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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바늘

월경
눈보라콘
당신의 바다
등뼈
행복고물상
유령의 집
포옹

해설/이광호

저자 소개1

천운영

 

千雲寧

천운영은 1994년 한양대학교 신방과를 졸업했으며 199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 국문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지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01년 제 9회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등단작을 표제로 한 소설집 『바늘』을 출간했다. 2004년 소설집 『명랑』을 출간했고, 지난해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를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의 전면을 장식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여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선
천운영은 1994년 한양대학교 신방과를 졸업했으며 199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 국문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지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01년 제 9회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등단작을 표제로 한 소설집 『바늘』을 출간했다. 2004년 소설집 『명랑』을 출간했고, 지난해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를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의 전면을 장식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여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선보여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3년 신동엽창작상,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사람의 얘기를 쓰는 천운영은 그만큼 사람을 좋아한다. 대학시절 그의 자취방은 공부하던, 회의하던 친구들이 저녁마다 주막처럼 들러서 국수를 말아먹고 갔던 곳이다. 애들 교육은 못 시켜도 이웃에 떡은 돌렸던 할머니의 천성을 이어받았다는 천운영은 남들 음식 해 먹이고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뚜렷한 사회 인식이 아니라 토익, 토플, 상식 따위이기에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공권력에 쓰러졌던 시절, 천운영은 손목에는 청 테이프를, 옆구리에는 대자보를 끼고 다녔고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출석만 부르고 도망가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소설가의 꿈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고 말한다. 4학년 때 들은 평론수업 시간, 당시 김영삼 정권의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평론을 쓰는 과제에서 선생님이 그의 평론을 재밌게 읽고는 차라리 소설을 써보라던 한 마디가 순간 한 줄기 빛으로 천운영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당시 평론을 논설문이 아닌 현실을 빗대는 이야기를 만들어 썼다는 천운영은 선생님이 농담처럼 덧붙인 한 마디에 소설가의 길과 우연히 마주쳤다. '잘 하는 것 하나 없지만 소설은 잘 쓸 수 있겠다'는 확신에 한양대학교 졸업 후 서울예대로 진학했고 2년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다. 수업시간에 모르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몰라도 아는 척 하며 메모를 했다가 저녁 때 서점에 들러 모두 읽어버리던 천운영은 그 2년 동안 평생 읽은 책보다 대여섯 배 많은 책을 읽었다. 천운영에게 어느 날 한 줄기 빛이었던 소설에 대한 꿈을 키운 서울예대 2년은 "소설에 관해 얘기하는 친구도 얻었고, 좋은 선생님도 만났고, 소설을 고민하는 열정을 배운" 시기였다고 한다

천운영은 소설을 쓰면서 매 순간마다 집중하는 '화두'가 있다.「바늘」의 미와 추, 「명랑」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요즘 고민까지. 지금 이 순간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씹다 보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한다. 천운영의 소설들은 다르다. 그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차이는 자못 의식적일 정도이다. 가령, 「바늘」의 주인공은 남자들 몸에 문신을 새기는 젊은 여자이고, 「숨」에는 마장동에서 소머리를 분해하는 일을 하는 남자가 등장하며, 「당신의 바다」는 곰장어를 구워 파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이밖에도 고물상(행복고물상), 유원지의 도깨비집 관리인(유령의 집), 건축공사장 노동자(등뼈) 등 천운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는 만나보기 어려웠던 인물들이다. 그렇게 낯설고 독특한 이들의 세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점 역시 천운영 소설의 특징이다. 직접 발품을 팔고 꼼꼼히 취재한 노력이 돋보이거니와, 그것은 이웃의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58쪽 | 515g | 153*224*20mm
ISBN13
9788936436612

책 속으로

은하수로 들어가 계집의 머리채를 끌고 나왔으면 좋겠다. 은하수 문에 손을 대본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 나는 무기력하게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한다. 건물 입구로 막 들어가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문에 부딪치는 짧고 경쾌한 노크소리 네 번. 나는 난해한 암호를 해독하듯 양미간을 모으고 그 소리를 곱씹어보다가 고개만 내밀어 은하수 쪽을 바라본다.

