에 익숙해졌다. 1995년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으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국내 최초의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를 결성했다. 에바다복지회 비리척결 운동에 동참하고, 군가산점 제도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 냈다. 현재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대표이며, 장애인 진학을 지원하고 인권 교육을 한다. 에세이 『목발과 오븐』을 썼고, 함께 쓴 책으로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 『인권연대의 청소년 인권 특강』,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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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30g | 130*210*14mm
ISBN13
9791190635196

책 속으로

어릴 적 부산의 새벽 택시는 마수걸이 손님으로 안경잡이, 여성, 장애인을 태우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나는 그중 두 가지나 해당된다. 어느 날은 부산 연제구 거제동 큰길에서 수많은 빈 택시가 우리 앞을 지나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어머니와 나는 두 시간을 서 있었지만 목발을 발견한 택시는 손사래를 치며 우리를 태우지 않았다. 결국 그날 친척 모임에 가지 못했다.
--- p.8

어머니는 공립학교에 입학 서류를 내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러고는 동래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내가 입학할 수 있을지 문의했다. 전화를 받은 오승희 선생님은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고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학교는 학생을 골라서 받지 않는다 말씀하셨다.
--- p.106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을 빚기 시작했다. 나의 오른쪽 다리를 하얀 점토로 빚었다. 지구의 자전축보다 훨씬 기울어져 있는 내 하체였다. 처음으로 학교 과제물에서 형을 이겼다. 처음으로 미술 최고점을 받았다. 아크릴판 위에 내 작품이 놓이고, 선생님의 평가가 종이에 적혀 있었다. “유니크하고 유일하다. 예술이다.” 그날 내 몸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아름답고 멋있는 예술 작품이 되었다.
--- p.114

4학년 때부터 학교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남자아이들이 나를 “티라노! 티라노!”라고 불러 댔다. “티라노사우루스, 징그럽다! 웃기다! 이상하다!” 복도의 학생들이 모두 웃을 때까지 외쳐 댔다. 나는 멸종해야 했다. 그저 이상하게 살아남 아 웃기게, 이상하게, 위태롭게 걸어다니는 존재였다.
--- p.121

대학에서 두 번째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같이 면접을 봤던 친구가 종합관 5층에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전동휠체어를 탄 그를 번쩍 들어서 계단에서 내려줄 친구들도 없었다. “이놈의 학교, 이대로 다니다간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 뭐라도 해보자. 아~들을 모아 봐라, 니가.” 텅 빈 강의실 앞 종합관 복도에 그의 부산 사투리가 텅텅 울렸다.
--- p.134

4월 1일 대학 최초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가 만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5월에는 중앙도서관 앞 천막 동아리방이 열렸다. 책상 하나 놓기 힘든 우리는 그들을 향한 욕설과 혐오조차 부러웠다. 그 천막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저희도 우리의 인권과 문제를 알리기 위해 농성하고 싶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천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들은 우리 앞에 무릎을 굽혔다. 휠체어에 앉은 동료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그들은 책상과 서명판, 자보판을 모두 우리에게 넘겼다. 천막 앞 입간판에 적힌 ‘동성애’를 ‘장애인’으로 바꿔 크게 적어 주었다. 우리가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동안 내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변에 모이게 했다. 자기네보다 우리의 바퀴와 우리의 장애를 먼저 옹호했다.
--- p.168

4년 동안 동아리 활동, 총학생회 선거 개입 운동까지 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동원했다. 그때 내가 모든 우주의 중심이자 지구의 중심처럼 우쭐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고민하고, 나처럼 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말하고 기다란 대나무처럼 책망하기 바빴다. 수업 내내 배고픔을 견디다 동아리방에 온 후배들과 먼저 밥을 나누지 못하고, 회의를 뒤로 미루지 못했다. (…) 나는 후배들로부터 멀리해야 할 방사성 폐기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그만 사라져야 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도 내 곁에 틈을 주지 못했다. 더 이상 나 같은 존재로 고민하거나 투쟁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해가 지면 내일은 태양이 뜨지 않기를 그때는 간절히 원했다.
--- p.206

우리는 그럴수록 혼자 밥을 먹으면 안 된다. 나는 우리 집 오븐 스위치를 함부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월요일부터 이번주에 차려 낼 메뉴를 고민하고 일주일 내내 요리 연습을 할 것이다. 금요일이면 방문할 누군가를 위해 청소를 할 것이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건씩 성명서와 대자보를 신들린 듯 써 댔다. 이제 몸으로 싸울 물리력도, 조직으로 대항할 정치력도 없다. 그냥 지친 누구에게 한 끼 식사 만들어 드리는 것이 최선의 저항이 되었다.
--- p.222

비장애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것으로부터 거부당하지 않으려고 애쓸 때마다, 혀 차는 소리나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요리를 한다. 아주 우울한 날에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너무 슬픈 날에는 어묵탕을 우린다. 지치고 기운 빠질 때는 돼지 스테이크에 후추와 소금을 뿌린다. 그 내음이 올라오면 수퍼 히어로의 수트처럼 내 몸에 갑옷이 생긴다. 외할머니집 깊고 깊은 시커먼 정지에서 장작불로 졸인 조청같이 내 마음이 달달해진다. 음식을 나눈 사람들의 마음도 잠시나마 달달해지기를 기원한다.