--- p. 77

오전 내내 비닐막 안에 쭈그리고앉아 소머리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으려니 다리가 저려온다. 이제 대여섯 개만 더 하면 미연과 함께 송차중탕을 찾으러 갈 수 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주사기를 집어든다. 이놈은 한방에 가지 않았는지 망치로 여러 번 맞은 자국이 있다. 목 부분의 동맥도 제법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이 정도면 주사기 필요없이 바로 호스를 집어넣어도 될 것 같다. 호스에서 주사기를 빼고 동맥에 끼워넣는다.

--- p.53

뚜껑에 붙은 아이스크림에 혀끝을 살짝 대어본다. 혀의 돌기마다 전해오는 감칠맛에 나는 안달이 난다. 빨리 나를 먹어봐. 부라보콘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유혹의 손길을 뻗는 부라보콘을 보란 듯이 한입 크게 베어물고, 빨리 그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싶다. 하지만 성급하게 굴지 않는다.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며 내 혀를 부추기는 욕망이 자라나도록 그냥 둔다. 그것이 점점 더 살이 올라 목구멍과 가슴 한복판을 지나 복사뼈를 짓누를 때까지 참고 견디며 포장지에 붙은 미세한 아이스크림을 샅샅이 빤다. 그러면 부라보콘은 제 몸을 촉촉이 풀어내며 봉긋 솟아오르게 된다. 이제 가장 탐스러운 부분에 이빨을 들이 댈 때다. 살 속 깊숙이 이를 박으면 나를 짓누르던 욕구가 순식간에 방출되며 화사한 황홀경이 찾아온다. 입천장을 뜨겁게 후려쳤다가 부드럽게 목젖을 통과하고 종내는 말간 침에 의해 단 기억이 지워지는 일련의 과정. 천천히 그러나 격정적으로 부라보콘의 몸을 탐한다. 초콜릿이 살짝 묻은 꼬랑지가 남을 때까지...
-----------<눈보라콘>중에서

--- p.91

당신은 유령의 집 입구에서 느꼈던 아주 미미한 감촉을 기억해낼 것입니다. 입구에서 느꼈던 감촉이 생생해지자 당신은 기겁을 하고 맙니다. 눅누가 억지로 잡아떼지 않는다면 절대로 놓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때로 발목을 빼내려고 발버둥치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지거나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러 다른 것은 보지도 못하고 전속력으로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당신 발목에서 손을 거둔 어이는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듭니다. 태아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군가 앞에 서기를 기다리겠지요. 그녀가 입구에서 사람들의 발목을 쥐는 행위에 일종의 즐거움 같은 것이 있었다면, 아이는 최면에 길린 채 다른 기계장치들처럼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쥐인형처럼 말입니다.

--- p. 195

눈보라콘

어디선가 딱딱한 돌멩이 같은 것이 날아와 머리를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보안등 아래에서 톡 깨어진다. 동그랗고 붉은 사탕이다. 제수용 사탕. 소녀가 왔다. 소녀는 두 팔을 뒤로 꼬고 보안등에서 두어 발짝 떨어져 나를 쳐다보고 있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담에서 굴러떨어져 소녀의 발부리에 코를 박을 뻔했다.

한동안 소녀를 보지 못했다. 수업시간에도 학교 운동장에서 볼을 차자가도 문득문득 소녀가 떠올랐다. 담 위에 앉아서도 영도다리 쪽 불빛만 보면 그 밑에 있을 점집과 소녀가 생각났다. 소녀가 생각날 때면 어김없이 부라보콘의 달콤한 향도 따라 풍겨왔다. 나는 부라보콘을 지워버리려고 더 열심히 볼을 찼다. 담에서 내려가 소녀를 반갑게 맞아야 할지 아니면 소녀의 얼굴을 한대 갈겨주기라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본다. 어떻게든 다 이상해 보이는 일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자, 무라. 니 이거 좋아하제.'

소녀가 불쑥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부라보콘이다. 눈보라콘인가? 어둠속이라 잘 구분되지는 않지만 원뿔형의 아이스크림 콘이다.

'한겨울에 무신 아이스크림이고, 치아뿌라.'

너무 무뚝뚝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라 목소리 끝이 갈라지기까지 한다.

'그라믄 그냥 버리뿐다.'

소녀가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는 아이스크림을 던지는 시늉을 한다. 그렇다고 콘을 덥석 받아든다면 나를 비웃을 것이 틀림없다. 바로 내 앞에 있는 부라보콘을 외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도 거기 올리도.'
'가시나가 어디 올라온다고 그라노!'

한참 딴전을 피운 다음 콘부터 받아 조심스레 담 위에 올려놓고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는 내 손을 잡고 담벼락에 한발짝 도움닫기를 한 후 어렵지 않게 담 위에 올라앉는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어지럼증이 인다.

--- pp.105-106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를 한 마리 그려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넣는다. 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하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 p. 27

나는 다시 뛴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골목을 돌고 가게 안으로 뛰어들고 다시 뒷문으로 나오고 도주는 계속된다. 북소리는 점점 더 빠르고 강렬하게 들려온다.
눈앞에 거대한 냉장창고가 가로막아선다. 막다른 곳이다. 창고문을 연다. 뼈를 보관하는 영하 20도의 냉동고다. 지금 막 분리한 설도와 사태가 매달려 있다. 영하 2도 숙성실. 이 정도면 얼마간 참을 수 있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심장이 격렬한 박동질을 해대고 관자놀이에 정맥이 불끈거린다. 숨을 고를 때마다 하얀 김이 솟구친다. 모든 잡음이 서릿발처럼 멈춘다.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북소리. 그것은 내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였다.
높이 2미터의 냉장고 안에서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이고 있다.

--- p. 54~55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 손가락 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빠져들어갈 것 같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 p.33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 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게 두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소리와 문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를 느낄수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같은 얇은 틈새. 그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 p.33

그녀들, 우주를 빨아들이는 틈새

「바늘」에는 문신을 하는 ‘나’-여자가 등장한다. ‘나’에게 문신을 부탁하는 남자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협각류의 외피를 얻는 것은 외부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힘을 갖게 되는 존재전환의 의미를 함유한다. 그들은 강인한 외피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거미나 전갈 따위의 문신을 원한다. 문신을 할 때의 남자들은 성적으로 흥분한다. “남자의 성기는 내가 바늘을 댄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해 밑그림이 끝날 즈음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나게 마련이다.” 다른 존재로의 전이를 갈망하는 변신의 욕망은 일종의 성적 에너지를 포함한다.
그런데 ‘나’는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을 만난다. ‘나’의 육식성의 취향에 대비되는 이 남자의 결핍으로서의 남성성은 그로 하여금 강인한 힘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 남자가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줘”라고 요구했을 때,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 하나를 그려주었다.” 이때 바늘은 어떤 변신도 가능하게 하는 미지의 강력한 힘이다. 그 미지의 힘에 화자는 여성성기의 이미지를 새겨넣는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우주를 빨아들이는 틈새로서의 ‘바늘-여성성기’는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가령, 바늘로 ‘현파스님’을 죽인 어머니의 행위는 스님으로 상징되는 제도적으로 거세된 남성적 문화에 대한 살해로 해석될 수 있다. ‘바늘-여성성기-틈새’는 변신에 관한 모든 존재론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악마적인 힘을 보유한다. 바늘이 어떤 변신도 실현할 수 있다면, 여성의 틈새야말로 어떤 존재도 태어나게 하는 창조적 부재의 자리이다. 그곳은 우주를 흡수하고, 우주를 거듭나게 하는 틈새이다.
그 틈새로부터 그녀들의 월경(月經)은 월경(越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경계를 살고, 경계를 타고, 경계를 넘어서며, 경계를 낳는다. 그녀의 소설들은 제도화된 여성성과 거세된 남성 적 문화를 돌파하는 관능과 일탈의 은유들로 들끓고 있다. 천운영 소설 속의 야생적인 여성성은 사회적인 타자인 여성들 내부의 억압된 자질들을 개방하는 공격적인 힘을 포함한다. 그녀들의 시선은 제도화된 여성적 자아의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 그 제도적인 영역의 바깥으로 질주하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여성적 에너지를 드러낸다. 거기에서, 식물적인 여성성으로부터 동물적인 여성성으로의, 혹은 타자로서의 여성성으로부터 창조적인 부재와 이질적인 복수항(複數項)로서의 여성성으로의 탈주라는 존재론적 전환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천운영의 미학적 위반은 문화적인 이탈의 의미를 얻는다. 천운영을 통해 한국의 여성소설은 독특한 야생의 미학을 자기 목록에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개성이 동어반복의 알레고리와 낡은 숙명론에 머물게 되지 않기를, 소설적 언술의 트임으로 나아가는 한편 그 문화적 문맥을 확대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녀의 소설이야말로, 한 우주를 빨아들이고 한 우주를 낳는, 바로 그 틈새에서 씌어지고 있으니……