--- p.223

출판사 리뷰

- 목발로 걷는 사람, 김형수

어린 시절 무릎이 까지도록 기어서 돌아다니던 형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다른 아이들이 「마징가 Z」 주제가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동안, 목발이 걸려 넘어질까 두려워 줄에서 빠져 나왔다. 계단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계속 앉아서 구경하지는 않았다. 바깥 세상이 너무나 궁금했던 그는 목발 여기저기가 파이도록 다니며 “누구보다 목발을 잘 다루고 잘 걷는 사람”이 되었다. 아스피린으로 근육통을 다스리고, 겨드랑이에서 피가 나도록 걷고 또 걸었다.

- 길을 내는 사람, 김형수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 첫 실시로 1995년 연세대에는 김형수를 비롯해 스무 명 넘는 장애 학생이 입학했다. 하지만 학교에는 휠체어가 구를 경사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습 자료도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서 몇몇 친구들은 오줌통을 들고 다녀야 했다.

“이놈의 학교, 이대로 다니다간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 뭐라도 해보자.”라고 외치는 휠체어 타는 동기와 의기투합하여 김형수는 최초의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를 만들었다. 경험도 조직도 없던 그들에게 농성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 것은 성소수자 모임이었고, 현수막을 대신 쓰고 자보를 붙여 준 이들은 총여학생회였다. 여럿이 힘을 보태 더디지만 조금씩 장애인권을 향한 길을 만들어 갔다.

- 신의 아들, 김형수

1999년, 헌법재판소는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현역 군필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해 온 제대군인지원법 해당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송의 청구인이 여성일 것으로 짐작할 테지만, 그중에는 남성도 있었다. 바로 김형수다. 군필자 가산점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 군필이 ‘될 수 없는’ 여성과 장애인이 함께 연대하여 이룬 성과였다. 김형수라는 이름은 헌법재판소 판례에 적혔고, 그는 신체 건장한 젊은 남성들의 힐난과 혐오를 받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 싸우는 사람, 김형수

그는 점차 학교 바깥으로 반경을 넓혀 연대하고 싸웠다. 1996년 세상에 드러난 에바다복지회의 비리 사건은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했던 김형수는 시설로 강제이주 당하고 특수학교로 보내졌던 장애인들이 여기 있다고 외치기 위해 광화문에 올랐다. 17분을 버틴 끝에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는 기사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지쳐 떠나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고민하고, 자기처럼 행동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칼날처럼 말하고 대나무처럼 책망하던 그는 결국 동료들에게 불신임을 당했고 침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 요리하는 사람, 김형수

어린 시절부터 제사상 차리는 외할머니를 거들고, 냄비밥이 타지 않는지 감시하고, 대학 모꼬지에서 밥물을 맞추면서 김형수는 부엌일을 익혔다.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그는 지금도 우울한 날에는 요리를 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지쳐 갈수록 혼자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븐에 고기를 굽고, 어묵탕을 우려 따듯한 음식을 대접하는 동안 함께하는 이의 마음이 잠시나마 달달해지기를 기원한다. 지친 누군가와 한 끼 식사를 나누는 것, 그것이 김형수의 저항이다.

- 이순희의 아들, 김형수

자기 이름보다 ‘형수 어머니’로 더 많이 불린 1950년생 이순희 씨. 장애가 있는 아들 초중고 12년 개근시키는 것이 여간 고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형수 어머니라는 이유로 상장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그이는 형수를 ‘이순희의 아들’로 살지 말라고 떠밀었다. 대학 등록금 영수증을 교직원에게 들이밀며 이제 내 아들 당신들이 책임지라고 당당히 요구했고, 형수가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자 일기와 상장을 모조리 챙겨 건네며 완벽하게 독립하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형수가 쓴 『목발과 오븐』을 이순희가 쓴 육아 일기 『통곡하고 싶었지만』(빨간소금 펴냄)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한국 현대사 속의 여성, 장애인, 인권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로 엮여 무늬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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