--- 이광호/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칼집을 내면 피가 꼬리로 몰려."
당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칼을 내려놓고 펜치를 집어드는 당신은 어느새 차갑고 사무적인 외과전문의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펜치로 목 부분의 껍질을 잡는다. 껍질을 당기는 당신의 팔뚝이 톡 불거진다. 나는 당신의 능숙한 손놀림이 낯설다. 잇사이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난다. 목에서 꼬리로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곰장어의 살이 드러난다. 곰장어 살이 뽀얗다.
"어릴 때 이 뽑아봤지? 잇몸에서 이가 쑥 빠질 때 소리 알아? 껍질을 벗길 때도 그런 소리가 나."
마치 당신은 내게 기술을 전수하려는 사람처럼 말한다. 껍질이 붙어 있는 곳은 이제 거의 꼬리 부분만 남았다.

--- p. 131

"칼집을 내면 피가 꼬리로 몰려."
당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칼을 내려놓고 펜치를 집어드는 당신은 어느새 차갑고 사무적인 외과전문의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펜치로 목 부분의 껍질을 잡는다. 껍질을 당기는 당신의 팔뚝이 톡 불거진다. 나는 당신의 능숙한 손놀림이 낯설다. 잇사이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난다. 목에서 꼬리로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곰장어의 살이 드러난다. 곰장어 살이 뽀얗다.
"어릴 때 이 뽑아봤지? 잇몸에서 이가 쑥 빠질 때 소리 알아? 껍질을 벗길 때도 그런 소리가 나."
마치 당신은 내게 기술을 전수하려는 사람처럼 말한다. 껍질이 붙어 있는 곳은 이제 거의 꼬리 부분만 남았다.

--- p. 131

출판사 리뷰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작가 천운영(千雲寧, 1971년생)의 첫소설집 『바늘』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천운영은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 창작과를 졸업했고, 2001년 제9회 대산문학상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은 우리 소설계의 젊은 유망주이다.
이 소설집은 등단작 [바늘]을 비롯하여 2000년 1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약 2년간 발표된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운영의 신예답지 않은 만만찮은 저력은 "독자를 위태로운 공격성과 관능과 탐미의 벼랑끝으로 밀고가는 발군의 역량"(신춘문예 심사평)이 돋보인다고 평가된 바 있는데, 수록작품 모두 편차 없이 고른 성취를 보이고 있다.
표제작 [바늘]은 문신시술을 하는 여주인공 화자와 그녀의 홀어머니, 그리고 거세된 남성성을 상징하는 암자의 주지승, 강인한 남성적 힘을 갈망하는 청년이 엮어내는 밀도있는 단편이다. 주지승의 살해사건을 둘러싸고 팽팽하고 긴장감있게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제도화된 여성성과 거세된 남성적 문화를 돌파하는"(이광호) 특유의 힘을 보여준다.
[숨]은 소골을 탐식하는 육식성의 노파와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일하는 그녀의 손자, 그리고 노파와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식물성 인간형인 손자의 애인(미연)이 등장한다. 결혼승낙을 받으려고 노파가 요구하는 송아지 태아를 구하기 위해 소머리에 물을 먹이던 화자는 단속반에 쫓겨 밀림 같은 거리를 헤매다 미연의 품속으로 숨어드는데, 원초적 생명력을 은유하는 '숨'이라는 상징으로 갈무리되는 결말이 의미심장하다.
소년의 눈에 보이는, 닿을 수 없는 어머니의 여성성에 대한 갈망과 동경을 부라보콘과 그 아류인 눈보라콘이란 상징으로 표현해낸 [눈보라콘]은 관능적인 아름다움까지 포함한 독특한 성장소설이며, 월경(越境)과 월경(月經)의 중의성을 가지는 [월경]은 어릴적 어머니의 간통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빚어진 가정파탄으로 성장이 멈추어버린 여성화자가 자신을 옥죄던 일그러진 욕망의 금기선을 넘어서 새로운 여성성으로 나아가는 소설이다.
아버지가 떠나간 먼 바다를 항상 그리워하는 주인공을 아내의 연민이 넘치는 시선으로 그린 [당신의 바다], 맹목적으로 달려들던 지긋지긋한 여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오히려 그녀의 빈자리를 그리워하게 되는 남자가 등장하는 [등뼈]에서는 상실의 아픔과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다. [행복고물상]은 폭력을 일삼는 아내와 고물상을 경영하는 그의 무력한 남편, 그리고 식물인간이 된 영감을 수발하는 노파의 이야기이고, [유령의 집]은 반대로 상습적으로 아내를 폭행하는 밀렵꾼 남편과 그의 어린아이가 등장하는데, 난폭하고 가학적인 인물들을 둘러싸고 그려지는 두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이어서 흥미롭게 읽힌다.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지닌 곱사등이 여자와, 주인노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나어린 처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자기의 존재를 찾아가는 그들의 여정이 펼쳐지는 [포옹]은 소설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이다.
천운영 소설의 인물들은 90년대 (여성)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도시적 감각의 전문직 중산층 여성이나 소설의 단골 소재였던 애정과 불륜관계와도 차별성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권말의 해설에서 등장인물들이 "제도화된 여성적 자아의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 그 제도적인 영역의 바깥으로 질주하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여성적 에너지를 드러낸다"고 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적인 여성성으로부터 동물적인 여성성으로의, 혹은 타자로서의 여성성으로부터 창조적인 부재와 이질적인 복수항(複數項)로서의 여성성으로의 탈주라는 존재론적 전환의 사건이 벌어진다"고 평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운영의 미학적 위반은 문화적인 이탈의 의미를 얻고, 천운영을 통해 한국의 여성소설은 독특한 야생의 미학을 자기 목록에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 세목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출중한 묘사력"(황종연)은 천운영 소설이 가진 또다른 장점이며, 이는 천운영의 작가적 역량과 더불어 철저한 현장취재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장동 축산시장과 횟집 주방에서의 실전 같은 체험은 소설 속에서 소머리를 가르고([숨]) 곰장어를 잡는([당신의 바다]) 충격적으로 리얼한 장면을 가능하게 했는데, 비계를 타고 빌딩 유리창을 청소하면서까지([등뼈]) 삶의 현장에 밀착하여 써낸 그의 작품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 작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신인의 처녀 소설집 『바늘』은 새로운 돌파구를 갈망하는 우리 소설계에 신선한 청량제가 될 것이다. (*)

추천평

천운영의 출현과 함께 리얼리티에 대한 정열은 새로운 발화점에 도달했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그 대상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 세목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천운영의 출중한 묘사력은 광물과 생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유추를 대담하게 밀고가는 활달한 상상력과 결합하여 인간 욕망의 화려한 세밀화를 우리 눈앞에 활짝 펼쳐 보인다. 천운영의 언어가 그 예리한 촉 수를 들이댄 가난하고 비루한 생의 이면에서는 세차게 약동하는 욕망의 역학이 무서우리 만큼 싱싱한 육체를 드러낸다. 천운영 소설은 한국소설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욕망의 포르노그라피이다.
--- 황종연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엄마는 이사다닐 때마다 정육점 위치를 먼저 알아냈다. 이십여년 공장일에 힘든 아버지의 밥상을 위해서였다.
1994 꼴찌. 점심에는 깻잎을 듬뿍 넣고 끓인 라면을 먹었고, 저녁에는 싱싱한 굴과 호박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1995 예대 등록금 일부를 차용증도 이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빌려주었던 숭의서점 아저씨. 졸업할 때 갚은 책 외상값이 꽤 되었다. 누군가 주문해놓은 책을 먼저 건네주기도 하고, 그즈음 누가 무슨 책을 읽는지 정보도 흘려주었다. 1996 부평역 투다리. 부평시내 한복판에서 외상이 되었던 곳. 주인언니 손에는 항상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일 마치자마자 작업복 그대로 달려와 일당을 아낌없이 풀어놓던 그를 거기 좁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1998 나를 위해서는 대구포를, 경란언니를 위해서는 보드라운 과일을 준비해주는 커피와 나무들. 늦게까지 앉아 있어도 언제나 환하게 웃어주는 아저씨. 신춘문예 당선소식을 들은 날 저녁 경란언니에게서 꽃다발을, 아저씨에게서는 한잔의 와인을 써비스받았다. 2000 봉자네 아줌마가 나더러 글씨 쓰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봉자네는 일년 전부터 내 책을 기다리고 있다. 마늘과 고추를 많이 넣고 참기름으로 볶은 봉자네 닭똥집을 참 많이도 먹었다.
2001 처음으로 엄마에게 근사한 저녁과 와인을 사드렸던 그안. 그날 엄마는 바닷가재 빠스따를 나는 전복 리조또를 먹었다. 엄마는 소녀처럼 부풀어올랐다.
친구들은 언제부턴가 자기 얘기를 할 때, 소설에 써먹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름만이라도 등장시켜달라거나 내 얘기 좀 써보라고 부탁하는 이들도 있다. 소설가 친구를 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는 내 순박한 벗들. 소설집에 묶인 아홉편의 소설들은 나 혼자 쓴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큰돈 주고 새긴 호랑이 문신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야나기상. 내게 영도의 추억을 도둑맞은 하봉과 최용수, 박재효, 문상원, 오호성, 문희근. 그들과 함께했던 영도의 산복도로. 그리고 용두산공원. 하봉의 원래 이름은 김상봉이다. 밤이 되면 사직구장의 불빛을 바라보며 속세를 그리워했던 금정산 중턱의 미륵암. 딱 이불 한채 깔리는 골방에 갇혀 있는 동안 활자가 몹시 그리웠다. 소머리 가르는 법과 접칼 쥐는 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던 마장동 사람들. 맹랑한 여기자로 오인받아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살을 못쓰게 만드는데도 끝끝내 회 뜨는 연습을 시켰던 제주 풍천수산 주방. 풍천수산을 접던 날 춘대는 수족관에 든 바닷가재 세 마리와 전복을 보내주었다. 70년 만에 담배를 끊으신 상도동 할머니.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당신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믿으신다. 할머니의 단단하고 고른 이와 그 이로 잘라낸 많은 육질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베란다 문을 열면 묵직한 파도소리를 내며 방안까지 밀고 들어오는 금강산콘도의 바다는 며칠이고 앉아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다. 회사 앞으로 불러내 근사한 저녁을 사기도 하는 내 동거녀 민정. 수정아파트 406호에서 그녀는 신랑이고 자매이고 보호자였다.

해설을 써주신 이광호 선생님, 원고를 맡아준 창작과비평사 여러분, 서울예대를 알게 해준 혜영언니, 절대믿음을 보여주는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돌아보면 온통 감사해야 할 것들이다. 내 가깝고 먼 이웃들을 적잖이 괴롭혔다. 이 소설집이 그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소설을 써야겠다.
숲속의 밤, 저 달이 환하다.
--- 2001년 11월 천운영
문신과 언어의 관계를 통하여 독자를 위태로운 공격성과 관능과 탐미의 벼랑끝으로 밀고가는 [바늘]의 발군의 역량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슬아슬하게 한땀한땀 따나가는 바늘 의 움직임만큼이나 노련하고 가차없는 문장이 행간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우리들 저마다의 심층에 잠복한 익명의 감각들을 불러낸다. 예리한 바늘이 정곡을 찔러 육체에 정교하고 음 산한 수를 놓으며 살 속에서 맴돌던 언어를 해방시킨다.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바늘]에서 우리는 한 예외적인 작가의 탄생을 예감한다.
--- 박완서·김화영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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